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67화 (67/345)

# 67

내성 안에도 일족 출신은 적지 않았는데, 애초에 마법사 일족 자체가 현리 일족들과 혼인함으로써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도 혈연으로 이어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70년의 평화가 길긴 했나 보군. 똑똑한 놈이 이토록 아집에 빠져 버리다니.’

남권의 머리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 시대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편에 속하였다. 아마 지력 수치가 30대 초반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남권의 문제는 지독하리만치 편협적인 사고방식이었다.

남권은 특권 의식으로 가득 찼고 지나치게 독선적이었다.

그 독선적이고 오만한 성정 때문에 이같은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남권에게 있어 일족들이란 열등한 종족에 불과할 것이니까.

‘그러나 나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야. 정말, 알아서 나를 위한 특별 무대를 만들어 주는군.’

생각을 정리한 호영은 남권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답만 하지 말고 빨리 뛰어가! 지금 당장 범인을 잡으란 말이야!”

뇌성벽력과 같은 호통 소리에 호영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그가 움직여 봤자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호영이 가르친 봉성은, 이전부터 준비된 암살자였다. 그는 비록 호영처럼 수백 미터 바깥에서 창을 날려 암살할 수는 없었지만 암살자 출신답게 지형을 이용할 줄 알았다.

비록 시간이 짧아 준비가 미흡했을지는 몰라도 대근처럼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을 암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터.

예상대로 장소에 도착했음에도 봉성이 잡혔다는 소식은 없었다. 남권이 노발대발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대왕!”

“죄송합니다.”

“무능한 새끼! 그걸 못 잡아? 네놈의 부하가 죽었는데?”

“…….”

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행히 더 이상의 질책은 쏟아지지 않았다.

그의 분노는 호영이 아닌 일족들을 향해 있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일족 놈들이 나를 우롱하고 있군. 감히 대근을 죽여? 대왕! 호위대 전부 다 데려와!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남권의 명령에 호영이 호위대 병사들을 데려오자 남권이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일족에 소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잡아 오라고!

호영에게 내린 명령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경비대, 치안대 그리고 남씨 일족의 개인 사병들까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일족들을 전부 잡아들였다.

그가 스스로 선언한 것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아마 그는 병사들을 동원할 때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강하게 몰아붙이면 일족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머지않아 범인을 자백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실제로 갑작스러운 병력 동원에 일족들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한 채 붙잡혔다.

강씨 일족이나 이씨 일족의 일부가 저항하기는 하였지만 말 그대로 일부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은 무기력하게 붙잡혔던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모습은 어떻게 보면 ‘항복’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범인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남권의 예상이 틀어진 셈이었다.

“이래도 안 나와? 오냐. 네놈들을 모조리 죽이면 되겠구나!”

연병장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광기에 찬 남권의 외침. 이런 남권의 외침은 단순히 협박이 아니었다.

부우웅!

난데없이 창을 휘두르는 남권! 그의 행동에 연병장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으로 그의 행동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마치 이곳에 있는 사람들 전부를 죽일 작정인 것처럼 창을 휘둘렀고, 심지어 마법까지 사용하였다. 순식간에 열 명 이상이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였다.

‘대근의 죽음이 광기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된 것인가?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를 보는 것 같군.’

그야말로 정신 나간 폭거였다. 역사에 나오는 폭군들이나 할 법한 폭거 말이다.

호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처음 봤을 땐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보였는데 알고 보니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였다.

‘때가 되었다.’

호위대 및 치안대 병사들의 표정도 좋지 못하였다. 특히 호위대 병사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남권을 노려보았다.

직접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절반 정도는 두려움과 공포에 잠겨 있지만, 나머지 절반은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누군가가 신호탄만 쏘아 준다면 이 거대한 분노가 단숨에 폭발할 것이었다.

그리고 호영은 신호탄을 직접 쏠 생각이었다.

“장훈.”

“예.”

“나는 지금 어디를 갈 생각이다.”

“지시하실 사항이 있습니까?”

“만약 내가 없는 동안 남권이 죽는 일이 생긴다면…… 경비대와 치안대를 장악해라.”

“……!”

“알아들었느냐?”

“……예, 알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명령. 호영은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의 장훈을 무시하고는 곧장 자리를 떠났다.

마족들은 현리의 주요 시설마다 거대한 탑을 설치하였는데 호위대의 연병장에도 하나 설치되어 있었다.

호영이 다시 나타난 곳도 연병장에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탑 위였다.

거대한 탑 위에 뼈창 하나 든 채 올라선 호영.

‘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그러니…… 이만 죽어라, 남권.’

그는 연병장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진짜 미친놈이네, 저거.’

원재는 남권의 난동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마법사라고 이같은 행동을 하다니. 추장이 직접 했다고 해도 용납할 수 없었을 텐데 말이다.

“준비들 하세요, 언제든 뛰쳐나갈 수 있게.”

“알겠습니다.”

우씨 일족. 그들 역시 남권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갑작스러운 호위대의 습격으로 우씨 일족은 순식간에 포로 신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원재는 아무런 대비 없이 붙잡힌 것은 아니었다. 붙잡히는 도중에 호위대 대장과 교감을 나눈 상태.

계획했던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원재는 단숨에 우씨 일족을 이끌고서 봉기할 것이었다.

‘우씨 일족만이 아니지.’

원재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일족의 사내들과 눈빛을 교환하였다.

사씨 일족의 사내들과 대씨 일족으로 위장한 봉씨 일족의 사내들.

몇 차례의 암살 작전에 적극 협조하였던 사내들이 원재의 신호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원재가 봉기할 때 같이 동조해 줄 것이었다.

그때 원재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간간이 내질렀던 비명이 섞인 탄성과는 전혀 다른 탄성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따라 원재가 고개를 높이 드니 그곳에 한 사내가 보였다. 탑 위에 우뚝 올라가 있는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정말 퍼펙트 합니다, 팀장님!’

원재도 탄성을 내질렀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등장만으로 순식간에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분노와 좌절감, 두려움 따위였다. 한마디로 부정적인 것들만 가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탑 위에 뼈창을 든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사람들의 감정은 순식간에 돌변하였다.

희망!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난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희망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고작해야 덩치 큰 사내 한 명이 탑 위로 올라간 것일 뿐이니까.

하지만 원재는 오직 이날만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었다. 바로 영웅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다.

부족에 해악을 끼치는 악당들을 처단한 정의의 사도!

그것도 단순한 정의의 사도가 아닌, 무려 ‘대추장의 환생’으로 거론되는 영웅이었다.

마족들 때문에 퇴색되기는 하였지만 현리 부족에서 대추장은 여전히 전설적인 존재였다.

그 전설적인 존재가 다시 환생하여 악당들을 처단하는 셈이었으니 현리 부족민들의 입장에선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기는 기회인 법.

모두가 절망하고 공포에 젖어 있을 때 갑작스러운 영웅의 등장은 희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다.

“모두 보아라! 저기에, 우리의 구원자가 왔다! 대추장님이 다시 돌아오셨다!”

원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우씨 일족, 사씨 일족, 봉씨 일족, 이렇게 세 개의 일족이 동시에 외쳤다.

“대추장님이 돌아오셨다!”

“마법사들을 응징하신다!”

“마족에게 천벌을 내리신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서 크게 술렁거렸다. 이제 탑 위에 있는 사내를 발견하지 못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탑 위에 뼈창을 든 사내를 본 순간 그들은 열광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구원자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대왕! 네놈이 설마?”

남권이라고 사람들의 소란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소란의 주범이라고 여겨지는 뒤편을 바라보았고 뒤편의 탑 위에 우뚝 서 있는 현리의 영웅, 대왕을 발견하였다.

당연하겠지만 대왕을 발견한 순간 그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뼈창을 들고 있는 대왕. 그것은 대왕이 이 사태의 주범임을 의미하였다.

한마디로 대왕은 지금껏 남권을 농락하고 우롱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남권은 더 이상 분노를 표출할 수 없게 되었다. 벼락처럼 내리꽂힌 하나의 뼈창. 그 뼈창에 절명하고 만 것이었다.

“와아아아아아!”

남권이 죽은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펴고 일어나 환호성을 내질렀다.

남권의 죽음! 그것은 모두가 바라던 일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남권의 죽음을 아쉬워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호위대나 치안대조차 장훈의 지휘하에 조용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추장께서 돌아오셨다!”

“대왕님이 대추장의 환생이다! 남권을 응징하셨다!”

평소의 대왕이라면 무슨 짓을 하든 욕먹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남권의 폭거를 말리기는커녕 앞잡이처럼 행동하는 모습에 더욱 악명이 높아졌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대왕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단숨에 바뀌었다. 대추장의 전설이 누구인지, 지금까지 마법사를 죽여 온 게 누구인지 확실하게 증명된 것이다.

순식간에 현리의 영웅이 되어 버린 대왕! 더 이상 과거의 대왕은 없었다. 오직 현리의 영웅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흐름을 이어 나가야 한다.’

원재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이 열기가 가시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 마침 탑 위에 올라가 있던 대왕이 땅으로 내려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최소 중상이 될 높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뛰어내려 온 대왕은 사람들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자랑스러웠던 우리 부족은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조용한 목소리는 연병장 전체로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함성을 멈추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엄청난 존재감으로 단숨에 대중을 장악한 것이었다.

“누구도 우리를 이기지 못했고 누구도 우리를 지배하지 못했다. 거인도, 오크도, 수인족도 우리는 모두 이겨 냈다!”

“…….”

“우리는 자랑스러운 현리의 일원이다. 긍지 높은 현리의 일원으로서 패악만 일삼는 마법사의 지배를 용납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없습니다!”

세 일족이 마치 바람잡이라도 된 것처럼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다른 일족들도 호응하기 시작하였다.

대왕이 무슨 말만 하면 크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마치 대왕의 부하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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