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65화 (65/345)

# 65

입가에 조소를 머금은 대왕은 그대로 자리에서 벗어났다. 수혁은 그런 대왕의 뒷모습을 허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호위대의 협력은 완전히 물 건너간 것이었다. 협박까지 했으니 자존심 강한 대왕이 협조해 줄 리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수혁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열 번째로 벌어진 암살!

비록 암살 자체는 막지 못했지만 증거라도 찾아야 했다. 수혁은 곧바로 사건 현장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저 투창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것밖에는.

사건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었다.

* * *

“또다시 그놈이 움직였다고?”

“그렇습니다. 이번에 암살된 이는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 관리입니다, 영주님.”

남권. 그는 추장, 유주를 ‘영주’라고 칭하였다. 추장이라는 단어보다 영주라는 단어가 그들에게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주라고 칭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법사들 앞에서의 이야기. 공식 석상에서는 추장이라 불렀다.

“정말 우리의 손발을 자르고 있군. 아주 계획적으로 말이야.”

“단순히 손발을 자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놈은 우리의 체제를 붕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 고작 암살범 따위가.”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이 이상 사태를 방관했다간…… 평민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유주가 분노하였다. 지금 남권이 한 말은 일종의 역린을 건든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뭐라? 새로운 지도자?”

“그놈을 지금 뭐라 부르는지 아십니까? 대추장의 환생이라 부릅니다. 현리 역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그 전설의 대추장 말입니다. 평민들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성외 가문들도 열광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은 영주님이 축출되기만을 기대하고 있을 겁니다.”

너무 노골적으로 말했기 때문일까? 남권을 노려보는 유주의 눈이 살기로 물들었다. 표정만 봐서는 당장이라도 남권을 어떻게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을 대표하는 유주라고 해서 남권을 숙청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남권은 마법사들 사이에서 무척이나 인정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주라고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지 않았다.

비록 남권의 말은 지나치게 직설적이었지만 차가운 현실을 일깨워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지금 이 자리…… 원주민 따위에게 뺏길 수도 있으리라.

“해서? 경은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건가?”

“없지는 않습니다. 일단 수혁, 그자를 숙청하십시오. 무능하고 한심한 놈입니다. 더 이상 이런 자에게 큰일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하긴, 그자는 벌써 여러 번 실패하였지. 애초에 치안대가 범인을 잡지 못해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숙청해야 합니다.”

수혁은 현리에서 나름 실력가로 통하는 치안대의 대장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두 사내에겐 언제든 치울 수 있는 ‘말’에 불과하였다.

“하면 범인은 누가 잡지? 호위대를 시켜야 하나?”

“호위대도 신뢰할 수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호위대의 대장은 아군인지 적군인지 확실하게 분간이 되지 않는 대씨 가문의 가주라는 사실을?”

“하지만 수혁 그자가 범행이 벌어지는 당시에 대왕과 함께 있었다고 말하였다.”

“그것만으로 의심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범인이 아니더라도 범인을 숨겨 주거나 공조하고 있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계속된 반론에 유주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치안대도, 호위대도 안 된다면 범인은 누가 잡지?”

“제가 직접 잡겠습니다. 명을 내려 주시지요.”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남권의 말에 유주는 눈을 크게 떴다. 고작 범인을 잡겠다고 직접 움직이겠다니!

평소 남권의 행실을 생각하면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 누구보다 엉덩이가 무거웠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경이 나서면 확실하기는 하겠군. 그런데 따로 방법이 있는 건가? 지금 범인에 대한 단서가 아무것도 없다고 들었는데.”

“가장 먼저 성외 가문들을 압박할 것입니다. 어차피 범인은 성외 가문들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농사밖에 할 줄 모르는 평민이 이만한 일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음, 그럴 법한 말이군.”

“그리고 대왕을 저의 호위로 쓸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그가 의심스럽거든요.”

끝까지 대왕에 대한 의심을 저버리지 않는 남권을 보며 유주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역시 철저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믿음이 가는 것이지만 말이다.

#전설이 돌아오다

마법사들이 죽어 나가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현리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지만 호영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호위대가 훈련하는 연병장. 그곳에서 호영은 여느 때와 같이 호위대의 훈련을 감독하고 있었다.

“발을 맞추어라. 허리는 왜 그렇게 굽히는 것이냐!”

처음 고블린과의 전쟁에서 보여 주었던 호위대의 모습은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개개인의 전투력이야 쓸 만했지만 군대 특유의 조직력은 보잘것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있었던 오크와의 전쟁에서도 크게 발전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여전히 각개로 조직적이지 못한 전투를 치렀던 것이다.

하지만 호위대는 대략 한 달 전을 기점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군대보다는 용병 부대에 가까웠던 호위대가 점차 조직적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도 이같은 발전을 주도했던 것은 호위대의 대장인 호영이었다. 그는 엄청난 맹훈련으로 호위대라는 조직을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이제는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지체 없이 이행할 정도였다. 물론 이전에도 명령이야 곧잘 따르긴 했지만 그 순발력에서 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지금의 호위대는 마치 중간 과정이 생략된 것처럼 곧장 명령을 이행하였다. 마법사를 공격하라고 명해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공격할 정도로 말이다.

“대장님.”

“휴식 시간에 무슨 일이지?”

“대근이가 무릎이 아프다고 합니다.”

“또 부상인가? 그 녀석은 이틀 연속으로 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군.”

호영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렇게 말하였다. 그로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상을 호소하는 대근이라는 병사가 좋게 보이지 않았다.

제아무리 아바타의 혈족이라 해도 말이다.

“너무 꾀병이라고 생각하진 말았으면 합니다. 이전까지는 곧잘 따라오던 아이 아닙니까? 갑작스럽게 바뀐 훈련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혼자만 적응하지 못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건가?”

“……대장님, 사실 애들이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훈련이 바뀐 뒤로 무척이나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훈련이 너무 고달파졌으니 말입니다. 아니, 훈련은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애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차별적인 식량 배급입니다.”

사실 호영이 하는 훈련은 따지고 보면 훈련이라고 부르기가 부적절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훈련은 조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훈련에 낙오되면 야만적으로 육체 학대를 가하는 것. 훈련 성과에 따라 하루 일식, 이식, 삼식이 결정되는 것.

어떤 것을 봐도 ‘조련’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야만적인 조련이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엄청난 성과를 보았던 것이지만 말이다.

“차별적인 식량 배급이 문제인 것은 병사들 간의 위화감이 조성된다는 것입니다. 어제도 패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갔다간 형제 같았던 병사들 간의 우애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형제 같아서 오히려 문제인 거다.”

“…….”

“명심해라. 우리는 가족이 아니야. 우리는 호위대의 대원들이다.”

그같은 말에 장훈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사 표현 같았다. 호영은 그런 장훈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장훈이 마법사들의 끄나풀이라면 직언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운털이 박히는 것보단 아부를 떨며 호영의 환심을 사는 것이 나았을 테니까.

‘정말 끄나풀이 아닌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나의 계획을 설명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제 곧 계획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니 말이야.’

하지만 아직은 확신하긴 일렀다. 십장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것이 장훈이었다. 호영을 감시하기에 이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을 터.

그렇기에 호영은 조금만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

* * *

“활약이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팀장님.”

“일족들의 반응은 어때?”

“난리도 아닙니다. 전설이 귀환했다, 천벌이 내린 거다, 아무튼 영웅이 만들어진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원재의 말에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바쁘게 움직였었다. 그토록 좋아하던 수련 시간까지 줄였을 정도로 말이다.

어찌 되었건 그렇게 뻘뻘거리며 움직인 덕에 현리의 모든 이가 ‘전설의 귀환’을 알게 되었다. 호영은 그야말로 현리의 전설이자 영웅이 된 것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내가 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수는 없었다. 분명 많은 활약을 하였지만 그 활약은 대왕이 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대왕이 한 것은 맞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현재 그들이 만든 영웅은 얼굴 없는 영웅. 대왕은 여전히 현리의 골칫거리이자 마법사들의 충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 그게 문제네.”

“가장 좋은 방법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처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확실하겠네요. 누구든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벌써부터 팀장님의 존재를 드러내도 되겠습니까?”

“내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마법사 전부를 상대해야 될 수도 있는데 말입니까?”

“그래. 어차피 이제 흐름은 조성되었어. 이 흐름을 이용하면 프랑스혁명 같은 대규모 혁명을 일으키는 것도 어렵지 않아. 즉, 나 혼자 싸우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

이미 호영의 활약으로 현리에는 마법사에 반하는 기류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니 사실 호영은 불만 붙였을 뿐이었다.

마법사들은 그동안 특권 의식을 바탕으로 엄청난 악행을 저질러 왔다. 초강의 자식이 추장으로 있을 때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였지만 70년 가까이 안정된 통치가 이어지면서 온갖 폐단이 생겨났다.

어느덧 현리를 대표하는 명문 일족들에게까지 강요와 협박을 일삼는 상황. 한마디로 지금의 마법사들은 현리에서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이 가진 마법이라는 신비가 두려워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아하. 그렇다면 정말 팀장님이 대추장의 환생이라는 사실만 밝히면 되겠습니다.”

“그래야 내가 혁명을 주도할 수 있으니까. 솔직히 내가 주도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도 하고.”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나 대왕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더욱더 힘들게 느껴졌다.

사씨 일족을 설득할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이라면 쉽게 설득할 수 있었던 일이, 대왕이라는 이유로 몇 배는 힘들게 설득해야 했었다.

그만큼 현리에서 대왕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것이다.

“뭐, 이것은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고. 배신웅이나 우씨 일족에선 또 다른 소식 없어?”

“배신웅에게서 소식이 오긴 했습니다.”

“어떤 소식?”

“남권이라고 아십니까?”

“내가 알기로 추장의 참모 격인데?”

“그 사람이 움직인답니다, 팀장님을 잡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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