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그녀의 말을 들으니 작년에 준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 동생은 절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고.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니 확실히 성깔이 있어 보였다.
‘그래도 왠지 믿음직스럽군. 정말 준기가 며칠 이내에 돌아올 것만 같아.’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와 만나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았다.
* * *
현실에서 제법 시간을 보내고 센추리에 접속하였지만 다행히 그사이에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중씨 일족의 주요 인사 중 한 명이 갑자기 암살당한 일이 생기긴 했으나 호영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정도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들까지 죽고 나면 상황이 달라지겠지.’
그때는 현리 부족 전체가 요동치게 될 터. 호영에게도 커다란 영향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뭐, 나는 바로 그 혼란을 바라고 있지만.”
어떤 영향이 오든 호영은 두렵지 않았다. 이미 그는 각오를 단단히 한 상태였으니까. 오히려 혼란이 오면 그에게 이득이었다.
혼란이라는 것은 준비한 자에겐 오히려 기회라고 볼 수 있는 일. 호영은 준비한 것을 넘어 혼란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호영은 굳게 마음을 먹으며 다가올 혼란을 대비하였다.
‘벌써 2회 차가 시작된 지도 열흘이 지났나? 센추리 시간으로는 한 달이 넘게 지났네.’
하루, 이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당연히 호영은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저택에서 창을 수련하거나 연병장에서 호위대를 훈련시키며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을 반복하는 호영이었지만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것을 하고 있었다.
배신웅과의 접촉, 사씨 일족과의 연대, 두 번째 암살 준비 등. 현리 부족에 혼란을 만들고 그 혼란을 이용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갖추는 도중임에도 호영은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왜냐하면 그는 대왕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마법사가 적지 않다.’
저택 안에서는 그나마 감시의 시선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저택만 나서면 알게 모르게 감시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호위대와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확실히 호위대 장병 중에 감시자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건 그만큼 호영을 향한 경계심이 크다는 의미일 터.
“하지만 이제는 기호지세다.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해.”
주먹을 불끈 쥐며 불안감을 털어 냈다.
안 그래도 불안하다는 이유로 보다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였다.
무엇보다 그는 이미 전쟁을 시작한 상태였다. 지금에 와서 물러날 수도 없고 물러나서도 안 된다. 그러니 우직하게 계획했던 대로 움직이리라.
‘두 번째 타깃은 배상이다. 배상을 암살하여 현리의 영웅이 된다.’
배상. 마법사로서 어떠한 재능도 갖지 못한 무능력자. 그럼에도 특권 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어서 부족민들을 상대로 패악한 짓을 일삼는 인물이었다.
일족들을 상대로도 패악을 부렸는데 그래서인지 배상을 향한 전체적인 민심은 가히 최악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호영이 배상을 두 번째 타깃으로 선택한 이유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공공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배상을 죽인다면 ‘영웅’을 만들기도 한결 수월할 터.
물론 배상이 워낙에 내성 밖을 싸돌아다니는 인물이라 암살하기 쉽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마침 내성 밖으로 나왔군. 지금이 절호의 기회야.”
그렇게 중얼거린 호영은 뼈창 하나를 들고 몸을 움직였다.
그가 향한 곳은 동쪽 목책 인근. 부족민 중에서 비교적 부유한 부족민들이 살아가는 그곳에 배상이 있었다.
아마 이번에도 아녀자를 강제로 겁탈하거나 왈패 노릇을 하고 있을 터. 모두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면서도 정작 자신만은 비열하게 웃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호영은 창을 어깨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200미터 떨어진 곳에 목표가 보였다. 절대 투창으로 맞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지만 호영은 걱정하지 않았다.
활, 아니 소총으로도 맞히기 힘든 거리라고 해도 지금 호영이 가진 힘이라면 충분히 맞힐 수 있었다. 그동안의 투창 연습이 자신감을 더욱 키워 주었다.
휘이이익!
그의 손에서 뼈창 하나가 섬전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뼈창은 정확하게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결과는 호영의 예상대로였다. 창에 맞은 목표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즉사하였다. 호영의 목표였던 마법사 배상은 그렇게 죽었다.
다음 날이 되자 현리 전체가 소란스러워진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 * *
치안대. 경비대와 같이 무려 100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조직이었다.
처음 치안대의 힘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숫자라고 해 봤자 고작 백 명도 안 되었고, 권한도 그리 많지 않았었다.
오로지 현리를 대표하는 친위대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치안대의 영향력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친위대가 초씨 일족을 따라 부족에서 사라지고 호위대라는, 몸집이 크게 줄어든 조직이 생겼을 때가 첫 시작이었다.
그때 이미 치안대는 현리를 대표하는 군 조직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치안대의 대장 자리를 세습하던 수씨 일족이 마법사들의 일족 중 하나인 정씨 일족과 혼인한 이후 치안대의 영향력은 정점을 찍었다.
이제는 마법사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치안대를 무시하지 못하였다. 설령 호위대의 대장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도와줄 수 없다는 말이요?”
현 치안대의 대장, 수혁. 마법사를 제외하고는 가장 지위가 높다고 볼 수 있는 사내가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으니.
하지만 수혁의 눈앞에 있는 상대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같은 대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호위대의 대장, 즉 대왕이었다.
“내가 왜 도와줘야 하지? 나는 마법사 일족을 지키는 사람이야.”
“그 마법사가 죽었지 않소! 벌써 죽은 마법사만 셋이오. 당신도 이번 일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소.”
“나는 책임이 없다. 왜냐하면 죽은 마법사들은 전부 호위대의 호위를 거절한 이들이거든.”
“……이익!”
“무엇보다 우리 대씨 가문의 선조인 대준 대추장님의 천벌인데 내가 어찌 막을 수 있겠어?”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을 믿는 것이오? 이미 100년 전에 죽은 대추장의 천벌이라니, 무식한 것들이나 믿는 헛된 소문이오.”
“그렇다면 마법사가 한 짓이겠지. 마법사가 아니라면 그 정도의 거리에서 창을 쏘아 맞힐 수는 없잖아? 더군다나 저택 안에 있을 때도 죽었다며.”
수혁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 역시 마법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모두 아홉 번의 암살이 있었다. 명문 일족들의 인원들부터 관리나 마법사들까지 암살 대상은 다양하였는데 정작 암살 수단은 한 가지였다.
바로 투창 공격.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투창 공격에 아홉 명 모두 즉사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건물 안에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벽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뚫어 버리기 때문이다.
호위 역시 마찬가지. 제아무리 호위로 인의 장벽을 세워도 투창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벼락처럼 날아오는 까닭이었다.
“나도 이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고 있소. 하지만 그렇다고 잡지 않을 수도 없지 않소?”
“잡아. 내가 언제 말렸어?”
“당신도 협조해야 한다는 말이요!”
“왜지? 이건 치안대가 해야 할 일이잖아? 과거에는 치안대 일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나를 나무라지 않았던가? 딴생각하지 말고 마법사나 지키라며 말이야.”
“그, 그것은…….”
“변명할 필요 없어. 나 역시 그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할 일은 부족의 주요 인사를 호위하거나 외부와의 전쟁에서 선두에 서는 일이야. 그러니 치안대가 할 일은 나에게 미루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자리를 떠나려는 대왕.
“마법사들이 당신을 의심하고 있소.”
하지만 갑작스러운 수혁의 말에 대왕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현리에서 투창 실력이 가장 뛰어난 것은 당신이고, 희생자들 역시 당신과 그리 관계가 좋지 못한 자들이니까.”
“…….”
“그러니 협조 좀 해 주시오. 같은 명문 일족끼리 도와야 하지 않겠소? 호위대가 협조만 해 준다면 마법사들에게는 내가 확실하게 말해 주겠소, 당신은 절대 범인이 아니라고.”
절박한 목소리로 간곡하게 말하는 수혁.
그만큼 현재 수혁의 상황은 좋지 못하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던 마법사들의 질책은 어느덧 질책 수준을 넘어서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혼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즉, 그는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범인을 잡지 못하면 죽는 것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들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단순히 암살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누구 한두 명이 죽고 끝나는 게 아니라, 체제 자체가 전복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법사들의 가진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마법 특유의 신비로움에 있었다.
마법사들이 가진 전투력?
대단치 않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결코 ‘절대적’이라고 볼 수 없는 힘이었다. 이번에 죽음을 맞이한 마법사들처럼 예상치 못한 공격에는 무기력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법 그 자체의 위력보다는 마법이 주는 그 신비가 훨씬 위력적이었다. 실제로 마법사들이 ‘대추장의 전설’을 누르고 현리의 지도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신비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현리 부족에서는 마법사들의 신비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창 한 방에 무기력하게 죽어 나가는 마법사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던 경외의 대상들이 알고 보니 별거 아니라는 인식이 현리 전체에 퍼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대로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면 마법사들은 ‘절대자’의 위치에서 현리 부족민과 같은 ‘인간’의 반열로 추락하게 될 것이리라.
그리고 부족민들과 같은 인간이 된다면 지금까지 쌓아 왔던 악업들이 일순간 모조리 터져 나올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암살범을 잡는 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치안대에 가해지는 압박도 강해질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수혁이 대왕에게 이리도 절박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바로 그같은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살아야 하니까.
물론 그렇다 해서 대왕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저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 보고 싶은 마음일 터.
“대, 대장님.”
그때였다. 갑자기 병사 한 명이 다급한 모습을 한 채 수혁에게로 달려왔다. 수혁에게 갔다는 것만으로도 병사의 소속이 호위대가 아닌 치안대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냐!”
“또다시 암살이 벌어졌습니다!”
“……!”
수혁은 눈을 크게 뜨고 대왕을 바라보았다.
하필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건이 터지다니! 이러면 용의자라는 이유로 협조를 요구할 수가 없게 된다.
대왕의 알리바이를 수혁 본인이 증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들도 더 이상 나를 의심할 수 없겠네? 나를 의심하려면 너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으니까.”
예상대로 대왕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이용하였고 수혁은 그런 대왕에게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