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61화 (61/345)

# 61

“회군한다.”

“알겠습니다.”

여느 때처럼 장훈이 호영의 명을 받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훈이 다시 호영의 앞에 섰을 땐 회군 준비가 모두 완료되어 있었다.

능력이 좋은 인물이라 그런지 행동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신속하였다. 호영은 겉으로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예리하게 장훈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다.

‘너는 마법사들의 끄나풀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병사들의 신망도 두텁고 능력까지 출중한 장훈. 웬만해서는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고 싶은 인물이었다.

호영은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며 회군을 서둘렀다.

나흘이라는 시간은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현리 부족의 사정을 생각하면 결코 짧다고 볼 수 없는 시간이었다.

이번에도 강행군을 하여 현리로 돌아온 호영.

“조, 족장님!”

현리로 돌아오기 무섭게 그를 반겨 준 것은 그의 집사이자 수족이라 할 수 있는 ‘혜성’이라는 이름의 중년 사내였다.

“무슨 일이냐?”

“저택이, 족장님의 저택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의 저택에 화재라도 났다는 건가?

“침착하게 말해라. 네가 그렇게 말해 봤자 난 알아들을 수 없으니까.”

“후우, 죄송합니다. 소인이 너무 놀라서…….”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남씨 일족의 마법사분들이 갑자기 들이닥쳤습니다, 조사할 것이 있다면서.”

“무엇을 조사해?”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답니다, 족장님의 저택에 봉씨 일족의 사람들이 숨어 살고 있다고.”

“…….”

혜성의 말에 호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표정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지만 호영의 눈빛에는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다행히도 발견된 게 없다며 그냥 물러났습니다. 하지만 사씨 부인이 그때의 일로 충격을 받아 와병 중에 있습니다.”

“심각하지는 않고?”

“예. 많이 나아졌으니 곧 털고 일어나실 수 있을 겁니다.”

그제야 호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출정에 나서는 동안 저택이 털렸을 줄이야. 예상하고 봉씨 일족을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가?’

밀고라는 핑계가 있었다지만 어쨌든 마법사들의 충견이라 불리는 대왕을 갑작스럽게 공격한 셈이었다. 이건 어쩌면 마법사들이 사냥개를 삶아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호영으로선 더욱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내성으로 가야겠어.”

인상을 찡그린 채 그렇게 중얼거리는 호영. 그로서는 마법사들의 생각, 정확히는 추장의 의중을 확실하게 알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원정 보고도 해야 했고 말이다.

호영은 그렇게 원정에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내성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그의 발걸음을 막는 사람이 없었다.

‘분명 100년 전에 내가 생활하던 곳인데…… 전혀 다른 곳이 되었군.’

내성 안의 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것과 전혀 달랐다. 애초에 석벽부터 그랬지만 내성 안은 마치 시대를 앞지른 것 같았다.

곳곳에 꾸며진 화원부터, 거대하고 웅장해 보이는 저택들까지. 내성 밖이 아직 고대 시대라면 내성 안은 중세 초입 정도의 모습이었다.

‘뭐, 마족들이 세운 곳이니 당연하다고 해야 되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호영은 어느덧 추장의 집무실에 도착하였다.

“호위대장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추장님을 대할 때 최대한의 예를 갖추십시오.”

“알겠소.”

“그럼 추장님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시종은 그렇게 말하더니 집무실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추장의 허락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대략 15분 정도가 지났을까?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추장과의 독대가 허락되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번례가 참 많아졌다는 말이지. 한 번 만나는데 무슨 15분이나 걸려.’

이 또한 마법사들의 영향일 터. 호영은 시종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추장의 집무실 역시 지나칠 정도로 거대하였다. 집무를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회의해도 될 것 같았다.

“호위대장, 대왕이 추장님을 뵙습니다!”

호영은 여러 사내 중 화려한 장신구를 휘감고 있는 사내에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화려한 장신구를 한, 20대 중반의 사내가 오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는 작으나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이 사내가 바로 현리 부족의 추장, 유주였다.

“오크를 토벌하고 돌아왔다 했나?”

“예. 그렇습니다.”

“저번에는 고블린을 토벌하였다고 들었는데…….”

“그, 그렇습니다!”

속으로는 이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지 의심스럽고 경계심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감격한 얼굴을 하였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절대 감동할 일이 아니었지만 대왕이라면 이 상황에서 크게 감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틀린 생각은 아니었는지 추장, 유주는 전혀 어색함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역시나 호위대장은 능력이면 능력, 충성심이면 충성심. 부족한 게 없단 말이지.”

“……감사합니다.”

“이런 호위대장을 아직도 의심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나는 안타까울 뿐이야.”

“예?”

“아, 특별한 건 아니고. 호위대장의 일족이 그 유명한 대씨 일족이잖아? 몇몇 마법사들 중에는 여전히 대씨 일족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어서 말이지.”

“그렇습니까?”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 있는 유주였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호영은 조금 딱딱해진 표정을 하였다.

“물론 나는 전혀 의심하지 않아. 의심하기는커녕 오히려 호위대장이 대씨 일족이라는 사실이 나는 더욱 마음에 들어. 평민들에게 명망 높은 대씨 일족이 나를 따르는 셈이잖아? 명문이라고 자랑하는 다른 일족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름 높은 일족이 말이야.”

대씨 일족을 칭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호영으로선 기뻐할 수가 없었다.

유주의 눈빛. 그 눈빛 속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찬이십니다.”

“하하하, 과찬이라니. 호위대장은 조금 더 자신의 일족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호쾌하게 말하는 유주를 보며 호영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처신이었다.

그런 호영을 내려다보며 유주는 만족스럽게 웃더니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였다.

“지금처럼만 해. 그러면 다른 일족은 몰라도 대씨 일족의 영광은 영원할 것이니.”

의미심장하기 그지없는 말. 호영은 일그러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잡아 펴며 간신히 대답하였다.

“제 충성심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하하하! 좋아, 좋아.”

그렇게 추장, 유주와의 첫 만남이 끝났다. 호영은 미간을 주무르며 추장의 집무실을 나왔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이런 식으로 경고할 줄이야.’

경고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오히려 머리가 아팠다. 혹시 또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호영이 생각하기에도 굳이 술수를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추장이 했던 말처럼 현리에서 대씨 일족이 차지하는 위상은 결코 작지 않았다. 초씨 일족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명성이 높은 일족이었다.

그러니만큼 함부로 적대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대씨 일족이 추장의 밑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얻는 게 적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다. 추장의 실력은 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위안을 삼았다. 마법사들이 지금의 호영을 보고 무엇을 파악했는지 몰라도 호영 역시 알아낸 것이 적지 않으리라.

“대왕.”

갑작스러운 부름. 호영이 고개를 돌리니 남씨 일족의 남권이라는 마법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영은 곧장 고개를 숙인 채 답하였다.

“부르셨습니까. 마법사님.”

남권. 유주의 최측근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여느 마법사들처럼 특권 의식으로 가득한 사내였는데, 그래서인지 아무런 직책도 없으면서 호영에게 다짜고짜 하대하였다.

하기야 마법사라는 신분 자체가 상급자임을 증명하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신고가 들어와서 저택을 뒤졌더니 아무것도 없더군. 용케 눈치채고 옮겨 놓은 것인가?”

“무슨 말씀이신지?”

“단순하기만 한 놈인지 알았는데 제법 영악해. 앞으로도 지켜보겠다, 대왕.”

끝까지 자기 할 말만 내뱉고 물러나는 남권을 보며 호영은 황당한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서 중얼거렸다.

‘지켜보겠다고? 오냐. 마지막까지 지켜보기만 해라.’

추장에 이은 남권이라는 자의 경고. 힘이 없는 자는 자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경고였다. 그러나 호영은 오히려 독기를 품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부족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마법사들에게 짜증이 나 있는 상황. 이렇게 불을 붙이니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슬슬 행동에 나서야겠어.’

인내하는 것은 이제 그만두기로 하였다.

힘도 어느 정도 되찾은 상황.

새로운 육신도 익숙해졌고 스킬의 습득도 끝났다.

이제 세력을 만드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부인은 어디에 있지?”

“안채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저택으로 되돌아온 호영은 곧장 안채로 향하였다. 안채에 가니 사연이 곱게 누워 있었다.

“사연.”

“…….”

“안 자고 있다는 거, 다 알고 있다.”

그 말에 사연이 눈을 뜨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시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봉씨 일족, 그놈들을 모두 내 앞으로 데려와라.”

순간 사연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한눈에 봐도 당혹스러워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침묵은 잠시. 사연은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봉씨 일족이 우리 저택에 없는 것은 마법사들이 밝혀낸 사실이잖아요!”

“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호위대를 이끌고서 찾아갈 것이다. 당연히 그때는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지.”

“……!”

그녀가 말문을 닫았다.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는 사실은 호영의 기세에서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터.

“두 번 말하지 않겠다. 지금 당장 불러와라.”

“……알겠어요.”

힘겹게 대답하는 사연. 그녀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밖으로 나갔다. 봉씨 일족의 인사들을 불러오기 위함일 터.

물론 불러오지 않고 도망치라는 말을 전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 대씨 일족의 노예로 숨어 사는 봉씨 일족이다. 부족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호영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부족을 벗어나 자립하는 것도 가능할 리 없고 말이다.

실제로 4시간 정도가 지나자 열두 명의 사내가 무서운 표정으로 호영의 저택에 들어섰다. 봉하를 비롯한 봉씨 일족의 일원들이었다.

그들은 저택에 들어서기 무섭게 호영을 찾았다. 가장 먼저, 앳된 얼굴의 청년이 호영을 보자마자 물음을 던졌다.

“어떻게 저희의 존재를 알았습니까?”

“그게 지금 중요한가?”

“당연히……!”

목소리를 높이려던 청년을 봉하가 가까스로 말렸다. 역시 지력 수치가 높은 인물답게 일종의 리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것을 물어보겠습니다. 족장께서 저희를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간단해. 네놈들은 오늘부터 나를 따라 줘야겠어.”

호영의 말에 열두 명 모두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바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족장께서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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