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누가 추장의 죽음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봤을까? 그야말로 신화 속의 존재와 다를 바 없이 느껴지던 추장이었다.
어떤 종족도 추장을 당해 내지 못하였고, 추장은 인간이 이룩하지 못했던 업적을 수도 없이 이루어 냈다.
어느덧 신앙의 대상이 된 추장은 ‘죽음’마저 비껴가리라 모든 이들이 생각하였다. 당연히 초강의 머릿속에도 추장의 죽음은 들어 있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 추장님께서 죽으셨을 리가 없다!’
상의 말을 들은 모두가 이같은 생각을 하였고 가장 먼저 자신의 생각을 표출한 이가 바로 봉선이었다.
“이 새끼가!”
퍼억.
임신했다는 자각이 없는지 주먹부터 날리고 보는 봉선이었다. 상은 그런 봉선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쓰러졌고 봉선은 쓰러진 상을 거침없이 쥐어 팼다.
“그만! 그만해라!”
“어떻게 그만하나! 이 새끼,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껄였다.”
“그래도 일단 멈춰.”
초강의 단호한 목소리에 봉선이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하지만 상을 때리는 행위는 곧장 멈추었다.
비록 피난 명령은 따르지 않았지만 봉선 역시 어느 정도 초강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 다시 말해라. 갑자기 유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추장님과 거인들의 싸움은 땅이 무너지고 하늘이 갈라지는 대전투였습니다. 대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며칠 동안 이어졌습니다.”
마치 역사책을 읽듯, 또박또박 말을 이어 나가는 상. 그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요란하고 거창했으며 또한 화려하였다.
그야말로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숨도 쉬지 않고 콸콸 쏟아 냈다. 당연하겠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봉선이나 초강의 표정은 미묘하기 그지없었다.
듣기만 해도 호영의 활약이 놀랍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유언’이라는 단어를 들먹였던 것일까?
그에 관련된 이야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두 거인을 기어코 맨주먹으로 쓰러뜨렸지만 추장께서도 크나큰 상처를 입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늘의 부름을 받으신 추장께서 마지막으로 유언을 남기셨는데, 영광스럽게도 제가 바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
“지금 그 유언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금 말을 쏟아 내기 시작하였는데,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긴 유언이었다. 죽기 직전에 남겼다는 유언이 이렇게나 길다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지만 아무도 상의 말을 끊어 내지 못하였다. 위대한 지도자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존경심이나 공경하는 수준을 넘어서 신성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유언이었기에 그 누구도 의심해서도, 부정해서도 아니 되었다.
“마지막으로…….”
드디어 유언의 끝이 보였다. 거의 10분이 넘도록 이어진 유언이 마침내 끝을 보이는 것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상의 말을 기다렸다.
“추장께서는 다음 추장의 자리를 초강 대장에게 넘기셨습니다. 이제부터 현리 부족의 추장은 초강 대장이십니다.”
마지막까지 좌중을 경악하게 만드는 호영의 유언이었다.
* * *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했다. 내가 처음 세웠던 계획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이 최선의 결과야.’
초강을 후계자로 임명하는 것. 분명 그가 세웠던 계획에서는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보다 좋은 수는 없었다.
어차피 대준이라는 아바타에겐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수백 단위의 부족이라면 어려움 없이 통치할 수 있겠지만 수천 단위의 부족을 통치하기에는 대준의 능력은 여러모로 부족하였다.
실제로 늙은이 하나를 어쩌지 못해서 부족 전체를 빼앗기지 않았던가?
물론 호영이 아바타로 사용함으로써 대준의 능력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을 수 있겠지만 솔직히 호영으로선 믿음이 가지 않았다. 유약하기 짝이 없는 그 성향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반면에 초강은 믿음이 갔다. 성격부터 능력까지, 추장이 되기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초강에게 추장의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대준을 ‘전설’로 만들었다는 점이 호영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이었다.
실제 역사에서 무수한 신화나 전설들이 존재하듯, 앞으로의 센추리 역사에서도 무수히 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신화와 전설 들은 권력자들의 정통성과 명분이 되어 줄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대준이라는 아바타로 만들어 낸 무수한 업적들도 전설이 되어 추후 강력한 명분이 되어 줄 것이었다.
지금은 고작해야 현리 부족이라는 작은 사회에서만 공유되는 전설이지만 무려 세 마리의 거인을 죽였다는 전설은 머지않아 한국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전설이 될 터.
대준의 후손들은 이같은 전설의 덕을 크게 볼 것이고 호영 역시 시작하자마자 강력한 이점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갑작스러운 권력 교체는 언제나 크나큰 혼란을 동반한다. 비록 준기를 통해 부족에 유언을 전함으로써 초강의 정통성을 모두에게 인정시켰지만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친위대장으로서 초강의 권력이 강력한 편이라고는 하나 현리에는 경비대도 있었고 치안대도 존재하였다.
경비대 소속의 봉선과 치안대 소속의 중한이 초강을 반대할 가능성이 있었다. 물론 현자라 불리는 이사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였고 말이다.
한마디로 초강의 권력은 지극히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통치에 관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음에도 준기와 원재를 통해 하루에 한 번씩 현리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 봉선 형수님에게 한 방 맞았습니다.
저녁 9시. 약속된 시간이 되자 호영의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준기의 전화였다. 아마 센추리의 소식을 전하기 위한 전화일 터.
호영이 전화를 받자, 준기가 인사도 생략한 채 본론부터 말했다.
‘또다시 봉선에게 한 대 맞았다.’
갑작스러운 준기의 말이었지만 호영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왜?”
-형님을 지키지 못했으니까요. 이미 며칠이나 지났는데 왜 때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맞을 만했네. 너는 일종의 호위 무사였으니까.”
-……이러깁니까? 형수님에게 진실을 밝힐까요?
준기가 정색하며 그렇게 말하자 호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형님께서는 정말 돌아오실 생각이 없는 것입니까? 많은 이들이 형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성의 경우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준기의 물음에 호영은 웃음기를 지운 채 대답하였다.
“말했잖아, 이것이 최선의 결과라고.”
-하지만…….
“됐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다른 건 없어? 중한이나 일족의 수장들은 사고 안 치고 있어?”
호영의 단호한 말에 준기는 어쩔 수 없이 본론만 이야기하였다.
-중한이야 욕심이 조금 크기는 해도 야망이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초강 대장의 추장 취임식 때 보니까 오히려 초강 대장을 지지하는 것 같던데요? 그리고 일족의 수장들은 현자님의 영향력 때문인지 별로 반대는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무난하다는 말이네?”
-그렇죠. 솔직히 형님의 유언을 들었는데 초강 대장을 반대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요? 뭐, 진짜 유언은 아니지만요.
“앞으로도 신경 써. 너는 병사들에 대한 영향력이 제법 강하잖아. 나름 일족의 수장이기도 하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후계 만드는 거 확실히 하고.”
“…….”
후계를 만들라는 호영의 말에 준기는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준기는 현재 센추리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얼마나 매료되었는지 현실 이상으로 센추리에 몰입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지나치게 몰입한 터라 ‘자식’을 낳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1회 차가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그 말은 자식과 함께할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센추리를 또 다른 현실로 생각하는 준기로선 지금 같은 상황에서의 ‘자식 생산’은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준기야, 다음 회 차에서도 나와 같이해야지.”
호영은 침묵하는 준기에게 한마디 하였다. 그러자 준기가 목소리를 살짝 높이며 반론하였다.
-저도 많이 낳았어요. 솔직히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3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준기라고 자식을 아예 생산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시어머니 잔소리보다 무서운 호영의 보챔 덕에 그도 꽤나 자식을 낳은 상태였다.
호영의 쓴소리에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겨우 세 명이잖아.”
하지만 열 명이 넘는 자식을 생산한 호영으로선 불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준기의 자식은 고작 세 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 현실에서도 여자 별로 못 사귀어 봤는데…….
“그러니 센추리에서 많이 해.”
-……알겠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준기는 ‘알겠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호영은 준기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대답은 퉁명스러웠지만 호영의 말을 충실히 따를 것이었다. 준기라는 사내는 그런 인물이었으니까.
준기와의 통화가 끝나자 이번에는 원재가 전화를 걸어왔다. 호영은 정확하게 시간을 지키는 원재의 모습을 보며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칼 같단 말이지.’
장교 출신이기 때문일까? 솔직히 장교 출신이라고 이런 성격일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건 원재의 성격은 호영에게 있어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자기 주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런 단점 따위야 호영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자기 주관이 없으면 어떤가? 호영의 명령에만 충실하게 따라 주면 될 일. 그의 지인 중에 이런 성격을 가진 이는 거의 없었으니 더욱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잘 쉬셨습니까, 팀장님.
“뭐, 평소와 다를 게 없지. 스케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역시 팀장님은 한결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팀장님이 좋습니다.
“갑자기 웬 아부야? 본론부터 말하지?”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조사한 유저들의 정보를 브리핑 하겠습니다.
준기와 마찬가지로 현리 소식에 대해 보고하는 원재였다. 하지만 보고 형식은 비슷했지만 내용은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원재는 AI가 아닌 유저에 대한 보고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팀장님의 자식이 후계를 잇지 못했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드러냈지만 큰 불만은 없어 보입니다. 어차피 그들은 정치에 큰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민이라는 유저의 경우 호인족의 노예에 이어 다른 수인족의 노예를 탐내고 있습니다.
현리 부족에 유저라고 해 봤자 호영과 원재, 준기를 제외하고 고작 세 명뿐이었다. 물론 유저로 짐작되는 이들은 제법 있었지만 그들은 존재감이랄 것이 없었다.
아무튼 그러한 이유로 원재가 보고한 이들은 원재 이후에 호영을 따르기로 결정한 두 명의 유저와 얼떨결에 합류한 민이라는 유저였다.
‘그 두 유저는 뭐, 원재처럼 나를 따른다고 볼 수는 없으니까 딱히 상관은 없겠고……. 아니, 그건 민도 마찬가지인가? 근데 민은 취향이 어떻기에 수인족을 탐낸다는 거야? 이미 호인족을 받았으면서.’
따로 문제를 일으키는 유저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 민이라는 유저의 취향에 절로 혀를 차는 호영이었다.
호인족을 얻었으면서 또다시 수인족을 탐내다니. 혹시 현실에서도 동물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인 것일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호영은 그 뒤로도 원재를 통해 현리 부족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