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사흘, 정확히는 이틀간의 전투로 호영은 거인의 약점을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였다. 거인의 약점은 간단했다.
변신하고 나면 체력이 빠르게 닳는 것. 즉, 장기전을 노린다면 거인을 죽이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영이 거인의 약점을 파악하는 동안, 현군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현군. 그는 머리가 좋은 거인이었다.
호영이 도주할 때 어느 방향으로 도주하는지, 어떤 방향을 의도적으로 피하는지 고작 이틀 사이에 모든 것을 파악하였다. 한마디로 거인은 호영이 가진 ‘현리’라는 약점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현군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들어주지 않으면 현리를 멸망시키겠다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현리에 닿기 전에 현군을 죽일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친위대는 부족으로 돌려보냈겠지? 부족의 이주도 시작했고?”
물론 협박당한 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현군은 모르겠지만 호영은 친위대와 연락할 방법이 있었다.
센추리가 아닌 현실에서 연락하는 방법이었다. 이미 준기에게 친위대 및 현리 부족의 피난을 명령한 상태였다.
사실상 오크와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기에 호영의 명령을 받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터. 준기도 마침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친위대가 부족에 도착하는 즉시 피난이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현리 부족의 덩치가 너무 커져서 과연 제시간 안에 피난할 수 있을지…….”
“그건 우리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문제야. 결국 광군이라는 놈만 없애면 되는 것이니까.”
지금 그들이 처한 위기의 해결 방법은 간단하다. 광군을 죽이는 것.
물론 현군이라는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다.
솔직히 말해서 현군이 배신이라도 한다면 호영으로서도 버텨 내기 힘들 터. 준기가 말하는 ‘제시간’이라는 것도 바로 이것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으로선 현군을 믿고 광군을 막아 내는 수밖에.
‘만약 최악의 경우가 발생한다고 해도 내 자식들과 1천 명 이상의 부족민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야.’
호영이 희생을 자처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의 아바타는 죽는다 해도 다음 회 차의 아바타는 살려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싸우겠습니다.”
그렇게 둘이 각오를 다지며 투지를 끌어 올릴 때, 북쪽 방향에서 쿵쿵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만 이만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취익, 왔다, 광군. 취익, 준비한다.”
“오크의 말 들었지?”
“예.”
“그럼 가자.”
현군이 먼저 몸을 움직였고, 그 뒤로 호영과 준기가 움직였다.
* * *
어마어마한 존재감. 이같은 존재감은 회귀하기 전에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끝판왕 같은 존재를 1회 차에서 만나고 있는 셈인가?’
호영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애써 억누르고 있기는 하지만 두려움은 숨길 수 없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호영이 이렇게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보면 광군이라는 존재의 위압감은 본연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평범한 유저라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그때 옆에 있던 오크가 호영에게 말을 걸었다.
“두렵나, 취익, 인간?”
“아니. 생각보다 할 만한데?”
호영이 오크가 아닌 거인을 보며 그렇게 말하자 거인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 거인의 말을 해석해 주는 것은 오크였다.
“나, 취익, 두렵다.”
“…….”
솔직한 그의 표현에 호영은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전투만 되면 긴장감 없는 모습을 보이던 준기조차 이번에는 조용했다.
이 녀석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광군! 실로 무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현리 부족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도망치고 싶었을 정도.
그러나 호영은 이를 악물었다.
‘회귀까지 했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지.’
호영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고는 현군과 함께 광군에게 달려갔다.
#1회 차의 끝
‘추장님이 없으면 현리 부족도 없습니다.’
초강은 북쪽 방향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호영이 거인을 죽이러 떠난 지도 벌써 일주일이 지난 상태였다.
다행히도 오크와의 전쟁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호영이 부재하는 동안 현리 부족을 이끌어야 하는 초강의 부담감은 작지 않았다.
당장만 해도 호영의 마지막 명령인, 현리 부족을 피난시키는 것이 크나큰 난관에 봉착하지 않았는가.
“봉선, 이것은 추장님의 명령이다.”
“난 기다릴 거다. 추장은 거인 따위에게 죽지 않는다. 그러니 추장을 대리하는 너나 강동으로 가라.”
“……나 역시 추장님이 죽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추장님이 명령을 내리셨고, 우리는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
“시끄럽다. 무슨 말을 해도 나는 이곳에서 추장을 기다릴 거다.”
“하아.”
초강은 한숨을 내쉬었다. 봉선의 고집은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자 주군인 호영조차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을 정도니까.
“저도 어머니의 곁을 지키겠습니다.”
“대성아…….”
“죄송합니다.”
대성의 당찬 모습을 평소라면 흐뭇한 미소로 지켜봤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호영의 명령에 따라 가장 우선적으로 피난시켜야 할 사람이 바로 대성이었다.
차남이지만 추장의 자식 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대성. 초강으로선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 내야 할 인물이었다.
그런데 대성은 초강의 이같은 절실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봉선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리 부족이 피난을 시작한 지도 벌써 나흘째. 호영의 소식이 아직 없었기에 언제 무시무시한 거인이 쳐들어올지 알 수 없었다.
‘어찌 저에게 이런 어려운 임무를 맡기신 것입니까, 추장님.’
차라리 상처럼 거인들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그가 비록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적지 않은 변화를 겪었다 해도 그는 여전히 전사에 가까운 존재였다.
당연히도 추장이 내린 임무를 이행하는 것보다 거인과 맞서 싸우는 게 몸도 마음도 편하였다.
추장을 대리하는 것? 그로선 결코 원치 않은 일이었다.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멍하니 북쪽 방향을 바라보던 초강에게 이사가 다가와 물었다.
“현자님…….”
“친위대장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허리를 피십시오. 현재 친위대장께서는 추장을 대리하고 계십니다.”
질책이라기보다는 응원에 가까운 이사의 말에 초강은 입술을 깨물며 한참을 고민하더니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저보다는 현자님께서 추장을 대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진실된 생각이 그러했다.
현리 부족의 현자라 불리는 이사.
그는 현리 부족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뛰어난 지도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호영을 대신하여 부족을 이끌 사람으로 이사보다 적합한 사람은 또 없으리라.
하지만 이사는 그런 초강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추장님께선 초강 대장을 후계자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친위대장이 추장을 대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강하시지 않습니까, 친위대장께서는?”
“현자께서는 잘 모르시나 본데, 상 백인대장이 저보다 강합니다. 암컷이긴 하나 봉선도 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고 말입니다.”
봉선 이야기를 꺼내니 그녀 역시 추장을 대리하기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호영의 아내였고 무엇보다 초강이 가진 모든 것을 그녀 역시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사는 이번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강하다고 한 것은 무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친위대장께서는 마음이 강하십니다.”
“마음이 강하다니…….”
“폭군에게 저항하던 결사대의 일원이셨고, 정복 전쟁에서 언제나 선봉에 서셨으며, 무엇보다 친위대장이라는 막강한 권력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오직 추장님만을 한결같이 충성하고 따랐으니 그 마음이 어찌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부족민들을 보십시오. 동요하는 이들이 있습니까? 추장님이 안 계시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피난인데도 동요하는 부족민이 보이지 않습니다. 부족민들이 친위대장님을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
이사의 그 말에 초강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확실히, 갑작스러운 피난인데도 현리 부족민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현리 지도층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도 있겠지만 든든하게 후방을 지키고 있는 초강의 존재가 크나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었다.
‘나는 고작 일개 전사에 불과하건만, 부족민들을 나를 믿어 주고 있다는 말인가?’
초강은 순간 전율과 격동에 휩싸였다. 오직 호영만을 충성한 채 묵묵히 걸어온 길이었다. 당연히 누군가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미 자신이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있었다니.
“실망시켰네요, 제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실수하신 것은 따로 없지 않습니까? 피난도 절반 이상이 완료되었고 나머지 절반도 어렵지 않게 진행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봉선이 피난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추장께서는 봉선과 자식들을 가장 먼저 피난시키라고 명령하셨는데.”
“흐음, 그 문제는 제가 따로 해결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자님.”
환한 미소를 짓는 초강. 그런 초강을 보며 이사 역시 밝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추장의 부재는 엄청난 위기라 할 수 있었지만 초강과 이사가 있는 이상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하기야 그러니 호영이 초강에게 추장의 자리를 대리하게 만든 것일 터.
그때였다. 무거운 몸으로 하염없이 북쪽 방향을 바라보던 봉선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서 달리기 시작하였다.
“추장! 추장!”
그녀의 외침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 대부분이 목책 때문에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높은 곳에 있었던 초강과 이사는 달랐다.
둘은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현리로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추장님이 돌아오신 것인가?’
초강도 봉선과 마찬가지로 반색한 얼굴로 달려가기 시작하였다. 봉선만큼이나 호영의 귀환을 기다리던 초강이었다. 호영으로 보이는 이의 등장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먼저 달려가던 봉선이 발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고 초강도 서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땀과 피, 먼지 따위로 뒤범벅이 된 사내. 워낙에 더럽혀진 얼굴이라 한 번에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저 사내가 추장, 호영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추, 추장은 어디에 있나?”
“…….”
“빨리 말해라! 추장은 어디에 있냐!”
흥분하여 사내의 멱살을 쥐고 흔드는 봉선을 보며 초강이 앞으로 나섰다.
“상, 살아 돌아왔구나.”
사내의 정체는 백인대장, 상이었다.
상은 그런 초강을 보며 무기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서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로 말했다.
“추장님의 유언, 지금 들으시겠습니까?”
“……유언?”
순간 초강은 상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유언이라는 단어를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단어이기 때문이다.
추장이 죽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