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훈련을 꾸준히 한 몸이라서 그런가? 가만히 있어도 활기가 넘치는 기분이야.”
그의 아바타는 친위대 소속의 병사였다. 그 때문인지 몇 년 전에 접속했을 때보다 능력치가 훨씬 상승해 있었다.
훈련의 강도가 엄청나니 능력치가 상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개인 정비 시간에만 로그인을 한다면 건우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건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은 채 ‘추장’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센추리에 처음 접속하면 뭘 하려고 했더라? 뭐, 어쨌든 이런 것은 결코 할 생각이 없었는데 말이야.’
피식. 건우는 조소를 지었다.
실로 고대하던 센추리를 오랜만에 하고 있으면서 탐문이나 조사 따위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니.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습기 그지없었지만 이 또한 센추리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는 현재 호인족에게 원한이라는 감정을 품고 있었고, 이 원한을 해결하는 과정이 그에게는 무척이나 자극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건우는 추장의 성향을 알아낼 필요성이 있었다. 호인족의 노예를 얻기 위해서는 추장의 허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자를 밝힌다고? 컥, 취향 참 독특하군.’
가장 먼저 알아낸 정보는 지나칠 정도의 여성 편력이었다. 그야말로 중동 왕가에서나 있을 법한 하렘을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공식적으로 밝혀진 아내의 숫자만 열 명이 넘었고, 경비대 대장이라는 ‘봉선’이라는 여전사처럼 따로 관계만 갖는 여성도 존재하였다.
그에 따라 자식의 숫자만 열네 명이라는데, 자식들의 나이가 전부 네 살 미만인 것을 보면 짧은 시간 동안 정말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일부일처제의 세상에서 살아왔을 것이니 하렘을 꿈꾸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건우 역시 그러한 판타지를 가지고 있기는 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곳의 여인들이 현대인의 눈으로 봤을 때 미인보다는 추녀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거친 피부에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얼굴들. 또한 향수나 비누가 없기에 하나같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하렘이라? 천국보다는 지옥에 가까울 것이라는 게 건우의 생각이었다. 차라리 인간보다는 수인족을 아내로 맞이하는 게 대부분의 취향에 가까우리라. 물론 이것은 순전히 건우만의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거기에다 거인까지 죽여?’
다음에 입수한 정보는 추장의 무력이었다. 사실 이에 관련된 정보는 그의 아바타가 남긴 기록에도 무수히 존재하였다.
그의 아바타는 추장을 거의 신처럼 추앙하고 있었다. 당연히 추장의 무력도 신봉하였는데, 부족 전체의 전력보다 추장 한 명의 전력이 더 강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건우는 처음엔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가 아는 센추리는 무척이나 현실적인 게임이었다.
레벨 업 같은 것도 없었고 스킬을 만들거나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당백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흘에 걸친 조사 끝에 건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과장이 일부 섞였다고 해도 추장이 터무니없이 강하다는 사실은 명백한 진실이었다.
“너무 차이가 큰 거 아니야? 누구는 처음부터 거인을 죽일 정도의 무력을 갖다니. 나는 유저인데도 평균 수준에 불과하건만!”
추장의 무력이 비현실적으로 강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건우는 처음으로 센추리를 향해 불만을 가졌다. 같은 유저인데도 이렇게나 차이가 크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나 리얼리티를 가장 중요시여기는 건우였기에 실망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유저들과 비교했을 때 건우의 상황은 제법 괜찮은 편에 속하였다. 노예의 신분을 가진 것도 아니고 신체도 일단 멀쩡하니까.
하지만 사람이란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을 더 크게 보는 법이었다. 건우는 속으로 강한 불만을 품으며 센추리 홈페이지에다 이 일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건우를 향해 의문의 인물이 다가와서는 말했다.
“민 십장, 나를 따라와라.”
“누구세요? 누군데 따라오라 마랍니까?”
“추장님을 직속으로 따르는 우원재다. 그리고 지금은 추장님의 명령을 받고 있는 중이지. 그러니까, 민 십장! 나를 따라와라. 추장님께서 찾으신다.”
우원재?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아바타의 기록에서도 남겨져 있지 않은 이름. 하지만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눈빛부터가 심상치 않았으니까.
“추장이 나를 왜 찾아요?”
“감히 추장님께! 끌려가고 싶은 것이냐?”
건우는 사내의 무서운 얼굴을 보며 속으로 ‘아차!’ 하였다. 현리 부족에 경어가 정착한 지도 벌써 1년이 된 상황.
그중에서 친위대의 경우는 2년 넘게 경어를 사용해 왔다. 한마디로 그는 추장에게 엄청난 불경을 저지른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당황한 건우는 곧장 병사의 뒤를 따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추장의 수련장으로 안내되었다.
“지금쯤이면 백인대장과 대련하고 계실 것이니 끝날 때까지 조용하게 기다려라.”
“…….”
“예를 갖추는 것도 잊지 말고.”
추장으로 보이는 이와 또 다른 이의 윤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때, 병사가 건우에게 단단히 경고하였다. 추장을 대할 때, ‘예’를 갖추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건우는 당연히도 추장을 대하는 예를 알지 못하였다.
그나마 군대를 갔다 왔기에 대충 경례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흘 동안 아바타를 지켜본 결과, 경례 방식부터가 크게 달랐다.
한마디로 건우는 현리 부족의 예법에 문외한이라는 것이다.
의문의 사내, 우원재는 그런 건우를 미심쩍은 눈으로 노려보다가 건우의 등을 밀었다. 그렇게 건우는 얼떨결에 부족의 금지라 불리는 추장의 수련장에 오게 되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건우는 혼란함을 느꼈다. 식은땀도 흘렸는데, 마치 호인족을 처음 봤을 때의 공포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추장이 자신과 같은 ‘유저’라는 생각에 두려움을 털어 냈다. 아무리 부족의 최고 권력자라지만 상대가 유저라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주춤주춤 앞으로 걸어가니 두 사람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콰아앙! 쾅!
‘뭐야. 센추리가 언제부터 무협 게임이 된 것이지?’
병사의 말처럼 추장은 ‘대련’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대련이라는 것이 건우의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이었다.
두 사람의 대결은 마치 한 편의 무협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로 공방이 오갔고 심지어 공중을 날기도 하였다.
가끔씩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까지 들려왔는데, 그야말로 가공스러운 힘을 내뱉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이것이 그가 아는 센추리가 맞는 것일까? 대결을 구경하던 건우는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센추리에 접속한 지가 오랜만이라 해도 센추리 공식 사이트는 꾸준히 들어갔던 그다. 즉, 이론 하나만큼은 빠삭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았던 어떤 게시물에도 저런 ‘무협’ 같은 이야기는 없었다. 뭐 대부분이 초보자의 섬에 대한 이야기여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보이는 광경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스킬을 가져야 저런 전투를 할 수 있는 거지? B급 이상의 스킬을 가지기라도 했나? 헐! 백인대장이라는 자는 그렇다 쳐도 추장은 나와 같은 유저일 텐데 이게 가능한 일이야? 밸런스가 너무 안 맞잖아!’
건우가 그같은 생각을 하던 중 두 사내의 대결이 끝났다. 유저로 추측되는 추장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건우는 궁금증을 뒤로 한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 * *
어느덧 센추리 1회 차가 시작한 지도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정확히는 10개월에 가까웠는데, 센추리 시간을 기준으로 1회 차가 끝나기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내가 목표했던 것은 모두 이루었다.’
호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회귀하고서 오직 센추리에만 몰두하였다. 최근 들어 가족과의 시간을 늘리고 있지만 그래 봤자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나머지 시간에는 오로지 센추리에만 전념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호영이 센추리에 몰입한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원래라면 한반도의 그 어떤 유저도 ‘세력’이라 부를 만한 힘을 가진 집단을 형성하지 못하였을 1회 차에서 명실상부 도시라 부를 만한 거대 부락을 일구어 낸 것이었다.
그것도 2회 차 끝날 무렵에서나 볼 법한, 제법 규모 있는 도시였다.
물론 규모만 비대해졌을 뿐, 철기를 사용하거나 가축을 키우는 둥 문명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원시적이나마 방직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일부 여인들이 관옥으로 된 장신구로 몸치레하기 시작하였으며 보다 발전된 토기가 부족 전체에서 사용되었다.
‘뭐, 문명 한계만 존재하지 않았다면 더욱 많은 것을 개발하며 부족을 발전시켰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언제든지 현대로 돌아갈 수 있는 호영으로선 마음만 먹는다면 문명을 크게 진보시킬 수도 있었다. 인터넷을 보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호영이 아니더라도 현재 그의 수하로 있는 유저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기술을 개발시킬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호영은 필요 이상으로 문명을 발전시키지 않았다. 미래를 알고 있는 호영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는데, 센추리에는 보이지 않는 절대자가 존재하였다.
운영자라느니, 센추리 상의 신이라느니 여러 이야기가 많지만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시대의 문명을 지나칠 정도로 넘어서는 문물에는 강력한 제재가 따른다는 점이었다.
물론 제재라고 해서 시스템적으로 처벌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센추리는 자유도와 현실성이 넘치는 게임. 그 누구도 유저들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명 한계를 뛰어넘는 문물은 언제나 기이할 정도의 ‘우연’으로 다음 회 차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예를 들면 천재지변이 일어나 새로운 문물이 모두 사라진다거나 AI들이 느닷없이 새로운 문물을 배격한다거나. 이러한 이유들로 100년간의 공백기 동안 새로운 문물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굳이 문명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별다른 이득은 없이 괜한 변수들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가 만든 것만으로도 문명의 한계를 넘어섰을 수도 있겠지만 그거까지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호영이 만든 것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이사를 받은 이후에 새로 만들어 낸 문물들은 대부분 이사가 주도하였다.
유저가 아닌 AI가 주도하였기에 ‘절대자’의 제재는 미약한 수준에 그칠 터. 호영도 나름 머리를 쓴 것이었다.
아무튼 호영으로선 부족을 경영하는 데 있어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었다. 지금 시대에서 갖출 수 있는 최상의 문물을 도입하였고, 무엇보다 군사력을 크게 발전시켰다.
초강이 대장으로 있는 친위대와 봉선이 대장으로 있는 경비대 그리고 수호가 대장으로 있는 치안대까지.
무려 400이 넘는 병사들이 맹훈련을 거듭하며 부족을 수호하였다. 이제 센추리에 존재하는 그 어떤 세력도 현리를 무시할 수 없으리라.
‘물론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과는 유저들을 얻은 것이지만.’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며 고개를 돌려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