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43화 (43/345)

# 43

“그렇다면 이종족은 모두 노예가 될 것인데? 저들이 인간에게 순종하지는 않을 테니까.”

“시작이 노예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평한 길이 아니겠습니까?”

호영은 이사의 말에 많은 것을 느꼈다.

‘하나같이 맞는 말이야. 노예로 삼아서라도 일단 같은 세력에 속한다는 게 중요해. 어차피 나는 언제가 되었건 노예제를 폐지할 것이니까.’

수인족이 현리 부족의 일원이 된다면 나중에 얻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비록 도태된다지만 수인들의 육체 능력은 분명 대단한 수준이니까.

그리고 사실 친위대 병사들이 견인족을 상대로 큰 피해를 보지 않았던 것은 1회 차의 인간이 일종의 버프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호영도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1회 차 인간족의 순수 육체 능력은 평균적으로 다른 회 차보다 훨씬 강한 편에 속하였다. 스텟으로 비교하자면 평균적으로 20% 이상 차이 나지 않을까.

진법을 익힌 것만으로 견인족을 쉽게 상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상승된 육체 능력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너의 말대로 하겠다.”

이사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자 그는 거리낌 없이 이사의 의견을 수용하였다. 비록 그가 독단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옳은 의견까지 부정할 정도로 아둔하지는 않았다.

“친위대여! 견인족을 노예로 잡아라! 반항하는 자는 죽여도 좋다!”

“충!”

결정을 내렸으면 그에 맞는 행동을 착수한다. 추진력이 남다른 그였기에 명령을 내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친위대는 예정대로 견인족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인간 부족을 공격했을 때처럼 ‘항복’을 권유하며 살상을 최대한 자제하였다.

그러자 전사 대부분을 잃은 견인족은 저항 의지를 꺾고 투항을 선택하였다.

그 뒤에 친위대가 한 일은 한 가지였다.

견인족에게 노예로 부림을 받던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

그렇게 호영은 견인족에게 부림 받던 쉰 명의 노예를 그대로 부족민으로 받아들였다. 쉰 명의 견인족 노예를 얻은 것은 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그의 목표는 호인족. 당연하겠지만 호인족의 부락에 도착할 때까지 무수한 노예와 부족민들을 얻어 낼 생각이었다.

* * *

‘호영 형님이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센추리에서 ‘상’이라는 이름의 아바타를 사용하고 있는 준기는 이를 악물었다. 노예로서의 삶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맞는 것은 일상이었고 때로는 능욕까지 당해야 했다.

다른 유저라면 진즉에 포기했을 상황.

그러나 준기는 버티고 버텼다.

언젠가 올 희망을 애타게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에게 희망이 찾아오고 있었다.

송호영! 그자가 바로 준기의 희망이었다.

희망은 조금씩 다가와 바로 목전까지 다다랐다. 송호영이 그를 구해 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센추리를 하면서 그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고된 일상이나 호인족의 능욕이 아니었다. 바로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변절자들이었다.

동족을 배반하고 호인족의 앞잡이가 된 변절자들. 준기는 그들을 보며 절망감을 느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변절자들은 그 간신히 보이기 시작한 희망을 산산이 부서뜨렸다.

바로 그를 밀고한 것이었다. 이제 준기는 갇혀 있는 채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송호영이 구해 주기 전에 자신은 호인들의 먹이가 되고 마리라.

그때 갑자기 부족 전체가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귀틀집에 갇혀 있는 처지였기에 그로서는 청각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소리만 듣고 판단하건데 아무래도 무언가 심상치가 않았다.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의문의 목소리들. 최소 백 명은 되어 보이는 사내들의 목소리는 확실히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형님이 오신 것이야.”

준기는 순간 그렇게 확신하였다.

뭔가 대단한 추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동안 톡으로 연락을 나눈 결과, 호영이 근처까지 당도했다고 추측하였을 뿐.

하지만 그 정도의 추측만으로 충분하였다. 어차피 그에게는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이 없었으니.

준기는 문을 향해 돌진하였다. 두 팔이 묶여 있었지만 다리는 멀쩡하였기에 문을 향해 달려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였다.

쾅! 쾅!

두 번을 연이어 때리니 문짝이 떨어져 나가며 귀틀집을 나갈 수 있었다. 그때 준기의 시야로 창을 든 수많은 인간들이 보였다.

하나같이 늠름함을 넘어 위압적인 외견을 가진 사내들이었기에 준기도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멈칫하는 것도 잠시, 준기는 큰 목소리로 호영을 부르짖었다.

“형님! 호영이 형님!”

애타기 그지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는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것 같았다.

* * *

역시 맹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답게 호인족의 전투력은 상당했다. 견인족의 날렵함과 묘인족의 은밀함을 모두 가졌고 어마어마한 근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봉선의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하지만 않았다면 친위대의 피해는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호인족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하였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건 스무 명의 사상자를 낸 끝에 호인족 전사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다.

스무 명의 사상자.

결코 적은 피해는 아니었다. 하지만 예순 마리 호인족을 상대로 스무 명의 피해는 무척이나 양호한 편이었다. 호인족은 수인족 중에 가장 강력한 편에 속하기 때문이다.

호영은 만족한 얼굴로 전투를 마무리 짓고는 곧장 호인족의 본거지로 향하였다.

친위대는 이제 모르는 길을 찾는 것도 익숙해졌는지 몇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호인족의 본거지를 찾아내었다.

‘날이 갈수록 발전하는군. 역시 1회 차라서 그런가. 이들의 후손들도 계속 그 강함을 유지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견인족의 부족을 복속시켰을 때처럼 호인족 역시 전사들이 대부분 몰살된 상태였다. 당연히도 부락에서의 저항은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차이점이 있다면 호인족은 암컷이나 수컷이나 가릴 것 없이 용맹하다는 것?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저항에 나서는 상황이라 호인족 노예는 얼마 얻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다. 많아 봐야 열 마리나 얻을까?

물론 호인족 노예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미 견인족과 묘인족의 노예를 다수 포획한 상황. 지금의 그는 인간 노예, 그중에 ‘홍준기’를 구해 내는 게 주된 목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홍준기로 여겨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20대 청년으로 보이는 인간이 별로 없었다.

‘통화할 때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비장하게 느껴졌던데, 설마?’

호영은 불안한 생각을 하였다. 준기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네가 죽으면 여기까지 온 의미가 없어진다!’

물론 수인족을 노예로 받아들임으로써 앞으로 세력을 키울 방도가 하나 더 늘어나게 되었지만 그조차 준기의 가치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스킬을 창조하는 수준의 재능을 가진 준기는 호영에게 있어 무척이나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유저 출신의 수하가 꼭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고 말이다.

“형님! 호영이 형님!”

그때였다. 인상을 찡그리던 호영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센추리에서 ‘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홍준기! 그는 역시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호영은 겉으로는 무심한 얼굴로 소리가 들려온 장소로 향하였다.

장소에 도착하니 현실의 홍준기와는 전혀 다른 외모의 사내가 추레한 몰골로 엎어져 있었다. 등 뒤로 손이 묶여 있었는데, 어디서 탈출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형님이십니까?”

“쉿.”

계속 현실의 관계를 거론하려는 준기를 보며 호영은 엄격한 표정을 하였다. 준기도 눈치가 없지는 않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런 꼴을 하고 있지?”

이미 말을 놓기로 약속했기에 거리낌 없이 반말하였다. 물론 반말하면서도 어색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현실의 외모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준기는 비쩍 마른 체구였는데 센추리에서의 준기는 제법 건실한 편이었다. 그래도 외모가 호감형인 것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변절자가 밀고하였습니다. 형님이 아니었다면 당장 오늘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준기는 호영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였다. 감격한 그의 얼굴은 정말 생명의 은인을 바라보는 얼굴 같았다.

‘다행이군. 혹시라도 죽었다면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의 대답에 호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라도 늦어졌다면 큰일 날 뻔하였다.

“그런데 저분들은 모두 형님을 따르는 전사들입니까?”

“여기서는 추장이라고 부르도록. 그리고 내 전사들이 맞다. 얼마 전부터는 병사들이라고 부르는 중이지.”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렇게 많은 전사, 아니 병사들이라니. 통화 때 들었던 것보다 훨씬 큰 부족인 것 같습니다.”

“조금 큰 편이지.”

현리 부족은 결코 ‘조금 크다.’라고 부를 수준이 아니었으나 호영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작다.’라고 하는 게 맞았다. 8회 차 기준으로 왕국이나 영지는커녕 일개 마을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준기는 그 이후로도 현리 부족에 관해 질문을 하였다.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때 병사들이 전장 정리를 끝마치고 호영에게 다가왔다. 호영은 준기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준기의 얼굴에는 감탄과 흠모의 기색이 역력하였다.

“귀틀집을 찾아보면 두 팔이 결박된 채 감금된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호인족에게 저항하려다가 배신자들에게 붙잡힌 이들이니 신속히 풀어 주고 부족민으로 대우하도록 하라.”

“충!”

친위대는 어느 때처럼 충직한 모습으로 호영의 명을 받들었다. 그들은 거침없이 귀틀집을 뒤져 갇혀 있던 열네 명의 장정들을 구출해 냈다.

“제가 먼저 말했어야 할 일인데, 추장님을 보고 너무 안심했나 봅니다.”

“그런 걸로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저들을 구한 것은 나를 이곳으로 부른 너의 공이니까.”

“추장님께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센추리에서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추장으로 부르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솔직히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같은 유저라는 생각에 공경한 태도를 보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인데 말이다.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인가? 하기야 튜토리얼을 깼다는 것부터가 이미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뭐, 그래도 호영에게 순종적이고 무재까지 갖추고 있으니 나쁘게 볼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데, 추장님?”

호영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준기가 문뜩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왜? 또 물어볼 거 있어?”

“저희 부족민들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정확히 어떤 것을 묻는 거지?”

준기는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하였다.

“이 부족에는 변절자들이 있습니다.”

“근데?”

“변절자들을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노예로 만들어 줄까?”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단호한 대답. 평소의 준기를 알고 있는 호영으로선 무척이나 의외라고 느껴질 정도로 단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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