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결국 준기가 이같은 말을 내뱉는 상황에서도 지영은 침묵을 지킬 따름이었다.
호영은 준기의 대답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홍준기라는 사내가 자신을 따른다는 게 너무도 반가웠던 것이다.
‘드디어 유저 출신의 수하가 생겼다. 이로서 행동반경을 더욱 넓힐 수 있어!’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준기에게 말하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 하도록 하죠. 저는 지금 곧장 센추리에 들어가 전사들과 함께 동쪽으로 출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천천히 하셔도 되는데.”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뒤로 미루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출정 준비는 다 끝마친 상황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기에게 말했던 것처럼 곧장 집으로 가 센추리를 하려는 것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는 준기에게 고개를 숙이고 퉁명스러운 기색의 지영에게도 눈인사를 한 뒤 카페를 나온 호영.
그때 뒤에서 준기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형이라 불러도 될까요?”
“그렇게 부르는 것이 편하시다면 형이라 부르세요.”
준기가 친근하게 부른다면 호영으로서도 나쁠 게 없었다. 그러자 준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호영이 형, 잘 가세요! 그리고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형이라……. 왠지 그 녀석들이 생각나는군.’
회귀하기 전에도 센추리 유저 중에 그를 따르는 동생이 몇 있었다. 군대 후임도 한 명 있었고 나머지는 센추리에서 시작된 인연이었는데, 그들의 조력이 있었기에 호영은 잠깐이나마 센추리의 귀족이 될 수 있었다.
호영은 되도록이면 이번 삶에도 그들과 인연을 맺을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들의 나이나 환경 때문에 인연을 맺기가 쉽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 엄마. 왜 전화했어?”
잠시 회귀 전의 인연들을 떠올리며 귀가하던 중 누군가의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으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밥은 먹었고?
“먹었지. 잠시 외출하고 집으로 가는 중이야.”
-그래. 엄마 집에도 자주 와. 네가 좋아하는 고기반찬 해 줄게.
“알았어. 나흘 뒤에 갈게.”
부족이 안정된 뒤로 가족과의 만남도 잦아졌다. 물론 그래 봤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는 것이지만 작년이나 올해 초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아마 왕국이 건설되고 상황이 보다 여유로워지면 이틀에 한 번씩은 볼 수 있게 될 것이었다.
호영은 그날을 기약하며 어머니와의 대화를 끝마쳤다.
‘조금만 기다려요, 이번 삶에는 힘든 일 하게 만들지 않을 테니.’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그의 어머니. 회귀하기 전에는 호영이 경제적으로 힘들게 되자 식당 일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병원 신세를 지다가 돌아가셨다.
호영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 때문에 어머니를 잃었다는 자책감에 빠졌던 것이다.
* * *
“추장, 일어났나?”
“흠흠, 일어났다.”
대준의 몸으로 눈을 뜨자마자 들려오는 여인의 목소리에 호영은 헛기침을 하며 대꾸하였다.
봉선. 여 일족의 수장이자 이제는 친위대 십장의 지위를 가진 그녀가 호영의 폼에 안겨 있었다. 호영도, 그녀도 나신인 채였다.
‘제법 예쁘단 말이지.’
호영은 자신의 품에 안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문신을 지우고 난 그녀의 맨 얼굴은 호영이 보기에도 매력적이었다.
건강미가 돋보인다고 해야 할까?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호영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녀 역시 호영을 사랑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둘이 잠자리를 함께한 것은 연인이어서가 아닌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 목적이란 다름 아닌, ‘강한 자식’을 낳는 것.
여 부족의 여전사들은 강한 수컷과 교미해야 강한 자식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봉선 역시 마찬가지의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실제로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특히 봉선 정도의 무력을 가진 여인과 대준 정도의 무력을 가진 남성이 애를 낳는다면 특출 난 아이가 태어날 가능성은 무척이나 높을 것이었다.
‘사사가 낳은 아이도 있지만 보험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지.’
호영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리따운 미녀가 그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호영으로선 하루 일과가 더 중요하였다. 특히 지금처럼 출정 준비가 임박했을 때는 더욱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호영이 귀틀집에서 나가기 직전, 누워 있던 봉선이 나른한 목소리로 호영을 불렀다.
“흐응, 어디 가나? 추장.”
“수련하러 간다.”
“일어나자마자 수련을 가나? 어제도 수련했지 않나.”
“어제도 하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해야 하는 법이다.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그다음 날은 더 많이 해야 할 것이니.”
물론 휴식도 훈련의 일환이라고도 말하지만 호영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한 번 멈추면 다시 시작할 때 두 배는 힘이 드는 법이었다.
매일같이 단련해야 겨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그렇기에 호영은 수련의 양을 줄이더라도 결코 수련을 빼먹지는 않았다.
“추장이 강한 것은 역시 수련 때문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지. 이 몸은 태어날 때부터 강했으니까.”
자랑 같지만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호영의 입장에선 그저 사실을 말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봉선의 눈빛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도 궁금한 것일까? 그녀의 눈빛을 보면 마치 호영의 무력을 탐내고 있는 것 같았다.
“수련, 나도 같이하면 안 되나?”
“안 된다.”
단호한 거절. 그러나 봉선은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욕망 어린 표정으로 호영을 바라볼 뿐.
호영은 그런 봉선을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 한결 같은 여인이었다. 강한 남자를 탐하거나 자신의 무력을 탐내거나.
뭐, 그렇게 따지면 호영도 한결같지만 말이다.
호영이 향한 곳은 추장 전용의 수련장이었다.
목책 바깥의 조그만 공터.
그저 씨를 심지 않은 훤한 공터일 뿐이지만 호영은 자신의 수련장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시작해 볼까?”
수련장에 도착한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서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장 먼저 심법을 수련하기 위함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에 열중한 호영. 출정에 임박한 지금이라고 수련을 빠뜨릴 수는 없었다.
어느새 그의 마력은 50을 넘긴 상태였다. 비록 다른 스텟에 비하면 올리기 쉽다고는 하나 50은 결코 작은 양이 아니었다.
이제 8회 차의 기준으로도 호영은 어엿한 무인이 된 것이다. 물론 그곳의 기준으로 따지면 삼류 무인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우웅.
심법 수련을 끝낸 후 마나를 다루는 수련을 하던 호영은 마침내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력이 50을 넘겼기 때문인지 확실히 마나의 수발이 한결 수월해졌다. 아직 마나 관련 스킬의 랭크가 낮아 전성기 때보다는 못했지만 조금만 더 수련을 한다면 B랭크의 핵심인 ‘검기’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수준이 될 것이었다.
안 그래도 사기적인 육체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든데 검기까지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거인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리라.
부웅! 부우웅!
자리에서 일어난 호영은 이번에는 창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난해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그의 창술, 대가창법은 각고의 노력 끝에 조금씩 그만의 것으로 체화되는 중이었다.
A랭크라고 보기엔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적어도 B+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 되어 가고 있었다.
8회 차 때는 주 무기 스킬의 랭크가 B+만 되어도 ‘초일류’ 검사라고 불렀으니 1회 차인 지금에서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경지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호영이 지금 이대로만 성장한다면 꿈에도 그리던 A랭크, 아니 그 이상의 S랭크까지 도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 보법에 관련된 스킬이 없다는 것이다.’
경공 또는 보법이라 불리는 스킬들. 호영에게는 스텝 관련 스킬이 부재하였다. 그리고 스텝 관련 스킬이 없다는 것은 동등한 실력을 가진 상대와의 결전에서 엄청난 페널티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동등한 상대와의 결전 이외에도 추격전에 있어서 손해가 있을 것이며 행군이나 기타 일상생활에서도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어떻게든 보법 관련 스킬을 얻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1회 차에서 스킬을 구할 방도가 없다는 것. 물론 초보자의 섬이 있었지만 그곳에 지금 나돌고 있는 스킬들은 화려하기만 하지 실속은 없는 삼류 스킬들이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자를 구해야 한다. 여러 스킬을 만들 정도로 무에 대한 재능이 천재적인 자이니 그자만 구한다면 보법 스킬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수 있어!’
홍준기! 호영이 굳이 지금 같은 시점에 그를 구하려는 것도 어쩌면 스킬에 대한 열망 때문일지도 몰랐다.
유저 출신의 수하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보법에 대한 열망이 더 강했으니 말이다.
“무슨 일이지?”
잠시 창을 내려놓은 채 보법에 대한 생각을 하던 호영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천재적인 지략가이자 행정가이기도 한 사내. 그는 바로 이사였다.
“보고드리기 위해 추장님을 찾았습니다.”
“출정 보고인가?”
“그렇습니다. 초강 대장과 이백 명의 병사 모두 출정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대장’과 ‘병사’ 어떻게 보면 지금의 시대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단어들이었다.
하지만 이사는 괜히 현자가 아니었다.
그는 특별한 전사를 구별하기 위해 병사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병사들의 구심점을 위해 대장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참고로 친위대 내부에 ‘경비대’와 ‘치안대’라는 조직을 신설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따라 부족에 잔존하는 백 명의 친위대원을 각각 경비대와 치안대라는 이름으로 부족의 수비 또는 치안을 유지하게 하였다.
“수씨 일족은? 배는 다 준비되었느냐?”
“예. 친위대의 출정을 담당할 배와 강 너머에서 복속시킬 부족민들이 탑승할 배, 모두 준비되어 있습니다.”
“빠르구나.”
“추장님의 명령에 충실했을 따름입니다.”
그 충성스러운 대답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현리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던 이사였다. 현리는 그가 살아온 환경과 너무 달랐고 현리를 지배하는 호영이라는 존재도 그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현리에 노예제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그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그 역시 한때는 노예였던 자. 노예들을 해방시켜야 할지, 아니면 침묵해야 할지 한동안 갈팡질팡하였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호영에게 충성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사가 있으니 내가 없더라도 문제 될 게 없겠어.’
4년, 아니 이제는 3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간. 호영은 부족이 성장할수록 자신이 없는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사, 그라면 대준을 잘 보필하여 부족의 번성을 이끌 것이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가자. 병사들한테로.”
“예!”
다시 목책 안으로 들어가니 부족 전체가 떠들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