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전사의 숫자가 수백이나 된다고? 내 예상을 완전히 초월하는 숫자로군.’
목책의 크기를 보고서 부족의 규모가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예측하였지만 무기를 든 장정이 수백 명이나 등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리 부족만한 세력을 갖춘 부족이 이처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잠시 놀라기만 했을 뿐, 당황하지는 않았다. 일단 목책에서 나오는 전사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 무력에 대한 자신감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누구십니까?”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왠지 모르게 고상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사내가 앞으로 나오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호영은 사내의 외침에 의문스러운 얼굴을 하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에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이것이었다.
‘경어를 쓰다니. 1회 차에 경어를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말이야. 문화적으로도 발달한 부족이라는 것인가?’
하나 그같은 의문도 잠시였다. 호영 역시 앞으로 나와 사내의 물음에 대답하였다.
“내가 바로 이들의 추장이다. 너는 누구냐?”
“……저는 현자입니다.”
“현자?”
뜬금없는 그 말에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빛냈다. 왠지 모르게 탐이 나는 인재로 비쳤기 때문이다.
“아무튼 네가 이곳을 대표한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하면 아까 전에 우리를 공격했던 전사들과는 무슨 관계냐?”
“우리는 그들의 노예였습니다.”
“지금은?”
“거사를 일으켜 그들을 모두 응징하였습니다.”
호영은 그 말에 탄성을 내질렀다. 내부 분열이 일어났기에 그저 전사들 간의 권력 다툼일 줄 알았는데, 설마 계급투쟁이었을 줄이야.
“하지만 어찌 되었건 우리 부족을 너희가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
“……우리는 일개 노예였습니다. 추장님을 공격한 전사들은 우리와 무관합니다.”
“그건 너희들의 이야기일 뿐이야.”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
“선택해. 싸울 것인지, 항복할 것인지.”
사내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반란을 일으켜 지배자를 몰아냈더니 또 다른 지배자가 찾아온 셈이었다.
그로서는 허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숫자도 저희가 많고, 사기도 우리가 높습니다. 그런데도 싸우자는 것입니까?”
사내의 그 말에 친위대 전사들이 배를 부여잡고 대소를 지었다.
친위대 전사들이 보기에 눈앞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 비쩍 마른 몰골도 몰골이지만 무기 하나 들지 못한 이가 태반이었기 때문이다.
호영도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말했을 텐데, 선택은 너희가 하라고.”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제 막 노예에서 벗어났습니다. 거사까지 일으켜 가며 말입니다. 그런데 다시 노예가 되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노예가 되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투항을 선택하면 나의 부족민으로 받아 주겠다.”
“……!”
그 말에 사내는 눈을 번쩍 떴다. 다른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까지의 긴장감이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전사들.
노예였다는 말이 사실인지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하였다.
‘항복을 받는 건 어렵지 않겠군. 다만 그 이후가 문제겠어.’
호영이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하는 동안 소란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하였다. 스스로 현자라고 부르던 사내가 소란을 진정시켰던 것이다.
어느덧 침묵이 찾아오자 사내가 말문을 열었다.
“정말 부족민으로 받아 주시는 겁니까?”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데……?”
사내는 뒤를 가리키며 말끝을 흐렸다. 이백에 가까운 숫자. 당연히 부족민으로 받아들이기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호영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영은 발을 한 번 굴렀다.
콰아아앙!
고작 발 한 번 굴렀다고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움푹 파였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너희를 노예로 삼았던 전사들도 나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지?”
“……!”
경악하는 얼굴들. 그들의 얼굴에서 전의가 사라지고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스스로 현자라 부르던 사내의 얼굴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나를 따라라. 동등한 부족민으로서 대우해 줄 것이다.”
그 말에 한 명도 빠짐없이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현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 * *
‘생각 이상으로 똑똑한 자야.’
현자라 불리는 사내가 어떻게 거사를 일으켰는지를 알게 되자 호영은 눈가를 좁혔다. 단순하게 똑똑하다고만 평가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시기적절하게 반란을 일으킨 것부터가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해족 전사들의 패전을 어떻게 예상한 것일까?
만약 예상했다면 그 판단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마땅한 정보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해족 전사들의 패전을 예상하다니. 그 정도면 판단력이 아니라 거의 예언이라고 봐도 좋은 수준이 아닐까.
예상하지 않고서 우연히 이날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놀라운 일이었다. 수십 년 동안 노예로서 살아오다가 하필 오늘 반란을 일으키다니. 행운이 보통 행운이 아니었다.
지금 호영의 앞에서 부복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놀라운 판단력이라고 볼 수 있었다. 만약 처음 마주쳤을 때 숫자의 우위를 믿고 공격적으로 행동하였다면 호영에게 몰살당하였을 것이니 말이다.
‘안 그래도 책사라 불릴 만한 인재가 없었는데 한번 옆에 둬 봐야겠군. 물론 아직 신뢰하기는 이르지만.’
여러모로 비범하게 느껴지는 인재. 그렇기에 호영은 일종에 군사로 키울 생각을 하였다. 수호 말고는 머리 쓰는 인재가 없으니 그같은 생각이 절실하게 들 수밖에 없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은 아직까지도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들에게 일어서라 명령하였다. 그러자 현자가 ‘감사드립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가장 먼저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니 다른 사내들도 그를 따라서 일어섰다. 수장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소인, 이사라 합니다.”
“이사라…….”
호영은 사내의 이름보다 사내의 성에 주목하였다.
이 씨 성. 호영도 익히 알고 있는 성씨였다. 그리고 만약 호영이 아는 그 이씨 일족이 맞다면 엄청난 쾌거라고 볼 수 있었다.
‘문관으로 유명한 이씨 일족? 만약 그 이씨 일족이 맞다면 대박인데. 8회 차까지 승승장구하여 결국 신라 왕국에다 왕후까지 배출하였잖아.’
부산에서 처음 시작하여 경상도, 강원도 지역을 평정하고 8회 차에 서울까지 진입하였던 신라 왕국은 한반도에서 가장 세력이 큰 나라였다.
당연하겠지만 그렇게 세력이 큰 나라에 왕후를 배출하였다는 것은 이씨 일족이 범상치 않은 일족임을 의미하였다.
애초에 신라 왕국의 일원이 되기 이전부터 이씨 일족은 경기도의 군웅할거에서 상당한 활약을 보여 주었었다. 책사나 참모로서 대단한 활약을 했던 것이다.
‘여 왕국을 세웠던 봉씨 일족과 한국에서 손꼽히는 문사 가문의 이씨 일족이라…….’
아직 두 일족이 그가 아는 일족이 맞는지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능성이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두 일족 모두 서울을 근거로 한 것은 사실이고 지금 그들이 있는 곳도 서울에 해당하는 지역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호영은 흐뭇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봉씨 일족이야 그가 센추리를 시작했을 때 이미 몰락한 이후였지만, 이씨 가문의 경우는 닿을 수 없이 높은 곳에 있었던 가문이었다.
전장에서나 간혹 볼 정도로 지고한 위치에 있었던 가문인 것이다. 그런 가문의 시조로 보이는 이씨 일족이 호영의 세력에 합류했으니 기분이 과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호영은 들뜬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이사에게 말했다.
“이사, 안내해라. 오늘 하루 휴식하고 내일 아침, 출정에 나설 것이다.”
“알겠습니다.”
깍듯하게 대답하는 이사의 모습에 호영은 흐뭇한 기분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자신을 경계했던 주제에 너무 거리낌 없지 않은가?
‘유저가 아닌 게 확실한데 처세술이 상당하군. 이것도 집안 내력이라고 봐야 하는 건가.’
호영은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한 채 친위대를 이끌고 거침없이 목책 안으로 들어섰다.
함정? 분명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지만 지금은 대범하게 나가기로 하였다. 내전이 벌어졌다는 것은 이미 확인된 일이었고 무엇보다 이사라는 인물을 한번 믿어 보고 싶었다.
그건 분명 비이성적인 행동이었지만 ‘이씨’ 가문을 얻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위험이었다.
무엇보다 그가 암수를 쓴다면 그때 가서 철저하게 응징하면 될 일이었다. 어떤 암수든 호영을 어찌하기란 불가능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대범하게 나설 수 있었다.
다행히도 목책 안에 들어선 이후, 별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하기야 일을 벌일 것이었다면 수백 명이 모인 상황이었을 때 일을 벌였을 터.
호영은 피식 웃은 채 긴장감을 풀었다. 긴장감을 풀고 나서 그가 한 일은 한 가지였다.
바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
이사에 대한 정보, 각 일족들에 대한 정보. 그리고 주변 부족에 대한 정보.
저녁 동안 각종 정보들을 수집하였고, 다음 날이 되자 미리 예고했던 것처럼 회군하였다.
현리에 도착하자 이사는 크게 놀라워하였다. 생각보다 현리의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앞으로 놀랄 일이 더 많을 것이다. 네가 해야 할 일도 많을 것이고.’
호영은 경악하는 이사를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호인족
‘인구가 많아졌으니 당분간은 내실에 집중해야겠어. 물론 이사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결정을 내려야겠지.’
현리에 도착한 이후, 호영의 일상은 무척이나 분주해졌다.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진 상황. 축제를 개최하는 것만 해도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전이야 새롭게 복속되는 부족민들의 수가 오십을 채 넘지 않았으니 챙겨야 될 게 그리 많지 않았지만 지금은 부족민만 무려 육백 명 가까이가 한 번에 합류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주거할 귀틀집부터 각자가 해야 할 노동, 그들에게 배분해야 될 식량까지. 안 그래도 바빴던 그의 일상은 더욱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호영은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갑작스럽게 발전한 현리. 여러 문제점이 생겨나고 그에 따라 호영의 몸이 더욱더 바빠졌지만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가 바빠졌다는 것은 현리가 발전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발전 속도라니. 목표를 달성하는 게 어렵지 않겠어.’
최초로 세웠던 목표는 이미 달성한 지 오래였다.
처음에는 현리 부족만 한 크기의 부족이 존재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었기에 현리 부족의 추장이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최초의 목표가 달성되었다.
그다음에 세운 목표는 인구 5천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1회 차가 끝날 때까지 달성할 목표였는데, 지금의 발전 속도대로라면 어렵지 않게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노예까지 인구에 포함시켜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른 목표들 역시 조금씩 충족되기 시작했다. 친위대를 강하게 만드는 것, 법을 세우는 것,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 그리고 후계자를 탄생시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