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름을 물었는데, 현리 부족의 방식처럼 그녀는 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성은 ‘봉’이었고 이름은 ‘선’이었다.
‘성이 봉? 아무래도 그 나라가 확실한 것 같군.’
2회 차 끝 무렵에 등장하여 4회 차까지, 대략 200년을 존속했던 왕국. 5회 차에 센추리를 시작한 호영으로선 들어 보기만 했던 나라였기에 자세히는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2회 차에 왕국을 표방하고 200년간 존속시켰다는 것은 봉선의 부족이 가진 잠재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뜻하였다. 호영은 봉선이 제법 탐이 나기 시작하였다.
“봉선이라……. 확실히 강할 것 같은 이름이긴 하군.”
“흐흐! 네가 그렇게 말해 주니 기분 좋다. 너도 강한 암컷이 좋지 않나?”
호영의 무력을 보고 잠시 기가 죽었던 봉선이지만 화끈한 여장부답게 도발적인 목소리로 호영을 유혹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유혹이라고 해 봤자 대놓고 ‘나랑 자자.’라고 말하는 게 다였지만 말이다.
“너 정도면 나도 나쁘지 않지.”
“그렇다면!”
“하지만 나는 같은 부족 사람이 아니라면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는다. 믿을 수 없기 때문이지.”
봉선의 외모는 호영의 기준으로 딱히 나쁜 편은 아니었다. 사사처럼 잠자리에 들 때마다 로그아웃해야 할 정도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를 현리 부족의 부족민으로 만드는 것. 어쭙잖은 유혹에 넘어가 대사를 그르칠 수는 없었다.
“크흑, 강한 수컷인데 소심하다. 마음만 맞는다면 그냥 하는 거지, 뭘 그렇게 따지냐!”
“너야말로 소심하군. 나와 같은 부족이 된다는 게 두려운 것인가?”
“흥! 지금 나보고 너의 부족에 들어가라는 말이냐?”
“그래. 참고로 복속을 거부한다면 죽음뿐이다. 너뿐만이 아니라 너희 부족 전부.”
“…….”
그 살벌한 말에 봉선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이제 그녀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녀가 찾아온 곳이 수컷이 넘치는 이상향의 세계가 아닌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호랑이 굴이라는 사실을.
봉선이 고민하는 동안 친위대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봉선 휘하의 여전사들을 포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때까지 여전사들은 멍청한 얼굴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씨, 씨만 받아 가겠다는데 이러는 건 너무하다. 꼭 모든 걸 가져가야 하나?”
“과연 씨만 받아 갔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힘이 약했다면 그녀는 분명 현리 부족의 모든 것을 약탈해 갔을 터.
여자들은 부족민으로 받아들이되, 남자들은 노예로 삼았을 것이었다. 그것이 약육강식의 세계에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그러니 역으로 정복당하는 것도 순순히 받아들여라.’
대략 5분 정도가 지났을까? 입술을 질끈 깨물던 봉선이 말문을 열었다.
“나는 전사다. 나를 전사로 취급해 준다면 너의 부족에 들어가겠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너는 현리 부족의 당당한 전사가 될 것이다.”
“……고맙다.”
봉선도 결국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복속을 거부하면 죽인다는데 어떡하겠는가? 무슨 고결한 애국심 같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봉선은 현리 부족의 일원으로 합류하였고 머지않아 친위대 소속이 될 수 있었다. 물론 봉선의 합류에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된다. 암컷 따위가 친위대 전사라니!”
가장 앞장서서 반발하는 사람은 역시 수호였다. 언제부터 친위대라는 사실에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는지 수호는 봉선이 여자라는 이유를 지적하고 나섰다.
“흥! 추장이 동의했는데 네놈은 뭔데 반대하는 거지? 그리고 왜 암컷이 친위대 전사가 될 수 없다는 거냐?”
봉선은 그런 수호의 반발에 퉁명스럽게 대답하였다. 현재 그녀 휘하의 여전사들은 자신의 부족으로 되돌아간 상황.
현리 부족에 남은 것은 오직 봉선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립무원의 처지에서도 봉선은 당차기 그지없었다.
수호가 친위대에서, 아니 부족 전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스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우두머리로서 평생을 살아온 여자니 당연한 이야기겠지.’
사실 그녀가 현리 부족의 일원이 된 이유는 현리 부족이 강해서라기보다 현리 부족의 수장인 호영이 강해서였다.
즉, 봉선은 현리 부족에 투항한 것이 아니라 호영에게 투항한 것과 다르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봉선으로선 수호의 반발이 불쾌하게만 느껴질 것이었다.
“암컷 따위가 어떻게 친위대 전사가 될 수 있냐! 암컷은 애 만드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들이다!”
“나약한 수컷 주제에! 마음에 안 들면 덤벼. 나도 못 이기는 주제에 어디서 나대?”
마치 암사자처럼 사납게 외치는 봉선의 모습에 수호가 어깨를 움츠렸다. 목소리를 높이긴 하였지만 그 역시 어제 봉선의 무력을 지켜본 입장이었다.
호영에게야 무력하게 당했지만 초강을 상대하던 그녀의 무위는 확실히 범상치 않았다. 결국 전면전을 피하기로 결정한 수호가 고개를 돌려 호영을 바라보았다.
봉선과 말싸움하지 않고 호영을 설득할 생각인 것 같았다.
‘수호, 너 언제부터 이렇게 찌질해졌냐?’
속으로 혀를 찬 호영이지만 생각해 보면 수호는 처음부터 무력을 앞세우기보단 알량한 지혜를 사용하던 인물이었다.
덩치만 산만했지 여우같은 머리를 가졌다는 것이다.
“추장, 생각해 봐라. 이년은 암컷에다 아직 우리 부족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나는 이미 봉선을 우리 부족민으로 받아들였는데?”
“오직 이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년의 부족이 오지 않고 배신할지 어떻게 아나?”
여러 부족을 정복한 경험이 있는 현리 부족이지만 봉선의 부족을 복속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일단 현리 부족은 봉선의 부족이 어디에 있는지, 위치조차 알지 못하였다. 현리 부족의 위치는 노출되었는데 반대로 여 부족의 위치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항할 시 노예로 삼는다.’라는 현리 부족의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지도 애매하였다. 봉선의 경우 분명 현리 부족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호가 불만을 제기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 부족의 입장에선 막말로 추장을 버리고서 도주를 선택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여 부족을 모욕하다니. 저 수컷 놈, 찢어 죽이겠다!”
봉선이 이를 아득 깨물며 으르렁거렸다. 호영이 말리지만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수호를 묵사발 냈을 기세였다.
좌중의 분위기가 다시 가열되려고 하자 호영이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봉선은 우리 부족민이다. 어쨌든 그녀는 지금 이곳에 나와 같이 있으니까.”
“여 부족이 배신한다고 해도 말이냐?”
“그들이 배신한다면 그때 그들만 응징하면 되는 일이다. 봉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지.”
사실 이렇게 일일이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호영의 권위라면 굳이 설득이 필요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친위대 전사들을 설득시키지 않고 복종만을 강요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크나큰 불화가 생길 것이었다.
특히 호영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4년뿐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지금이야 호영이 통제할 수 있다지만 나중이 되면 내란이 발생하여 부족이 쪼개질 수도 있으리라.
“추장,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남아 있다. 저 암컷은 친위대 전사가 되기 위해 어떠한 공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부족을 공격했다. 안 좋은 선례를 남길 것이다.”
선례라는 단어까지 쓰다니. 역시 수호의 지모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인 것 같았다. 호영은 내심 수호의 지모에 감탄하며 반론을 하였다.
아니, 하려고 하였었다.
“그까짓 공, 세워 주겠다. 노예를 잡아 오면 되는 것이지? 추장. 여 부족 애들이 도착하면 내가 걔네들이랑 노예를 잡아서 오겠다.”
“노예를?”
“내 부족 인근에 비루하게 숨어 사는 나약한 것들이 존재한다. 금방 잡아 올 수 있다.”
봉선의 그같은 말에 호영은 흥미로운 얼굴을 하였다.
확실히 그녀가 공을 세운 뒤 친위대 소속이 되는 것이 가장 반발이 없을 것이기는 했다.
그중에서 노예나 부족민을 새로 얻어 오는 것이라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공이라 할 수 있었다.
“네년을 어떻게 믿고 원정을 보내? 추장! 내가 가겠다! 전사 스무 명만 주면 예백 산 너머를 모두 정복할 수 있다.”
“흥, 너 같은 나약한 수컷이 정복을? 아무도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암컷 따위에게도 복종하지 않겠지. 무엇보다 네년의 부족이 과연 우리 부족으로 올지가 의문이다.”
또다시 으르렁거리는 둘의 모습에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둘의 관계는 앙숙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봉선과 직접 부딪혔던 초강은 오히려 조용한데 수호는 왜 이렇게 반발하는 건지.’
물론 그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수호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을 터.
지금까지야 일족의 힘으로 친위대의 실력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지만 언제까지 일족의 힘으로 직위가 유지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일신의 무위가 초강처럼 강한 것은 아니었으니 수호로선 봉선의 존재가 위협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이렇게 반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니지.’
수호를 질책할 수도 없는 것이, 그의 행동에는 엄연히 명분이라는 것이 존재하였다. 친위대로서의 긍지와 명예. 그것을 지키기 위한 명분이었다.
“그만.”
호영은 일단둘의 말다툼을 중단시켰다. 그러고서는 곧장 봉선에게 명령을 내렸다.
“봉선, 너는 여전사들이 돌아오면 그들과 함께 출정에 나서라. 단, 저항하는 자들만 노예로 삼고 투항하는 이는 부족민으로 삼아라.”
“알았다! 노예든 부족민이든 얼마든지 끌고 오겠다!”
승리의 미소를 지은 채 그렇게 외치는 봉선을 보며 수호는 이를 악물었다. 눈빛에 적대감이 가득한 것이, 봉선을 유력한 경쟁자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추장, 여 부족의 암컷들이 돌아왔다.”
전사 하나가 호영에게 다가오더니 그렇게 외쳤다. 당연하겠지만 전사의 그같은 보고에 두 명의 표정은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수호는 탄식하였고 봉선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전사들이 돌아왔다는 것은 그들이 배신하지 않았다는 의미.
결국 봉선의 복속을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추장, 갔다 오겠다!”
다음 날이 되자 봉선이 씩씩한 얼굴로 출정에 나섰다. 그녀가 향한 곳은 본래 자신의 부족이 자리하였던 예백 산 너머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봉선은 자신의 여전사들과 함께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다. 반항하는 자는 죽이거나 노예로 삼고 투항하는 자는 부족민으로 삼는 식으로 순식간에 주변을 정복하였다.
이미 그곳에서 쌓아 놓았던 악명이 상당했는지 봉선은 출정에 나선 지 고작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아 별다른 피해도 없이 정복을 끝마쳤다.
“대단하군.”
봉선의 활약에 호영도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여전사 열세 명, 봉선 본인까지 열네 명이 출정하여 백스물네 명을 잡아 왔다.
그중 대부분이 저항도 하지 않고 투항을 선택했다고 해도 봉선이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너희 모두를 친위대 전사로 삼겠다.”
“정말이냐, 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