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하지만 호영이 현리 부족의 추장이라는 사실은 머나먼 미래를 생각하면 쉽게 밝혀서는 안 될 일.
호영은 계속해서 ‘구해 줄까, 무시할까.’라고 중얼거리며 홍준기를 어찌할지를 고민하였다.
그때 전사 한 명이 달려와서는 호영에게 보고하였다.
“예백 산으로 갔던 전사들이 돌아왔다.”
“그들이?”
전사의 보고에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솔직히 가장 기대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예백 산부터가 현리 부족에겐 미지의 땅에 가까웠고 예백 산 너머는 당연히 아는 바가 아무것도 없었다.
실제로 예백 산 너머로 전사들을 보낸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여태까지 깜깜무소식이었다. 호영은 서쪽으로 보낸 전사들처럼 예백 산 너머로 간 전사들도 모두 죽었으리라 생각하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는 보고를 듣게 되다니.
‘과연 그곳은 어떤 곳이려나?’
호기심이 생긴 호영은 전사에게 ‘어서 불러와라.’라고 말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명의 전사들이 추레한 몰골로 호영을 찾았다.
“살아 돌아왔구나! 잘 왔다. 현리 부족민 모두가 너희들의 귀환을 기다렸다.”
양팔을 벌리며 환영하는 호영을 보고 전사들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평소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호영이었기에 그의 환영은 더욱 기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예백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더냐?”
“고블린이 있었다. 고블린들이 단체로 동물들을 사냥하는 것을 직접 봤다.”
그 말에 호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예백 산의 고블린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마정석을 바치며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고블린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물론 나중이 되면 고블린을 사육할 것이니 꼭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지만.’
마정석을 얻기 위해 몬스터를 사육하는 것. 이것은 미래가 되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된다. 하여 호영도 언젠가는 몬스터를 사육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시기적으로 일렀다.
특히 고블린의 경우 무력이 약하다고는 하나 지능이 뛰어나 사육이 쉽지 않았다.
괜히 무리했다간 현리 부족이 도리어 멸망하게 될 수도 있는 일. 그래서 몬스터를 사육하는 것은 2회 차 아니, 3회 차 이후로 미뤄 두었다.
그리고 이 생각은 고블린을 발견한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호영은 전사들의 보고를 듣고 예백 산 너머에 대한 관심을 끊어 버렸다.
나중이 되면 탐이 나는 땅으로 변할지 몰라도 고블린이 우글거리는 곳은 지금으로선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 티 내지는 말자.’
눈앞의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정찰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 정보가 호영에게 그리 가치 있지 않다고 해도 그들의 희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잘했다. 너희들 덕분에 우리 부족은 안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수호에게 가라. 일정한 시간 동안 훈련받은 뒤 너희들은 정식으로 친위대 전사가 될 것이다.”
그 말에 전사들은 감격한 얼굴을 하였다. 친위대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감격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호영은 전사들의 순박한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추장! 추장!”
“무슨 일이냐?”
“이상한 것들이 쳐들어왔다! 초강이 이상한 것들과 싸우고 있다!”
갑작스러운 보고에 호영은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의 침입을 받다니?
침공했으면 침공했지 침공을 받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북쪽의 오크가 언제든 침입할 수 있고 맹수나 몬스터들도 간간이 침입하기는 하였지만 그것들은 전부 얼마 전의 이야기였다.
친위대가 본격적으로 임무에 나선 이후, 현리 부족의 근방에서 인간을 위협할 수 있는 생물은 모조리 사라졌다. 맹수나 몬스터들도 이제는 현리 부족의 영역을 넘어야지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북쪽에 오크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그들이 침입한다면 친위대 전사가 아닌 강씨 일족이 보고하였을 터.
무엇보다 ‘이상한 것’이라니? 호영은 친위대에게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있었다. 무엇이든 확실하게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몬스터나 맹수의 습격이라면 결코 ‘이상한 것’이라는 표현 따위는 쓰지 않았을 터.
부족을 침입한 존재는 어쩌면 인간일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상대가 인간이라면 초강이 패배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호영은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목책으로 향하였다.
목책에 도착하니 황당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얼굴에 특이한 문신을 한 일단의 무리가 여유로운 분위기를 한 채 목책 앞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저들이 전사가 보고했던 ‘이상한 것들’의 정체일 터. 호영은 그 모습을 보고 친위대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뭣들 하는 것이냐!”
외지인이 목책 앞까지 다가왔으면 친위대 전사들이 나서서 제압해야 할 터.
그런데 전사들은 멀뚱하게 구경하고만 있었다.
오직 한 명, 초강만이 앞으로 나서 무리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와 맞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추장, 언제 왔나?”
“사 오장, 지금 뭐 하는 거냐. 저것들은 또 뭐고?”
“나도 잘 모른다. 갑자기 나타나서 초강을 도발했다.”
“초강을 도발했다고? 그런데 네놈들은 왜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이냐?”
“저, 저놈들이 가만히 있어서 우리도 가만히 있었다.”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친위대의 기강이 설마 해이해기라도 한 것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었다.
얼마 전에도 친위대의 훈련을 직접 감독했던 그다. 아직 전투력은 부족하였지만 친위대의 기강만큼은 그가 회귀 전에 지휘했던 부대들과 비교해도 나쁘지 않았다. 해이해졌다는 표현은 결코 적절치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초강의 명령도 있을 것이지만 그보다는 이런 상황 자체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기야 호영조차도 다른 부족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런 희한한 문신을 한 부족은 더욱더 말이다.
‘여자인 건가? 여자가 어떻게 초강과 비슷한 무력을 가질 수 있지. 마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데.’
친위대를 나무라던 호영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상황을 지켜봤다.
상황은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물론 지켜보는 사람만 여유로웠고 둘의 전투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여전히 치열하였다.
월등한 근력을 가진 초강이 거대한 뼈창을 마치 대도처럼 휘둘러 맹공을 퍼부었고, 문신을 한 여전사는 유연하고 민첩한 동작으로 초강의 공격을 피해 나갔다.
물론 그렇다고 상대가 피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몸이 얼마나 유연한지 기괴하고 변칙적인 동작으로 간간이 반격에 나섰다. 초강조차 그녀의 공격은 제대로 피하지 못할 정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초강의 전신에 조그만 생채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상대 역시 팔이 덜렁거리고 가슴팍에 긴 상처가 생기는 등 꽤나 큰 타격을 입었는데,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였다.
“크흐흐! 너 강하다. 너 마음에 든다. 이렇게 강한 수컷 처음 본다.”
갑자기 공격을 멈춘 상대가 그렇게 말을 꺼냈다.
문신과 혈흔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이었는데 왠지 모르게 그녀의 얼굴에서 ‘욕망’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초강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 상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초강이 무덤덤한 어조로 답하였다.
“네년도 암컷 주제에 조금 한다.”
“조금? 흐흐! 수컷들은 역시 허세가 심하다.”
“추장과 비교했을 때 네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응? 추장이라고? 네놈이 추장 아니었나?”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호영이 앞으로 나섰다.
전투를 계속 지켜볼 수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초강이 부상을 입으면 그 역시 곤란해진다. 다행히 전투가 멈추었으니 지금 나선다면 초강이 다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나 정도의 힘으로 추장이 될 수는 없지. 우리들의 추장은 바로 저기에 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도 한다더니, 초강의 눈치가 꽤나 늘었다.
다가오는 호영을 가리키며 초강이 그렇게 말하자 여자는 충격받은 얼굴을 하였다. 초강보다 강자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네놈, 아니 네년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튼 네년이 우리 부족에 온 이유는 뭐지?”
“…….”
“다시 묻겠다. 우리 부족에 온 이유가 뭐냐?”
“믿을 수 없다.”
조그만 목소리.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뭘 믿을 수 없다는 거냐?”
“네놈이 이놈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
“귀찮게 하는군.”
한숨을 내쉰 호영은 그녀에게 달려갔다. 잔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달려간 호영은 거침없이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퍼억!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공격을 허용한 그녀는 한참 동안 일어서질 못하였다. 그만큼 호영의 공격이 강력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인 충격이 상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우물 안의 개구리로군.’
호영은 조소를 지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표현이 이보다 적합할 수가 없었다.
조그만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살아왔을 여인.
물론 그녀의 무력은 호영이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수준인 것은 맞다. 무려 초강에 비견되는 무력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그거야 마력을 쓰지 못하는 지금 시대였기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나중이 되면 그녀 정도의 무력은 흔하디흔한 수준이 된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8회 차의 일개 병사도 그녀보다 강할 정도.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우습게만 느껴졌다.
고작 이같은 무력으로 자만심을 갖는 게 우습기만 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우리 부족을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냐?”
“……수컷들이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다.”
힘을 보여 주었기 때문일까? 드세기만 했던 그녀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였다. 하기야 그녀 정도의 실력이라면 잠깐 본 것만으로도 호영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을 터.
그리고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명백한 강자에게 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을 것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강자에게 순종할 줄 아는 이 시대의 평범한 인간이었다.
“우리 부족에 수컷들이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다?”
“그렇다.”
“이해할 수가 없군. 너희 부족에는 수컷들이 없다는 말인가?”
“있다. 하지만 너무 적다. 우리는 더 많은 수컷들을 가지고 싶다. 더 강한 수컷의 씨를 받고 싶다.”
그녀의 외설스러운 발언에 호영은 저도 모르게 헛기침을 하였다. 문신만 없다면 제법 미인처럼 생겼을 것 같은 여인이 외설스러운 발언을 하니 그로서는 괜스레 민망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호영은 그녀의 발언에 흥미를 가졌다. 그녀의 말을 들어 봤을 때 그녀의 부족은 남녀의 역할이 뒤바뀐 것 같았다.
즉, 남녀 역전의 사회로서 여자 중심의 사회라는 말이었다.
‘여자의 권력이 더 강한 부족이라……. 설마 내가 아는 그 나라의 모태가 되는 부족인가?’
별거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미래를 아는 그로선 제법 흥미로운 일이었다. 호영은 몇 가지를 추가적으로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부족은 어디에 있는지, 부족 근처에는 무엇이 있는지, 사냥은 어떤 방식으로 하고 어떤 것을 주로 먹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