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처벌 사유도 점점 다양해졌다.
처음에는 누군가와 싸우거나 남의 것을 훔쳤을 때 처벌했다면 요즘에 와서는 추장이나 추장의 부인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계속해서 재판이 이어지자 현리 부족의 사람들은 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한 추장이라는 지위가 얼마나 지고한지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추장의 친족을 무시하는 일은 없으리라. 물론 출신 간의 다툼도 줄어들 것이고 말이다.
* * *
“탐색하러 갔었던 전사들이 돌아왔다.”
“어디로 보냈던 자들이지?”
“남쪽이다.”
“주 부족 출신들이 갔던 곳이로군. 초강, 당장 그들을 불러와라.”
부족에서 숨을 고르는 동안 호영은 새로 합류한 네 부족의 전사들을 시켜 사방을 정찰케 하였다.
남서쪽의 예백 산은 물론이요, 오크의 영역인 북쪽 땅과 수인족의 땅으로 알려진 강 너머의 동쪽 땅 그리고 아직까지는 미지에 가까운 남쪽 땅과 서쪽 땅까지.
전사들의 피해를 감수하고 정찰을 보냈다.
어차피 언제가 되었건 진출해야 할 땅이었다. 희생이 두렵다고 미지의 땅으로 남겨 둘 수는 없는 법.
그리고 마침내 오늘이 되자 정찰대의 일부가 돌아왔다.
“수고했다.”
전사들의 모습을 본 순간 호영은 격려부터 하였다. 한눈에 봐도 고생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둘의 행색은 마치 한 달 내내 전쟁을 치른 모습들이었는데, 출발할 때는 다섯이었건만 돌아온 것은 단둘뿐이었다.
‘그나마 위협이 적다고 알려진 남방에서 이만한 타격을 입다니.’
그렇다면 다른 방향으로 보낸 정찰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서방은 몰라도 동방이나 북방은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너희들은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이야.”
“우리들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추장이 우리 일족을 받아 준 일, 나는 아직도 잊지 않는다. 현리와 추장을 위해서라면 나는 언제든 희생할 수 있다.”
언제든 희생을 자처하겠다는 그의 말에 호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제법 영악한 사내였다, 이리도 충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다니.
뭐, 확실히 죽으라면 죽는 시늉 정도는 할 사내였다. 진짜 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일단 정보를 들어야겠지만 너희 둘은 웬만해선 친위대 전사로 받아 줄 생각이다. 가져온 정보가 하찮지만 않으면 말이야.”
친위대 전사로 받아 준다는 그 말에 두 명은 모두 격앙된 표정을 지었다. 세 명의 동료가 죽었다는 슬픔도 친위대 전사가 되었다는 기쁨을 누를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친위대에 소속된다는 것은 일족 최고의 전사가 되는 것보다 명예로운 것이니까. 무엇보다 실제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나 권력도 상당하고.’
아마 그랬기에 눈앞의 전사들도 죽음을 무릅쓰고 정찰에 나섰을 것이다. 결코 충성심 같은 감정으로 죽음을 무릅쓴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현재 현리 부족에서 친위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했다.
치안부터 시작하여 법을 집행하는 역할과 부족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노예를 수급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이 중 어떤 역할도 그 영향력이 적다고 할 수 없으니 친위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권력 기구라고 할 수 있으리라.
“추장, 우리는 열심히 남쪽 땅을 탐색했다. 실망하지 않을 거다.”
“기대하겠다.”
30대 전사는 자신감이 넘치는 어조로 설명을 시작하였다.
그가 말하기를, 남쪽 땅은 코끼리에 버금가는 거대한 초식 동물이 주류고 나머지는 그 초식동물들을 사냥하는 소수의 몬스터와 맹수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몬스터들은 고블린처럼 부락 단위가 아닌, 가족 단위거나 단일 개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고 맹수들은 늑대나 들개 따위로 그리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라고 하였다.
초식동물 또한 거대한 크기를 가졌으나 대체로 온순한 편이라고 하였으니 현리 부족의 남방은 대체적으로 위협 요소가 적은 땅으로 판단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군. 너의 말에 따르면 남방에는 인간들이 없다는 것이 아니냐?”
“음, 아니다. 동족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흔적은 발견했다.”
“흔적? 그렇다면 인간이 존재하긴 한다는 이야기로군.”
“그럴 것이다, 아마. 얼마 전까지 생활했던 흔적을 발견했으니.”
호영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였다.
지금 당장 남방으로 진출할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 다른 정찰대가 돌아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북방 쪽이야 기대도 안 하고 있지만 서방이나 동방 또는 예백 산 너머에 또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무엇보다 지금 당장 진출하기엔 부족에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다. 파종도 시작해야 했고 북방 오크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해야 했다.
‘일단 스무 명 정도 선발대 보내면 되겠군. 다른 방향의 정찰대가 더 좋은 정보를 가져온다면 헛수고가 되겠지만 어쨌든 남방도 언젠가 진출해야 할 땅이니까.’
생각을 끝마친 호영은 두 전사에게 ‘앞으로 너희는 친위대원이다.’라고 말한 뒤 휴식을 취하게 하고는 같이 보고를 듣고 있던 초강에게 말하였다.
“남쪽으로 친위대를 보내야겠다.”
“또? 이미 충분한 정보를 얻었지 않나?”
“인간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니 더욱 자세하게 살펴야 한다.”
“하지만 더 이상 가고 싶어 할 전사가 없을 텐데? 뭐, 추장의 명령이라면 친위대원인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겠지만.”
“십장의 자리를 준다고 하면 과연 나서지 않을 전사가 있을까?”
그 말에 초강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자리를 탐내는 놈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겠다.”
겉으로 보기엔 평화롭기 그지없는 친위대였지만 내부에선 벌써부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위대는 현리 부족의 최고 권력 기구였다. 제아무리 원시적인 부족 사회라고 해도 권력에 파리가 꼬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추장의 뜻은 알겠다. 친위대 전사들에게 물어보고 오겠다.”
“딱 스무 명만 보낼 것이니 선착순으로 받아라.”
“그렇게 하겠다.”
초강은 호영의 명령을 받들어 친위대 전사들에게로 향하였고 호영은 목책 바깥으로 향하였다.
“한결 보기가 좋아졌군.”
부족 외각에 조성된 농토를 본 호영이 자신의 감상을 말하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잡풀과 잡관목으로 우거졌던 땅이었다. 심지어 독풀이나 해충들도 곳곳에 존재하였을 정도로 문명과 동떨어진 땅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광경은 전혀 달랐다.
잡풀이나 잡관목은 모두 사라졌고 토지는 정확하고 정연하게 구획되어 있었다. 아직 부족한 점도 많이 보였지만 몇 달 전과 비교하면 실로 놀라운 변화였다.
‘이대로만 발전한다면 2회 차에서는 자연스럽게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겠어.’
새로운 농법에 인구까지 갖추어졌다. 또한 치안을 책임지는 직업 전사들이 생겼고 제대로 된 법이 생겨났다.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는 현리 부족이었다. 호영은 100년 뒤의 미래가 기대되었다.
* * *
“저들을 가만히 지켜볼 건가? 나는 어서 먹고 싶다.”
음침한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한 곳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목소리의 주인공보다 상급자로 보이는 이가 입술로 혀를 적시며 대꾸하였다.
“이르다, 아직은.”
“어째서냐?”
“지금 나선다면 세 명밖에 얻지 못한다. 저것들이 부락으로 우리를 안내해 준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탐할 수 있다.”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시선을 둔 곳엔 미지의 땅에서 건너 온 의문의 전사들이 있었다.
미지의 땅, 정확히는 몬스터와 맹수들로 가득한 산 위에서 내려온 자들이었다.
어떻게 산 위에서 내려왔고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저 전사들의 뒤를 쫓으면 부락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을 터.
추격하기로 마음의 결정을 내린 그들은 은밀한 몸놀림으로 세 전사를 뒤쫓기 시작하였다. 산 위로 올라가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딱히 두려움은 없었다.
저런 나약한 전사들도 오르내릴 수 있는 곳인데 자신들이 왜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한참을 추격하자 드넓은 평야가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이 목적지인 것 같았다.
“산 위도 별거 아니다.”
“나도 이런 곳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흔적들을 보면 위험한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위험한 것들은 왜 저런 나약한 것들을 내버려 두나?”
모든지 알 것 같았던 수장도 그 물음에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저 나약한 것들의 본거지에 강인한 것이 있을지도…….’라고 생각하며 혀를 널름거렸을 따름이었다.
“여기 좀 이상하다.”
그때 누군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말을 내뱉지 않았을 뿐,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막힘없이 뚫려 있는 개활지.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만 생활했던 그들은 새로운 환경이 꽤나 당혹스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당혹스러움도 잠시였다.
“나약한 것들의 부락이다!”
누군가가 환하게 웃으며 그렇게 외치자 모두가 함성을 질렀다.
엄청난 길이의 목책! 저 정도의 목책이라면 전사들의 부락은 상당히 클 것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부락이 크다면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약탈할 수 있을 터.
‘강한 놈이 있었으면 좋겠군, 후후.’
수장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목책으로 다가갔다.
* * *
“수인족이라…….”
호영은 얼마 전에 가까스로 생환한 전사의 보고를 되새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현재 정찰을 보낸 스물다섯 명의 전사 중 여덟 명이 돌아온 상황이었다. 일곱 명의 죽음이 확정되었고 열 명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가장 최근에 돌아온 팀은 동쪽으로 보냈던 전사들이었다.
강 너머를 탐색하였던 전사들. 아니, 전사 한 명은 무려 네 명의 희생 끝에 가까스로 생환하였다. 그야말로 전멸을 당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전사가 가져온 정보는 호영으로 하여금 만족케 하였다. 단순히 ‘수인족이 있더라.’라고 알려진 정보가 확실한 정보가 된 것이니까.
‘홍준기를 어찌해야 할까. 지금 군사를 보내 구해 줄까?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강 너머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아직 그가 기억하고 있는 홍준기인지는 확신하긴 어려웠지만 어쨌든 지금 시기에 센추리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인물인 것은 분명하였다.
하물며 그 인물이 자신의 집 근처에 살았고 센추리에서도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면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호영은 홍준기와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었다. 물론 사적인 대화보다는 센추리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덕분에 호영은 홍준기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홍준기, 그는 현재 호인족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다. 호랑이 머리를 한 수인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종에 노예와도 다를 게 없는 처지. 누군가의 구원을 절실하게 바라고 있는 상황이었다.
‘성격은 어느 정도 파악됐어. 은혜를 입으면 결코 배신하지 않을 성격이야. 하지만 내 존재를 밝히는 게 조금 꺼려지는데…….’
사람 보는 눈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호영이었다. 회귀하기 전에도 깊이 신뢰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 적은 없었다.
그런 호영이 보기에 홍준기라는 인물은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 자였다. 누군가를 배신할 성격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