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32화 (32/345)

# 32

그때 죽은 백 부족민들의 숫자만 열 명이나 되었으니 백 부족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들어가자, 우리들의 부족으로.”

호영이 그렇게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친위대 전사들과 명 부족 출신의 부족민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와아아아아!”

목책 안으로 들어서니 열렬한 함성이 들려왔다.

명 부족 출신의 부족민들은 그 함성에 놀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들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고 있었는데, 얼핏 봐도 수백 명은 족히 되어 보이는 숫자였다.

“이, 이게 다 뭐냐? 우리를 죽이려는 거냐?”

“죽이기는. 너희들을 환영해 주기 위해 나온 부족민들이다.”

“우리를 환영한다?”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호영은 끝까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큰 목소리로 한마디만 외쳤을 따름이다.

“모두 즐겨라! 오늘은 모두가 즐기는 축제의 날이다!”

호영의 한마디에 현리의 부족민들은 더 큰 함성으로 보답해 주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새로운 구성원을 받는 데 불만을 가진 사람이 안 보이는군.’

새로운 부족민을 받아들인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기존 부족민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문제였다.

사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리 부족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명 부족이나 이전에 받아들였던 기, 정, 주 부족민들은 산속에서나 사는 ‘촌놈’과 다를 게 없었다.

반대로 산속에 살던 부족민들의 입장에서는 현리 부족은 농사나 짓고 물고기잡이나 하는 나약한 족속들로 비치기도 하였고 말이다.

이처럼 두 집단은 문화가 달랐고 정서가 달랐다. 그러니 두 집단 간의 충돌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호영은 이같은 문제를 누구보다 먼저 캐치하였다. 그는 두 집단을 융화시키기 위해 ‘축제’를 개최하였다.

지금 같은 시대에 축제만큼 구성원의 화합을 꾀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기’ 부족을 통합한 다음 날 축제를 개최하니 이 부족의 구성원은 무리 없이 현리 부족에 융화되었다. 정 부족과 주 부족을 통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정도로 충돌이 없었던 이유에는 ‘축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축제를 개최해도 식량이 부족하거나 땅이 부족하다면 반목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현리 부족은 인구가 부족해서 문제지 땅이 부족하거나 토질이 척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인구가 늘어남으로써 식량에 여유가 생기게 되었는데, 주변의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아지니 맹수나 몬스터의 습격에서 안전해졌고 채집 활동과 물고기잡이에 더욱 열중할 수 있었다.

워낙 풍요로운 시기였기에 강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물 반, 고기 반이었고 평야에는 채집할 수 있는 채소나 과일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렇다 보니 기존 부족민들이나 새로운 부족민들이나 서로 합치는 것이 이득임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하나 언제까지 화목할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요즘 들어서 세 부족들이나 기존의 부족들이 제법 말썽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야.’

호영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축제를 즐기고 있는 부족민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두가 즐기는 순간이지만 그만큼은 마냥 즐길 수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머나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추장, 추장!”

그때 덩치 큰 여인이 ‘추장’을 애타게 부르며 호영에게 달려왔다.

와락!

여인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더니 호영을 껴안았다. 호영은 그녀의 격렬한 애정 표현에 이를 악물었다.

‘순간 때릴 뻔했다.’

호영의 긴장감이 풀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호영의 주먹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공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천만다행인 셈.

하지만 거구의 여인은 자신에게 무슨 위기가 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양 비련의 여주인공 행세를 하였다.

“보고 싶었다, 추장! 정말 보고 싶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전장에 나가 사기진작을 한다면 모든 전사들이 죽음도 불사하는 역전의 용사가 될 것 같았다.

“흠흠, 안 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러는 것이냐.”

하지만 추장의 아내라 할 수 있는 그녀를 전장에 내보낼 수는 없는 일. 호영은 주먹을 꽉 쥐고서 태연하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그녀는 물기 젖은 눈으로 호영에게 말했다.

“추장, 나 정말 억울하다. 추장이 없어서 나 정말 많이 당했다.”

“당했다니? 일단 진정해라. 아이를 가졌으니 몸가짐을 조심히 해야 할 것이 아니냐?”

아이. 그녀에게는 호영의 아이가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준의 아이였는데 사실 그 아이 때문에 호영이 그녀에게 박대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센추리에서 아바타의 자식이란 굉장히 중요하였다. 혹시라도 아바타의 혈통이 이어지지 못한다면 다음 회 차에서는 아예 새로운 아바타로 시작해야 하는 까닭이었다.

금수저니, 은수저니 하는 것처럼 센추리 세계에서도 권력과 부의 세습이 이어지기 때문에 혈통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대준에게 자식이 없다면? 호영은 지금까지 남 좋은 일을 한 꼴이 된다. 현리 부족을 키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눈앞의 여인은 호영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힝, 다른 암컷들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추장의 말을 따라 먹을거리를 골고루 나눠 주었는데 암컷들이 내 말을 무시했다.”

훌쩍 대며 웅얼거리는 어조로 말했으나 목소리가 워낙에 컸던 탓에 호영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앙탈에 호영은 순간적으로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하였지만 이내 분노를 다른 곳에다 표출하였다.

‘여인들 주제에 감히 나의 명에 불복한 것인가? 친위대나 세 일족도 더 이상 방만하게 굴지 않거늘, 어디 암컷들이.’

호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함부로 판단하기는 일렀지만, 그녀가 말한 대로라면 부족의 여인들은 호영의 명령에 불복종한 셈이었다.

제아무리 여인들이라 해도 추장의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더군다나 그녀의 신분은 무려 추장의 부인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추장의 부인이라는 지위가 그리 인정받지는 않고 있었다. 능력 중심의 사회였기에 추장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권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방관할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 확실히 알려 줘야 했다. 추장의 친족이 가진 권위를 말이다.

‘그 전에 일단 진위 여부를 확실하게 가려야겠지.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무리 그녀, 사사가 호영에게 무척 중요한 인물이라 해도 그녀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질투나 시기 따위로 일종의 암투를 벌이려는 것일 수도 있을 터. 현명한 지도자라면 공정성을 갖출 필요성이 있었다.

“너의 시녀를 불러와라. 그 아이에게 먼저 물어보겠다.”

“혜를 말하는 거냐, 추장?”

“시녀가 혜 말고 또 없지 않느냐.”

호영의 독촉에 그녀는 흠칫 떨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불러오겠다.”

사사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 부족 출신의 부족민 혜가 호영을 찾아왔다.

혜는 현재 ‘시녀’라는 지위를 갖고 있었다. 굳이 시녀라는 지위를 내린 것은 사사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혜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기 위함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고아였고 더군다나 예 부족 출신이 모두 노예가 된 상황이었다. 당연히 열 살도 안 되는 고아가 현리 부족에 쉽게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호영으로선 애써 구원해 준 대상이 차별과 텃세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여 시녀라는 직위를 만들어 혜 자립할 수 있는 방도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추장이 불렀다고 해서 왔다, 헤헤.”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렀다. 너는 지금부터 바른말을 고해야 할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는 혜에게 두 가지를 물었는데 호영이 부족을 떠나고 난 이후 사사의 행실과 사사를 대하는 부족 여인들의 태도에 대해서였다.

혜는 이런 호영의 물음에 숨김없이 대답하였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또한 순박한 아이였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기에 거침없었다.

“결국엔 세 일족 출신의 암컷들은 죄다 사사를 무시했다는 것이군. 특히 수씨의 암컷들이.”

“응, 내가 봤다, 무시당하는 모습들.”

“초강!”

진실을 알았다면 응당 벌을 내려야 할 터.

호영은 초강을 부른 뒤 명령을 내렸다.

“수씨 암컷들을 모조리 잡아 와라. 반항하면 때려도 좋다.”

“충.”

그는 일체의 의구심도 배제하고는 호영의 말에 복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위대 소속 전사들이 일단의 여인들을 끌고 왔다. 사사가 지목한 여인들로, 이른바 ‘항명죄’를 저지른 여인들이었다.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끌고 올 수가 있나? 추장!”

“사사가 말하기를 너희는 사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이냐?”

“흥! 고작 그거 때문에 축제 중에 우리를 끌고 왔나?”

호영은 수은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지독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묻는 것에만 대답해라, 그러지 않으면 목을 칠 것이니.”

“…….”

잠시 두려움에 떨었던 여인들은 이내 진실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사사가 너무 어리고 예뻐서 질투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사를 상대로 어떤 악행을 저질렀는지 서로가 번갈아 가며 설명하였다.

호영은 그녀들의 말을 무표정한 얼굴로 들어 주다가 이내 선언하였다.

“암컷에게 할당된 식량 분배의 책임을 맡은 사사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사사로이 부족의 식량을 횡령하였던 수은은 태형 서른 대, 그런 수은과 함께 불온한 행동을 했던 나머지 죄인들에게 태형 열 대를 때린다!”

그 말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호영의 명령을 이행해야 하는 친위대나, 갑작스러운 치죄 현장을 구경하기 위해 찾아온 부족민들이나 호영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몰라 멀뚱멀뚱 서 있을 따름이었다.

죄인들만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친위대는 무엇을 하는 것이냐? 어서 죄인들을 눕혀 법을 집행하라!”

“충.”

호영이 친위대에게 직접 명령을 내리고서야 전사들은 몽둥이를 들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축제 분위기를 망치고 말았지만…… 나쁘지는 않아.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니까.’

하필 축제 때 재판을 열게 되어 오늘 정식으로 현리 부족의 일원이 된 명 부족의 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지만 호영은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복속된 날이기에 이번 재판은 더욱 의미 있었다.

안 그래도 새로 합류한 세 부족이 제법 말썽을 일으키기 시작한 상황. 명 부족은 적어도 기, 정, 주 출신의 부족민들처럼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었다. 부족에 합류하자마자 법의 엄중함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잠깐 숨을 고르는 동안 부족의 치안과 법규를 완전히 다스려야겠다.’

잠시 부족을 떠나 있었을 뿐이건만 추장의 부인인 사사가 핍박받고 치안은 엉망으로 변해 있었으니 호영으로선 그같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호영의 그같은 결정으로 다음 날부터 현리 부족에선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법을 어긴 이들이 내는 곡소리였다.

하루에 최소 한 건의 재판이 열렸고 그에 따라 한 명 이상은 꼭 처벌을 받았다. 어느 날에는 열 명 이상이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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