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31화 (31/345)

# 31

그런 지영이다 보니 호영의 실력이 비범하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창문을 통해 멀리서 지켜봤을 뿐이지만, 봉을 휘두르는 움직임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하하, 절까지 하라고? 괜히 오버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볼걸. 안 그래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 사람의 실력이 내가 생각하는 수준이 맞다면 나는 절해서라도 붙잡을 거야. 오빠도 알잖아, 센추리에서 무술의 고수가 가지는 이점을. 그 사람한테 무술을 배운다면 센추리에서 얼마나 이득을 보겠어?”

센추리라는 말을 듣자 준기의 눈빛이 달라졌다.

“맞다. 그 사람도 센추리를 한다고 말했어.”

“헐, 진짜? 대박이네.”

“거리도 가깝고 센추리까지 하다니. 이 정도면 인연이 아닐까?”

“남자끼리 무슨 인연이야, 인연은. 아무튼 그래도 센추리 하니까 친해지기는 쉽겠네. 나중에 톡 보내 봐. 정보 교환하면 쉽게 친해질 수 있고 어쩌면 센추리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잖아?”

지영의 말에 준기는 반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센추리라는 공감대로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현실에서 만남을 피한다면 센추리에서 만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때 지영이 얼굴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 생각해 보니 센추리에서 만나는 건 힘드려나? 정상인이라면 튜토리얼을 깨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나는 볼 수 있겠네.”

“그 사람, 튜토리얼 깼다는데?”

“진짜? 헐, 사이코패스 아니야? 어떻게 그걸 깼대?”

“야, 나도 깼는데 사이코패스라니.”

“오빠도 솔직히 정상인은 아니잖아.”

소름 끼친다는 듯, 자신의 팔뚝을 문지르며 그렇게 대꾸하는 지영을 보며 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기야 자신의 과거가 유난스럽기는 했다. 물론 사이코패스나 정신이상자라고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튜토리얼을 깼다면 어느 지역에 있는지 한번 물어봐. 뭐, 갑자기 물어보면 난처해할 수도 있으니 오빠 위치부터 말해 주고.”

“위치를 말해 봤자 둘 다 모를걸, 딱히 지역명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 상황이 좋지 않아. 부족 바깥은커녕 내부도 제대로 돌아다니지 못한다니까.”

“에휴, 그럴 거면 진짜 튜토리얼은 왜 깼대? 비싼 돈 내고 왜 그런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냥 초보자의 섬에나 있을 것이지.”

지영의 말에 준기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준기도 마음 같아서는 초보자의 섬에서 생활하고 싶었다.

그가 아무리 특이한 성격을 가졌다고 해도 사서 고생하는 미련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준기는 지금의 아바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아바타에게, 그리고 아바타의 부족에게 ‘정’이라는 것을 주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바타를 포기한다면 나의 부족은 천년만년 호인족의 노예로 살아가야 할 거야. 아무리 게임에 불과하다고 해도 나의 부족을 외면할 수는 없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었지만 준기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낙원과도 같다는 초보자의 섬.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기는 해도 지금 당장은 아바타가 우선이었다.

그의 아바타는 현재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략적인 정보라도 알려 줘. 혹시 알아, 그 사람의 부족이 근처에 있을지?”

“그랬으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야.”

준기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우연이라는 것이 있다지만 그 넓은 센추리 세상에서 지인을 만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센추리에서 인간이라는 최약체 종족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인간들이 숨어 살거나 이종족의 노예처럼 살아갈 텐데, 유저를 찾아 나설 여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톡은 해 봐야겠다. 지영이 말처럼 내 상황을 말해 주면 그 사람도 흥미를 보일 수 있을 테니까.’

#여전사

“저 부족을 정복하면 나에게 노예가 몇 오나?”

수호가 언덕 위에서 동굴 하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호영은 그런 수호의 물음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노예를 싫어하던 주제에, 이제는 대놓고 달라는 거냐, 수호?”

“흠흠, 싫어한 적 없다. 그냥 노예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을 뿐. 아무튼 나에게 몇 명을 줄 수 있나?”

“말했을 텐데, 저들이 투항을 선택한다면 노예로 받아들일 일은 없을 거라고.”

“내 말은, 저들이 저항하면 어떻게 되느냐다.”

“그때는 너의 활약에 따라 받을 수 있는 노예의 수가 정해지겠지.”

“음! 그럼 열심히 싸워야겠다!”

호영은 현재 정복 전쟁을 한창 진행 중에 있었다.

그의 정복 전쟁은 1회 차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예정인데 지금은 부족의 남서 방향에 위치한 ‘예백’ 산의 완전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예백 산이라는 이름은 현리 부족이 가장 먼저 정복한 ‘예’ 부족과 두 번째로 정복한 ‘백’ 부족을 합쳐서 부르게 된 명칭인데, 호영은 지금까지 예백 산에서 총 다섯 개의 부족을 정복하였다.

물론 ‘정복’했다고 해서 예 부족과 백 부족 때 그랬던 것처럼 피를 보며 전부 노예로 사로잡은 것은 아니었다.

기, 정, 주 이렇게 세 부족은 현리 부족의 침공에 저항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차별 없이 현리 부족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부디 저들도 반항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은 주먹을 쥐었다.

미리 약속된 수신호로, 그가 주먹을 쥐는 동시에 친위대 소속의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벅저벅! 은밀하지만 묵직한 발소리가 호영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들의 목표는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동굴이었다.

그의 친위대가 동굴 정면에서 10미터 거리까지 진격했을 때, 일단의 무리가 동굴에서 튀어나왔다.

“누구냐!”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라!”

동굴에서 튀어나온 무리의 숫자는 열 명 정도였다. 호영의 친위대와 비교했을 때 무려 10배나 차이 나는 숫자였다.

현재 친위대의 규모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부족민으로 받아들인 세 부족에서 전사를 충원하였고 그에 따라 여든 명도 안 되던 규모가 백 명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당연하겠지만 백 명이나 되는 미지의 무리가 갑자기 튀어나왔으니 상대의 분위기는 최악일 수밖에 없었다.

창을 든 전사 열 명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 열 명 안에는 어린아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저런 오합지졸로 10배나 차이 나는 호영의 친위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할 터. 상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산 아래에서 사는 현리 부족의 추장, 대준이다!”

“산 아래? 어떻게 그곳에서 이곳까지 왔냐!”

“우리는 너희들처럼 동굴 안에서 사는 부족이 아니다. 산 위든 산 아래든 거침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 부족이다.”

“……그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왔냐!”

“나를 따라라! 이미 산 위에 사는 수많은 부족들이 나를 따르는 상태다. 너희들도 그들처럼 현리 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

사실 그의 무력이라면 이런 설득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예 부족과 백 부족에서 그랬던 것처럼 힘으로 찍어 누르면 될 것이니까.

그러나 호영이라고 언제까지 무력만 앞세울 수는 없었다. 호영은 왕국을 넘어 제국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가진 사람이었다.

부족민의 숫자보다 노예가 많아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혹시 정 부족도 너를 따라간 것이냐?”

“그렇다. 정 부족은 물론, 기 부족과 주 부족도 우리를 따르고 있다. 이미 그들은 현리 부족의 일원으로서 잘 살아가고 있다.”

“너의 부족에 들어가면 굶지 않을 수 있나?”

“물론이다. 산 아래는 산 위보다 풍요롭다. 하루에 세 번도 먹는다.”

“너의 부족에 들어가면 위험할 일은 없나?”

“산 위까지 정복하려는 우리다. 부족은 얼마나 안전하겠나?”

“그렇다면 좋다. 우리 명 부족은 너희를 따르겠다.”

흔쾌하게 대답하는 명 부족의 우두머리를 보며 호영은 흡족하게 웃었다.

벌써 네 번 연속으로 아무런 피해 없이 부족들을 흡수하였다. 호영으로선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제 예백 산은 모두 정복했다고 봐도 좋겠군.’

아무리 예백 산에 숨어사는 인간의 숫자가 예상보다 많았다고 하지만, 부족이 더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현리 부족이 예백 산에서 흡수한 인구만 벌써 이백 명이 넘었다. 부족의 숫자로 따지면 여섯 부족이나 되었다.

예백 산이 제법 커다란 산이라고 해도 인간들은 하나같이 숨어 사는 처지였기에 이백 명 이상의 인간이 존재할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슬슬 산 너머로 진출해야 하나?’

정복 전쟁은 멈출 수 없었다. 예백 산에 숨어 살던 인간들을 흡수하였다고는 해도 현리 부족의 인구는 이제 막 1천을 넘긴 상태였다.

과거를 경험한 호영이었기에 1천이라는 숫자는 지극히 미미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1회 차가 끝나기 전까지 최소 5천 이상은 만들어야 될 터.

하지만 산 아래를 내려가는 것은 호영으로서도 상당한 모험이었다.

물론 예백 산을 마치 자기 집 앞마당처럼 돌아다녔던 호영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1회 차에서는 산보다 평야가 위험했다.

왜냐하면 평야에는 거인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거인족! 그야말로 세계의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종족이었다.

우월한 신체 능력으로 어떤 몬스터도 두려워하지 않는 호영이지만 거인족만큼은 꺼려졌다. 그들이 가진 힘도 힘이지만 거인족 하나하나가 막강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는 탓이었다.

‘일단 정보부터 모아야겠지. 친위대를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갔다가 거인과 마주한다면 그보다 낭패는 또 없을 테니까.’

마음 같아서는 쉬지 않고 정복 전쟁을 이어 나가고 싶었다. 그의 현재 상황은 비록 나쁘지 않았지만 3회 차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었다. 기, 정, 주 그리고 명 부족을 정보부터 얻은 뒤 공격했던 것처럼 산 아래를 내려갈 때도 정찰부터 보낼 필요가 있었다.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 * *

“여, 여기가 너희의 부족인가?”

명 부족의 우두머리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입을 크게 벌린 것이 어지간히 놀란 모양새였다.

우두머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명 부족의 부족민 전부가 경악한 얼굴로 현리 부족의 목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동굴 속에서만 살았으니 조그만 목책을 봐도 그저 놀랍기만 하겠지.’

호영은 그들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부족이기도 하지만 너희들의 부족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나는 선택을 잘한 것 같다.”

눈물을 글썽이며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호영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확실히 너는 선택을 잘했다. 만약 잘못된 선택을 했으면 너는 죽었고 너희 부족민들은 노예가 되었을 것이니.’

그건 예 부족과 백 부족의 최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도층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고 일반 부족민은 전부 노예가 되어버린 예 부족과 백 부족.

특히 백 부족의 추장 같은 경우는 추장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저항을 선택한 것이라 더욱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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