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그의 창에 의해 김성민의 공격이 허무하게 저지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활을 쏘던 김성민 또한 갑작스러운 호영의 돌격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서걱!
‘이제 김성민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마주한다 해도 죽일 수 있다.’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아직 만족하기는 이르지만 그는 분명 성장하였고 앞으로도 계속 성장해 나갈 것이었다.
네 달간의 정체? 앞으로의 도약을 위해 발판을 다진 것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더 이상 스스로를 의심할 필요가 없으리라.
“저기요?”
환상이 사라졌다. 호영은 눈을 번쩍 떠 자신의 환상을 깬 사내를 바라보았다. 작은 체구에 비쩍 마른 사내가 자신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죠?”
“저, 혹시, 무술 같은 거 하시는 분인가요?”
“…….”
호영은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선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하였다.
“예.”
그 짧은 대답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호영의 앞에 선 사내는 무안한 얼굴을 하면서도 자리를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의도일까? 호영은 입을 꾹 다물고서 사내의 의도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가 자신에게 다가온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실, 저도 무술을 참 좋아합니다.”
“무술을요?”
뜬금없는 그 말에 호영이 사내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시간상으로는 십 수 년을 수련한 것과 다름없기 때문인지 호영에게 나름 안목이라는 것이 생겼다.
근육만 봐도 무슨 운동을 했는지,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아무리 봐도 운동한 몸이 아니었다.
추운 봄인지라 옷을 두껍게 입었지만 호영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기야 애초에 이 정도로 비쩍 마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하하하! 무술을 배운 것처럼 보이지는 않죠? 맞습니다. 무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지는 않죠. 선천적으로 병약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호영은 무미건조하게 대꾸하였다. 사내가 무술을 좋아하건, 병약한 체질이건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는 솔직히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수련이 방해되었다는 사실도 짜증 났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내보인다는 사실도 껄끄러웠다.
무엇보다 싫은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수련을 지켜봤다는 사실었다.
호영은 속으로 ‘빨리 자리를 떠야겠군.’ 하고 생각하며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를 했죠?”
“…….”
“저, 사실 며칠 전부터 계속 봤습니다. 봉술 하는 모습이요. 제가 저 아파트에 살거든요.”
자신을 며칠 전부터 지켜봤다는 소리에 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왜 굳이 인적 드문 장소에서 창을 수련했던가.
다른 이에게 창술 수련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호영은 일그러진 얼굴로 차갑게 물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혹시 센추리라고 아시나요? 외국에서 인기 있는 게임인데.”
사내의 물음에 안 그래도 굳어 있던 호영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센추리’에 대해 들었기 때문이다.
‘목적이 뭐지? 내가 인터넷에서 실수라도 했던가?’
순간 호영의 머릿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인터넷에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저질렀는지 고민하였고, 한편으로는 이자 역시 자신과 똑같은 회귀자인지도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의 입에서 센추리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이유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사내에게 대답하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오오, 그럼 센추리 하시나요? 사실 제가 센추리를 하고 있거든요.”
“……고작 그거 물어보시려고 저에게 오신 겁니까?”
황당한 목소리로 그리 묻는 호영에게 사내는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궁금했거든요. 이런 분이 센추리를 하면 어떻게 될까 하고. 센추리를 하신다면 아시겠지만 센추리는 무술을 잘할수록 유리하잖아요? 그쪽 분처럼 봉술의 고수가 센추리를 한다면 왠지 정말 대단할 것 같습니다.”
유쾌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호영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속으로 온갖 걱정을 하며 최악의 사태까지 염두에 두었던 자신의 행동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자신과 같은 ‘회귀자’라고까지 생각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호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사내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센추리를 하고 있긴 합니다만.”
“정말요? 이야! 주변에서 센추리 하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저도 지인 중에 센추리 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가요? 정말 센추리 하는 사람이 적나 보네요. 비싸긴 해도 충분히 제값을 하는 게임인데 말이죠.”
“잔인하고 선정적이니까요. 물론 튜토리얼만 깨지 않으면 누구나 열광할 만한 가상현실 게임이지만 말이죠. 그런데 튜토리얼은 깨셨습니까?”
“예, 저는 튜토리얼을 깼습니다. 솔직히 잔인하기는 하지만 어차피 게임이라는 생각에 참고서 깼습니다.”
역시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센추리에서 튜토리얼을 깼다는 것. 그것은 살인의 생생함을 느껴 봤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평범한 사람이 게임이라는 이유로 그 느낌을 견뎌 낼 수 있을까?
절대 아니었다. 모든 게 현실적인 센추리였으니 ‘게임이라는 이유로 견뎌 냈다.’라는 말은 통용되지 않았다.
호영이 생각하기로 센추리에서 튜토리얼을 깬 사람이라면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살인을 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지. 만약 이자가 나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니까.’
그만큼 센추리라는 게임은 현실적이었다.
호영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사내는 호영의 눈을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튜토리얼을 깼는지, 깨지 않았는지 알려 달라는 의미 같았다.
“아, 저도 튜토리얼 깼습니다.”
“정말로요? 이야! 대단하십니다. 역시 무술을 배우셔서 정신력이 남다르시네요!”
정신력이 남다르다니. 그 악명 높은 튜토리얼을 깬 것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 본 것 같았다.
“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대화가 길어질 조짐이 보이자 호영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솔직히 그로서는 이 이상 센추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센추리를 하는 사람을 현실에서 봤다는 것이 나름 반갑기는 하였지만 호영에게는 숨기고 싶은 비밀이 너무 많았다.
계속 대화를 나누다 보면 호영이 센추리에서 어느 위치쯤에 있는지, 또 부족 이름이 무엇인지 밝히게 될 수도 있는 일.
‘그러다 보면 현리 부족의 추장이 나라는 사실을 말해야 될 수도 있다.’
호영이 세웠던 계획대로 된다면 현리 부족은 추후 한반도 지역의 최고 세력이 될 것이었다. 즉, 일국을 대표하는 세력이 된다는 말이었다.
당연하겠지만 그 사실은 현실에서도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센추리를 즐기는 모든 유저들이 현리 부족의 추장에 관심을 가질 테고 신상 정보를 궁금해할 터.
그렇기에 현리 부족의 추장이 호영이라는 사실은 되도록 알리지 말아야 했다.
“혹시 바쁘신가요?”
“예. 그러니 연락처 교환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죠.”
“아쉽군요. 알겠습니다. 제 번호는 010……, 아, 제가 적겠습니다.”
사내는 호영의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는 자신의 번호를 적기 시작했다. 번호를 다 적자 이름을 적기 시작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홍준기’였다.
“홍준기 씨군요.”
“하하, 네.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이제 말하네요. 그런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송호영입니다.”
사내, 홍준기는 절대 잊어 먹지 않겠다는 듯, 호영의 이름을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호영에게 더할 나위 없이 호의적이었다. 마치 학교 친구나 군대 동기를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준기의 태도에 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시종일관 퉁명스럽게 대하였는데 상대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였다. 왠지 모르게 자신이 못나 보였다.
‘솔직히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긴 한데……. 아쉽게도 나는 의심이 많고 여유가 없다.’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호영은 무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그 말만 남기고서 자연스럽게 등을 돌린 호영.
준기 역시 그런 호영을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짧은 대화만 나누고서 곧바로 헤어졌다.
‘그런데 이름이 홍준기라……. 설마 내가 아는 그 홍준기인가?’
집으로 되돌아가던 호영은 문뜩 떠오르는 생각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만히 멈추어 선 호영은 심각한 얼굴로 ‘홍준기’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홍준기! 그는 호영이 알고 있을 정도로 센추리의 유명인이었다. 물론 일국의 왕이거나 권세 높은 귀족 또는 장수라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호영이 홍준기라는 이름을 알게 된 계기는 그가 만든 스킬을 몇 개 보았기 때문이다.
홍준기는 보급 스킬이라 불리는, 따라 하기 쉬우면서도 효율적인 스킬을 몇 가지나 창조한 사람이었다.
초보자의 섬에서는 마치 문파처럼 그의 무술을 배우는 사람이 많았는데, 7회 차부터는 홍준기를 ‘홍 문주’ 또는 ‘홍 사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회귀를 경험한 호영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인물인 것이었다.
“만약 그자가 맞다면?”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다.
만약, 그가 알고 있는 홍준기라면?
그렇다면 무조건 영입해야 하지 않을까?
호영이 알고 있는 홍준기라는 자의 재능은 터무니없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스킬을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실력의 비범함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재능을 갖춘 인물이 호영과 함께한다면 호영으로선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켜보자.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호영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중을 기약하였다.
* * *
“아쉽다. 무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는데.”
호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준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동안 지켜보기만 하다가 오늘에 와서 어렵게 다가가 말을 꺼냈다. 그러나 결과는 좋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번호는 교환하였지만 호영의 표정을 보니 다음 만남을 기약하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준기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갔다.
“벌써 만나고 왔어?”
아파트에 도착하니 그의 여동생, 홍지영이 다짜고짜 물음을 던졌다. 그녀는 마치 준기가 호영과 만나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새였는데, 사실 알고 있는 것을 넘어 호영과의 만남을 권유한 것이 그녀였다.
“응.”
“표정이 왜 그따위야? 이야기가 잘 안 됐나 봐?”
“조금 그러네.”
준기가 침울한 어조로 그렇게 대꾸하니 지영이 ‘팍!’ 하고 준기의 등을 때렸다.
“스승을 구하기가 그리 쉬울 리가 없잖아! 오빠, 영화 안 봤어? 그 정도의 고수라면 몇 번은 절해도 모자랄걸.”
무술에 관심이 많은 준기의 여동생답게 그녀 역시 무협 영화나 무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그치지 않고 고등학교 때는 태권도를 익혔고 지금은 검도를 배우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