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7화 (27/345)

# 27

반면에 중한은 무슨 이유든 간에 폭군의 지배에 순응했던 인물이었다. ‘배신자’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표정이 구겨진 것은 잠시뿐이었다. 노련한 편에 속하는 중한은 헛기침을 하고는 호영에게 물음을 던졌다.

“흠흠, 그렇다면 노예는 부족민이 아니라는 건가?”

“나만의, 그리고 우리 대씨 일족만의 부족민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일종에 사유재산이라는 말이었다. 중한 역시 수호만큼은 아니어도 나름 영특한 사내였기에 호영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

물론 현리 부족에 나름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때문에 알아차린 것이기도 하였다. 일족마다 식량이나 무기 같은 공동재산의 일부를 사유화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씨 일족만의 부족민이라…….”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중한을 보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자신도 노예를 가질 만한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노예가 생기는 것이 부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뭐, 호영으로선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노예제가 생기면서 발생할 문제들은 호영이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호영은 노예의 개념에 대한 이야기는 관두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내 노예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할 생각이다.”

“농사라니? 농사는 우리 중씨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나?”

“중씨만 농사를 할 필요는 없지. 나의 노예들은 산속에서 채집이나 하며 살아가던 것들이다. 물고기잡이를 시킬 수도, 그렇다고 사냥을 시킬 수도 없는 일이지. 그래서 농사를 시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채집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 농사에 그리 많은 숫자는 필요 없다.”

현리 부족의 농사는 무척이나 원시적이었다. 돌이나 짐승의 뿔로 만든 괭이로 땅을 파헤쳐 씨를 뿌리는 방식인데, 땅을 워낙 얇게 파는 터라 노동력은 별로 들지 않지만 그만큼 수확량이 적었다.

호영으로선 당연하겠지만 풍요로운 대지를 그런 식으로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노예를 투입하고 농업 방식을 개선하여 수확량을 대폭 늘릴 생각이었다.

“아니. 나의 노예들은 오직 농사만 할 것이다. 그러니 땅의 절반을 내 노예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너희 중씨가 사용해라.”

그 단호한 말에 중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중한의 표정에는 무언가 불만이 역력하였다. 하지만 호영이 이처럼 단호하게 지시하는데 감히 이견을 내세울 수는 없는 일.

중한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대답하였다.

“알았다. 아직 씨를 심지 않았으니 추장의 말에 따르겠다.”

“하면 목책의 동쪽과 남쪽의 농지는 앞으로 내 노예들이 관리할 것이니 중씨 일족은 서쪽과 북쪽을 관리하여라.”

가장 기름진 남쪽과 동쪽을 가져간다는 말에 그의 인상이 더욱 안 좋아졌지만 이번에도 역시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였다.

호영이 폭군을 죽인 지 고작 열흘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제사장과 강철의 죽음 역시 아직도 얼마 전의 일처럼 느껴졌기에 중한은 호영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 * *

‘노예를 놀릴 수는 없으니 지금부터 농사를 준비시켜야겠어.’

사실 그래서 중한부터 찾은 것이었다. 농지 구분을 확실히 해야 나중에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호영은 노예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했다. 중간에 수씨 일족과도 마주쳤는데 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다.

수씨 일족이 주로 부족의 동쪽에서 활동한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호영이 동쪽의 농지를 가졌다고 하나 농사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수씨 일족이기에 마찰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너희들은 우선 세 개 조로 나눈다. 힘이 센 놈들은 이쪽, 손재주가 좋은 놈들은 이쪽, 이도 저도 아닌 놈들은 이쪽이다.”

“…….”

노예들은 호영의 말에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부족이 달라도 언어는 같았기에 호영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힘이 세다느니 손재주가 좋다느니 이도 저도 아니라느니 그들로선 구분하기 난해한 것들이었다. 애초에 무엇을 위해 구분하는지도 몰랐고 말이다.

“내가 다시 설명해 줘야 하나?”

으르렁거리듯 사납게 말을 꺼내는 호영의 모습에 노예들은 기겁한 얼굴을 고개를 내저었다. 부족의 수호령을 죽인 호영이라는 존재는 그들에게 있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노예들은 호영의 경고에 화들짝 놀라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세 개의 조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는데, 마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아이로 나눈 것 같았다.

힘이 센 쪽은 남자가, 손재주가 좋은 쪽은 여자,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쪽에는 아이들이 모인 것이다.

“너, 너, 너. 세 명은 앞으로 나와라.”

호영은 나뉜 세 개의 조에서 한 명씩 앞으로 불렀다. 어제부터 호영이 눈여겨보던 자들이었는데 제법 똘똘하게 생긴 사내와 여자, 그리고 남자아이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너부터 순서대로 이야기해라.”

“정. 내 이름은 정이다.”

“나는 화야.”

“사, 상이라고 해.”

예 부족은 특이하게 성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이름이 외자였는데 사실 예 부족이 특이하다기보단 현리 부족이 특별하다고 봐야 했다.

왜냐하면 성을 갖는 것은 현리 부족의 고유 방식이기 때문이다.

대준의 대라는 성도 본래는 선조의 이름이었다. 현리에 스며든 ‘대’라는 사람이 현리 부족의 방식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성으로 자손들에게 물려준 것이었다.

“너희들은 조장이다. 조장으로서 조원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으며 조원들이 실수할 시 너희들이 책임을 진다.”

세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러운 호영의 말에 당황한 것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보이는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정이라는 사내는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는 기색이었고, 화라는 여인은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아리송한 얼굴이었으며, 상이라는 아이는 부담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세 사람 모두 호영의 말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는 것. 역시 예순 명 중에서 가려 뽑은 사람들다웠다.

“지금부터 너희들이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겠다.”

그렇게 말을 꺼낸 호영은 세 개의 조를 확실하게 분업하여 지시를 내렸다. 가장 먼저 스무 명의 장정이 조원으로 있는 정의 조에게 잡관목을 모조리 벌목하라 지시하였다.

현리 부족은 오랜 시간동안 농사를 해 왔지만 여전히 부족 근처에는 잡초며 잡관목이며 무성하게 우거졌다.

그 때문에 목책 바로 근처임에도 맹수가 자주 출몰하였고, 맹수가 많으니 또 부족민들의 활동 범위가 축소되었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다.

그렇기에 호영으로선 벌목과 제초를 우선순위로 둘 수밖에 없었다. 부족의 안전과 식량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화의 조에는 농기구를 만들게 시켰다.

호영은 그들을 일종에 장인 집단으로 만들 생각이었는데, 그 시작이 바로 농기구였다.

물론 거창하게 대장간을 짓고서 철제품을 생산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같은 재료를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지였다.

계속해서 장인들을 관리하다 보면 현리의 기술이 자연스럽게 향상될 터.

농기구를 만든 이후에는 무구나 그릇 같은 것들도 만들게 할 계획이었다.

마지막으로 상의 조에 속한 어린아이들에게는 잡초나 돌멩이 따위를 치우게 하였다. 큰 힘이 들지 않고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는 노동을 시킨 것이다.

‘그래도 농번기가 되면 애들도 농사일을 거들어야겠지.’

아이라는 이유로 작업에서 열외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이기 때문에 더 피해를 받는 시대.

하물며 노예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 * *

“이 정도면 충분하겠군.”

노예들에게 작업시킨 지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호영이 없이도 조장들끼리 알아서 작업이 진행될 정도가 되었다.

예 부족 출신이 그만큼 노예근성이 탁월했기 때문인데 호영이 두 번 말하지 않아도 곧잘 따르니 공연히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다음 달부터 파종을 시작해야 할 것이니 그때 다시 감독하면 되겠고, 지금은 이대로 내버려 두어도 괜찮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호영은 친위대 전사들을 불러 모았다. 노예들이 체계적으로 작업하기 시작하였으니 더 이상 부족에서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내실을 갖추는 것은 이것으로 만족하고 정복 전쟁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었다.

“출정한다.”

전사들이 모이자 호영은 곧장 출정에 나섰다.

친위대 일흔여섯 명의 전사들은 호영의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지체 없이 따랐다. 상명하복의 질서가 더욱 엄격해진 분위기였는데 그동안 노예들만 교육한 것이 아님이 증명되었다.

“추장, 그 노예 놈은 왜 데리고 가는 것이냐?”

“필요하니까.”

그러나 모두가 상명하복에 충실한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불만투성이인 수호가 손가락으로 호영의 옆에 붙어 있는 노예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 수호의 물음에 호영 역시 무뚝뚝하게 대답하였는데, 수호는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기색이었다.

“전투하는데 저런 나약한 놈이 왜 필요하다는 거냐?”

그같은 물음에 호영은 수호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친위대에 무려 일흔여섯 명의 전사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개성 있는 전사가 바로 수호인 것 같았다.

‘확실히 수호 이놈은 전사치고 생각이 많단 말이지. 그게 가끔은 짜증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런 놈이 한 명쯤은 필요하기는 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은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열었다.

“전투에선 필요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을 찾는 것엔 필요하다. 이놈은 산에서 살았던 놈이라 지리를 잘 알아. 또한 백 부족이라는 곳의 위치도 이놈이 알고 있지.”

“아하! 그러면 이놈은 싸우려 데려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겁 많은 놈을 전투에 쓸 수는 없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노예의 모습에 호영은 혀를 차며 그렇게 말했다.

“역시 그렇군!”

그러자 수호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꼭 ‘추장은 나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호영은 그런 수호의 반응에 고개를 내저으며 노예에게 말했다.

“백 부족이라는 곳으로 우리를 안내하라.”

“아, 알았다. 따라오면 된다.”

30대 후반의 노예는 제법 공손한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는 친위대를 안내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발걸음은 상당히 빨랐는데 전투에는 도움이 안 되어도 정찰이나 길 안내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물론 그래 봤자 노예들을 전장에 데려갈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노예의 뒤를 따라 1시간쯤 걸었을까? 노예가 문뜩 말을 꺼냈다.

“이 냇가를 따라 올라가면 백 부족이 나온다.”

“냇가 근처에서 살다니. 맹수들이 두렵지도 않은 것인가?”

“백 부족의 추장이 무척 강하다고 들었다.”

그 말에 호영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얼마나 강하기에 맹수나 몬스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지? 설마 대준 정도의 괴력을 가진 것인가?’

하나 대준 정도의 NPC가 흔할 리는 없었다. 흔하기는커녕 대준의 육체 정도라면 적어도 아시아 지역에서는 최강일 것이 분명하리라.

그러니 대준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냇가 근처에 살 정도면 맹수들의 위협을 막아 낼 수준은 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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