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26화 (26/345)

# 26

“괴수에게 그랬듯 목숨을 구걸하면 살려 줄 것이라 생각한 거냐? 그래, 괴수라면 그래 줄 수 있겠지. 괴수는 네놈들을 장난감으로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안 그래. 왜냐고? 인간이니까. 같은 인간이기에 더 잔인한 법이지.”

그가 가장 기분이 나빴던 것은 괴수 따위에게 제물까지 받치며 숭배했던 주제에 괴수를 죽인 자신들에게는 도리어 적대했다는 사실이었다.

인간이라서 우습게 보았던 것일까?

뭐, 어떠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든 호영으로선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죽일 자들이니까.

‘이제 오는군.’

호영은 뒤를 돌아보았다. 언덕 아래에서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바로 그의 친위대 전사들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친위대 전사들의 등장에 더 이상 반항을 시도하는 사람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애초에 호영만 있을 때도 두려움에 떤 채 제 자리에서 꼼짝을 못했지만 말이다.

“쓰러져 있는 놈들을 모두 제압하도록. 저놈들을 모두 나의 노예로 삼을 것이다.”

친위대가 도착하자 호영은 수호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수호는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체 없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였다.

“충! 추장의 말에 따르겠다.”

“그리고 저 늙은이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죽여라.”

“허, 허억!”

늙은이들을 죽이라는 호영의 말에 멀리 떨어져 있던 제사장과 중년 사내들이 기겁하였다. 이곳에서 늙은이라 불릴 사람은 그들밖에 없었다.

즉, 호영이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었다.

“우, 우리는 예 부족의 어른들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죽일 순 없다!”

“시끄럽다. 추장이 말했다. 너희들을 죽이라고. 그러니 그냥 죽으면 되는 것이다.”

푸욱.

수호는 가장 먼저 제사장을 죽였고 다른 전사들이 나머지를 죽였다. 그들의 행동에는 어떠한 망설임이 없었다.

그러자 예 부족의 전사들이 누워 있는 채로 몸을 떨었다. 과감한 손 속을 보고서 새삼 두려움을 느낀 것이리라.

‘자신들의 지도자가 죽어 나갈 때도 반항 한번 하지 않는군. 정말 노예로밖에 쓸 수 없는 놈들이야.’

저런 자들을 전사로 받아들인다면 이제 막 확립되기 시작한 친위대의 군기가 단숨에 문란해질 것이 분명하였다.

부족민으로 받아들여도 마찬가지였다. 괴수 따위나 숭배하며 살았던 저들을 부족민으로 받아들인다면 현리 부족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현리 부족도 따지고 보면 거인을 숭상하던 부족이긴 했지만 그래도 현리 부족은 ‘저항’이라는 것을 하였었다.

부족의 추장이었던 대준이 저항하였고, 대전사라 불리던 강철이 저항하였으며, 적지 않은 전사들이 거인에게 맞서 싸웠다.

저항하기는커녕 제물을 받치고 자신들을 도와주려던 우호 세력까지 없애려 들던 예 부족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 * *

“고작 이런 놈을 수호령이라고 숭배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냐?”

어둠이 찾아온 관계로 예 부족에서 하루를 묵게 된 호영은 다음 날이 되자 예 부족에서 그토록 부르짖던 ‘수호령’이라는 존재를 보게 되었다.

해가 뜨기 무섭게 거대한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가 예 부족을 침략한 것이다.

‘확실히 어제 죽였던 미노타우로스보다는 더 크고 강하기는 하다만.’

어제의 미노타우로스가 3미터 정도의 크기라면 오늘 예 부족을 침략한 미노타우로스는 거의 4미터에 근접한 괴물이었다.

들어 보니 어제 본 미노타우로스가 암컷이고 오늘 본 미노타우로스가 수컷이라는 것 같은데, 확실히 힘의 차이도 월등해 보였다.

하지만 그래 봤자 거인까지 잡은 경험이 있는 호영에게는 일개 괴수에 불과하였다. 호영의 공격을 몇 번이나 버텨 내고 간간이 반격까지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번에도 단 한 명의 희생 없이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하였다. 아주 압도적으로 말이다. 예 부족이 몇 년 동안 숭배하였던 수호령, 미노타우로스는 그렇게 허무히 죽었다.

“네놈들도 싸우려고 했다면 싸우지 못할 이유가 없었겠지. 물론 희생은 적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괴수 따위에게 지배받으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너희는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

“쯧, 변명조차 하지 않는다니. 쓸모없는 것들.”

호영이 비아냥거렸으나 예 부족의 부족민들은 도리어 ‘경외’의 눈빛을 보냈다. 미노타우로스를 사냥한 호영의 무위에 새삼 경외하게 된 것이었다.

‘정말 노예근성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놈들이야.’

절로 고개가 내저어졌다. 너무나 한심스러웠고 한편으로는 지금 이것이 인간족의 현주소라는 사실에 암담함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속으로 ‘보다 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야겠어.’라는 생각을 한 호영은 어느덧 미노타우로스가 완전히 해체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정석은 어디에 있지?”

“돌은 여기에 있다, 추장.”

수호가 호영에게 돌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미노타우로스의 몸에서 나온 마정석이었는데, 호영은 그 마정석을 보고 탄성을 내뱉었다.

‘각인 스킬이 담겨 있는 마정석이로군.’

마노타우로스에게서 나온 마정석엔 마나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다른 마정석처럼 마나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각인 스킬! 이 마정석 안에는 각인 스킬이라는 것이 담겨 있었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스킬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창법이나 심법처럼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지는 스킬이 아닌 몸으로 직접 체득되는 각인 스킬이었기에 그 가치가 상당할 것이었다.

호영으로선 어떻게 보면 예 부족을 노예로 만든 것보다 더욱 가치 높은 물건을 얻게 된 셈이었다.

“소득이 적지 않아, 이대로 계속 머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예 부족의 인구가 무려 예순 명이나 되었다. 비록 그들이 호영의 말에 복종하고 있다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겨날지 알 수 없는 일.

더군다나 식량도 부족해진 터라 지금은 일단 현리로 되돌아가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게 현명한 행동이었다.

“초강.”

“불렀나, 추장.”

“전사들에게 말해라,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알았다. 그런데 예 부족민들은 어떡하나?”

“당연히 끌고 간다. 그들은 모두 나의 노예다.”

노예라는 단어가 아직 어색한지 초강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호영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렇게 예 부족민들과 호영의 친위대 전사들은 이동 준비를 시작했다. 호영의 노예가 될 예 부족민들은 아직도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감히 불만을 내비치지는 않았다.

이미 힘의 우위는 명확했고 그들은 누군가에게 복종하는 것에 무척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현리 부족에 가서도 그들은 군말 없이 호영의 지배에 따를 것이리라.

‘원래는 노예제를 만들 생각이 없었는데.’

호영은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는 예 부족민들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사실 노예제도라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물론 민주주의를 배웠기 때문에 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가 노예제도를 부정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효율적이지 않아서. 인구 백 명 중에 노예가 쉰 명이면 인재는 쉰 명 중에 가려야 한다. 여기에 여자가 스물다섯 명이면 인재는 더더욱 적어진다.

이같은 이유를 제외하고서도, 노예제는 중앙집권화를 방해하는 요소이니 한반도 지역의 패자를 꿈꾸는 호영으로선 부정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호영으로선 노예제도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였다.

‘노예가 있어야 내가 없어도 대씨 일족이 유지될 수 있다.’

대준, 그의 일족은 현리 부족에서 지극히 미미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이제는 일족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처지였는데, 제사장 때문에 일족의 대부분이 죽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외지인 출신이라 세력이 작았는데 제사장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으니 과히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래도 호영이 대준으로 있는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4년 뒤가 걱정이었다. 과연 호영이 떠나고서 대씨 일족이 무사할 수 있을까?

호영은 가능성이 낮다고 봤다. 대준이야 타고난 신력 자체가 남달라서 세 일족의 견제 속에서도 추장이 될 수 있었지만 대준의 자식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었다.

결국 대준을 마지막으로 대씨 일족이 현리 부족에서 중역을 맡게 될 일은 거의 없을 터. 호영으로선 무슨 수든 써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노예제였다. 주인과 일족을 향해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노예들. 그런 노예들이 존재한다면 대씨 일족이 100년 이후를 기약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었다.

* * *

부족으로 돌아가는 동안 딱히 사고나 문제 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이틀 전에 거대 호랑이가 습격했듯 맹수가 습격하는 일도 없었고 예 부족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없었다.

다만 미노타우로스 사체를 옮기는 과정에서 예 부족 출신들이 잠시 공황에 빠졌다는 것이 유일한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혜도 잘 적응한 것 같군.”

“전사들 사이에서 인기 많다. 암컷 모르는 어린놈들이 혜를 노리는 것 같다.”

호영은 고개를 돌려 전사들 사이에서 열심히 재잘거리고 있는 혜를 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노타우로스의 폼에서 가까스로 생환한 터라 힘이 없어 보였는데 하루 만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호영에게 달려들어 온갖 질문을 던지더니 지금은 현리 부족의 전사들과 어울리며 신나게 입을 놀리고 있었다.

다른 부족, 그것도 자신의 부족을 노예로 삼으려는 부족임에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혜는 그 노예? 아무튼 왜 그걸로 안 삼는 거냐? 다른 이들은 어리든 암컷이든 다 가리지 않았는데?”

“혜는 고아니까. 안 그래도 같은 부족민들에 의해 제물로 바쳐진 것도 억울한데 노예로 삼을 수는 없잖아?”

“음, 고아가 무슨 상관이지? 추장의 말, 이해할 수 없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나의 변덕이라고 말이야.”

“알았다. 추장의 변덕이라고 생각하겠다.”

초강의 대답에 호영은 피식 웃었지만 한편으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참 위선적이야. 혜뿐만이 아니라 아이들은 모두 죄 없는 피해자라 할 수 있는데 기분에 따라 누구는 노예로 삼고 누구는 일반 부족민으로 받아들이다니.’

그렇지만 호영은 이미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양심이나 도덕 따위를 모두 내던지기로 다짐한 사내였다.

위선적이고 냉혈한이라는 것? 사이코패스가 되어 보기로 결심했는데 그까짓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혜를 노예로 삼지 않아서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냥 편해진 상태로 있으면 되는 것이다.

호영은 쓴웃음을 지운 채 마음을 다잡았다.

현리 부족에 되돌아온 호영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족의 농토를 다스리는 중한에게 예 부족 출신의 노예들을 소개한 일이었다.

“이것들은 나의 노예다.”

“노예? 추장, 노예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지?”

“폭군에게 지배받았던 당시의 너희가 노예였었다. 이것들에게 있어 나는 그 폭군과 같다.”

“…….”

호영이 갑작스럽게 폭군을 거론하자 중한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현리 부족의 사람이라면 폭군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그 폭군을 거론한 사람이 호영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호영은 유일하게 폭군의 지배에 저항한 인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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