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노예
“이름이 무엇이냐?”
“혜. 혜라고 해.”
“너의 부족은 어디에 있지?”
“……여기서 가까워. 나 따라오면 돼.”
혜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힘겹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자신의 부족으로 안내하려는 것 같았다. 호영은 수호에게 ‘흔적을 남길 테니 정리가 끝나면 따라오도록.’이라는 말을 남기고는 초강만 데리고 혜의 뒤를 따라갔다.
‘원래라면 전사들을 모두 데려가 위압적인 분위기를 연출해야 했겠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호영은 위기에 처해 있던 혜를 구해 주었다. 다른 사람은 아쉽게도 구하지 못했으나 아이 한 명은 살렸으니 혜의 부족에서도 호영을 우호적으로 볼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굳이 전사들을 데려갈 필요가 없었다. 전사들을 데려가면 괜한 경계심만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다 왔어. 저 언덕만 넘으면 우리 부족이야.”
혜의 말대로 언덕을 넘으니 마을 하나가 보였다. 어제 갔었던 고블린 부락만 한 크기의 마을이었다.
‘규모가 의외로 작지는 않군. 하지만 마을이 이렇게 대놓고 있다니. 지금 당장 습격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무슨 자신감이지?’
현리 부족과 비교하면 그리 크다고 볼 수 없겠지만 최소 쉰 명 이상의 인구가 살아갈 것처럼 보이는 부족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산속에 있으면서도 심각할 정도로 무방비해 보인다는 것.
호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혜를 따라 허름한 목책으로 다가갔다.
“누, 누구냐!”
“나야, 혜!”
경비병이라고 해야 되나? 목책의 정문을 지키고 있으니 경비병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만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 목책을 과연 이런 식으로 지켜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아무튼 부족의 경비를 책임진 전사는 경계심으로 가득한 눈을 하더니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혜? 네가 어떻게 돌아온 거냐!”
호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가 살아 돌아왔는데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호영과 초강이 경계된다고 해도 기뻐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은가.
혜도 그런 경비병의 태도에 마음이 상했는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엉엉 울기 시작하는 혜를 보며 호영은 혀를 차고는 앞으로 나섰다.
“괴물에게 당하던 중에 내가 살려 주었다. 그러니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지?”
“자, 잠깐!”
전사는 다급히 소리를 질러 호영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경계심으로 가득한 그의 태도에 호영은 인상을 쓰면서도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부족을 정복할 생각으로 가득한 호영이지만 그래도 되도록이면 유화적으로 정복하는 것이 좋았다. 어차피 현리의 부족민이 될 것이라면 굳이 악감정을 만들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혜를 구했으니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을 터.
하지만 막상 전사의 반응을 보니 그리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제사장과 어른들을 불러오겠다. 그동안 움직이지 마라!”
전사는 그리 외치더니 목책 안으로 들어갔다. 호영은 혜를 달래 주며 부족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때 목책 안이 소란스러워지더니 호영의 귀로 심상치 않은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살아온 거지?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다른 부족의 전사들이 살려 주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설마……?”
“아니다.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분들이 일개 전사 따위에게 죽을 리가 없다!”
호영이 그 의미심장한 대화들을 해석하려 할 때쯤, 목책 안에서 대여섯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들이 바로 경비병이 말했던 부족의 어른들이었다.
“흠…… 혜가 정말 살아 있구나.”
여섯 명 중에 가장 늙어 보이는 사내가 침음을 삼키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호영은 노인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문을 열었다.
“너희들의 태도를 보면 혜가 살아남은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 같군.”
“그렇다. 잘못되었어.”
“뭐라?”
노인의 말에 호영이 노기를 드러냈다. 잘못되었다니? 비록 미노타우로스를 잡는 데 손해를 입은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피해를 감수하고 여자아이를 구해 준 것은 사실이었다.
제아무리 여자아이의 가치가 형편없는 시대라고 해도 부족민의 목숨을 구해 줬으면 응당 고맙다는 표현 정도는 해야 했다. 그런데 이딴 대우를 보이다니?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어떻게 살려 낸 것이지? 혜는 결코 살아날 수 없었을 텐데?”
마치 추궁하는 듯한 태도의 노인을 보며 호영의 표정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하지만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것도 잠시, 그는 냉정함을 되찾았다.
예상한 것과 다른 상황이 벌어졌지만 당황할 필요는 없었다. 만약 저들이 계속 뻣뻣하게 나온다면 호영 역시 강압적으로 나가면 될 터.
일단 그 전까지는 노인의 의문을 해결해 주는 게 좋을 듯싶었다.
“괴수에게 붙잡혀 있기에 괴수를 죽이고 구해 냈다. 그게 그리 이상한 일인가?”
“허어.”
호영의 대답에 노인은 길게 탄식하였다. 그의 얼굴은 마치 절망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내들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양 재차 질문을 던지는 이도 있었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불안에 떠는 이도 있었다.
심지어 호영에게 분노를 토해 낸 이도 있었는데, 그는 적대감으로 가득 찬 눈으로 호영을 향해 외쳤다.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아느냐! 괴수를 죽였다고? 감히 누구를 괴수라고 부르는 것이야!”
“영아, 잠시 진정하여라.”
“하지만 제사장!”
“아직은 물어볼 것이 있으니 화내는 것은 나중에 해도 된다.”
“…….”
제사장이라 불린 노인은 다혈질의 중년 사내를 조용히 시키더니 애써 억누른 것 같은 목소리로 호영에게 물음을 던졌다.
“네가 잡았다는 괴수는 몇이었느냐?”
“괴수가 더 있나 보지? 내가 잡은 것은 한 마리였다.”
그러자 노인이 장탄식을 하였다. 급기야 혀를 끌끌 차기까지 하였는데 마치 호영이 무언가를 잘못했다는 것처럼 느껴지는 태도였다.
다른 사내들의 반응도 노인과 다르지 않았다.
본래 영이라는 사내만 호영에게 적대감을 표출하였는데 이제 다른 사내들도 비슷한 눈빛을 하기 시작했다.
“웃기는 놈들이다! 아이를 구해 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감히 우리 추장에게 이딴 반응을 보이다니!”
“네놈들이 무슨 짓을 한지는 아느냐?”
“무슨 짓을 했냐고? 우리는 괴수를 죽였을 뿐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왜 우리 부족의 일에 관여해 가지고!”
“하! 괴수를 죽인 게 우리의 잘못이다?”
“네놈들이 괴수라 부르는 분은 우리 부족의 수호령이다. 한데 수호령 중 한 분을 네놈들이 죽였으니 다른 수호령께서 우리를 어찌하겠느냐? 이래도 너희의 잘못을 모르겠느냐!”
그 말에 초강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호영의 얼굴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한낱 몬스터 따위가 부족의 수호령으로 불리다니?
현리 부족처럼 지성이 존재하는 거인족을 숭배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몬스터에 불과한 미노타우로스를 숭배하는 것은 정말 터무니없이 미친 짓이었다.
‘목책이 허술한 것부터, 예상과 다른 반응들까지. 이제야 대충 상황 파악이 되는 것 같군.’
모든 게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호영은 상황 파악이 끝나자 다른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대로 자신의 부족민이 되라고 해 봤자 오히려 분란만 일으킬 터. 부족민이 된다고 해도 미노타우로스를 찬양하는 종교를 만들어 해악을 끼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저들이 수호령이라 부르는 미노타우로스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저들 앞에서 똑똑히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괴수가 공격할 것이 두려운가? 그렇다면 싸워라. 이미 우리는 괴수를 죽였다. 우리와 힘을 합친다면 더는 괴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같이 미노타우로스와 싸운다면 저들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터. 더 이상 미노타우로스를 찬양의 대상으로 삼는 미친 짓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수호령을 죽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인간이 어찌 수호령을 죽일 수 있냐!”
“멍청한 것인가? 우리들이 이미 괴수를 죽였다고 말했을 텐데.”
“네놈들이 잡은 수호령은 진정한 수호령이 아닐 것이다. 진짜 수호령은 훨씬 크고 훨씬 강하다!”
일개 몬스터보다 못하다는 것이 자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목소리를 드높이는 그들을 보며 호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는 인간이거늘.
물론 여러 종족이 존재하는 센추리니 지구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회귀 전 그가 경험했던 센추리의 인간족은 분명 최강이었었다. 호영 역시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미노타우로스를 숭배하는 저들의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가 않았다. 좋게 보이기는커녕 경멸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와 함께 싸우지 않겠다는 것이냐?”
“당연하다! 우리 부족이 싸워야 할 대상은 수호령이 아니라 바로 네놈들이다.”
그 말을 내뱉은 노인은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부족민들에게 외쳤다.
“저놈들을 전부 죽여 수호령의 분노를 풀어 내자!”
“와아아아아!”
“혜도 다시 잡아서 제물로 바쳐라!”
노인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목책 안에서 스무 명쯤 되어 보이는 전사들이 튀어나왔다. 사납게 달려드는 그들의 기세를 보면 지금까지 미노타우로스를 숭배하며 살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수십 명이 달려드는 상황에서 호영은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 그로서는 황당할 만하였다. 나름 은혜를 베풀었건만 은혜를 보답하기는커녕 원수로 갚다니.
그것도 어이없는 이유를 대며 말이다.
“네놈들이 그렇게 누군가의 노예로 남길 원한다면……. 오냐, 내가 네놈들을 노예로 부려 먹어 주마.”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주먹을 뻗었다. 그의 주먹은 호기롭게 달려들던 한 사내의 복부에 닿았다.
콰앙!
그러자 마치 만화에서 나오는 전투 장면처럼 호영의 주먹에 맞은 사내가 멀리 날아갔다. 뒤로 따라붙은 전사들과 뒤엉킨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퍽! 퍼억!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호영과 초강에게 달려들던 스무 명의 전사들. 그 전사들이 단 한 번의 공격도 성공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 이럴 수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너무도 압도적인 광경에 제사장을 비롯하여 부족의 다섯 어른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호영을 바라보았다. 단둘이서 스무 명의 전사를 감당하는 무력이라니!
아니, 초강의 경우는 고작 세 명을 쓰러뜨렸으니 호영 혼자서 스무 명을 상대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압도적인 신위였다.
“이럴 때 보면 인간도 참 우스워.”
움찔거리며 두려운 눈빛을 하기 시작한 중년 사내들을 보며 호영은 조소를 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던 주제에 힘을 조금 보이니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꼼짝을 못한다.
참으로 한심한 모습이 아닌가?
“나는 분명 그 괴수 놈을 죽였다고 말했는데, 왜 나에게 덤빈 거지? 같은 인간이라서? 괴수는 두렵고, 같은 인간은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하! 정말 웃기는 놈들이야.”
“우, 우리가 잘못했다. 그러니 목숨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