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하면 곧바로 출발한다.”
“충!”
아직 약간의 어색함이 남아 있었지만 친위대에게는 다른 전사들에게선 찾을 수 없는 절도라는 것이 있었다. 호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전사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대열을 갖춘 채 호영의 뒤를 따랐다.
‘훈련을 감독한 것은 고작 나흘. 하지만 친위대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실전을 거듭한다면 최고의 군대가 될 수밖에 없으리라.’
친위대가 발전한다면 현리는 더욱 빠르게 발전하게 될 것이었다. 호영은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은 뒤 전사들을 이끌고서 목적지로 향하였다.
그가 전사들을 데리고 향하는 곳은 현리를 떠나 방황할 때 잠깐 신세 졌던 산이었다. 고블린이 있고 무수한 야생동물이 있는 이름 모를 산. 현리 부족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그 산이 호영의 첫 목적지였다.
오늘부로 현리 부족은 그 산을 중심으로 정복 활동을 시작하리라.
* * *
동굴의 모습은 일주일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들은 마치 제 집에 온 것처럼 자연스럽게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그때 초강이 호영에게 말했다.
“여기 또 왔다.”
“당분간은 이곳에서 생활할 것이야.”
“다른 부족을 찾기 위해선가?”
초강의 물음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온 식량을 모두 사용할 때까지 이 동굴에서 생활하며 다른 부족을 찾아낼 것이었다.
아마 6일 정도는 동굴에서 생활하게 될 터.
“앞으로 바쁠 거다. 너도 다른 전사들과 같이 쉬고 있어라.”
“추장은 어디 가나?”
“고블린을 만나고 올 것이다.”
“같이 가자, 추장.”
호영은 머리를 긁적였다. 혼자 가는 게 편했지만 초강의 눈빛을 보니 아무래도 같이 가야 할 것 같았다.
“알았다. 따라와라.”
그는 결국 그렇게 말하고는 초강과 함께 고블린 부족을 찾았다. 물론 동굴을 나서기 전, 수호에게 말해 전사들을 통제하도록 명령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동굴을 나선 지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산 중턱에 조그만 부락 하나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현리 부족처럼 인간이 살아가는 마을같이 생긴 곳이었다.
그러나 그 마을에서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고블린뿐. 바로 이곳이 한 달 동안 호영에게 공물을 바치던 고블린족이 살아가는 부락이었던 것이다.
“케르륵!”
부락에 다가서니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블린이 공포에 떨 때 내는 울음소리였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가 울음소리를 내더니 순식간에 부락 전체가 똑같은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호영의 존재만으로 고블린족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날 잊지 않아서 다행이군. 괜히 피를 볼 필요가 없겠어.’
이같은 호영의 속내를 고블린들이 알게 된다면 고블린들은 공포에 떠는 것을 넘어 혼절할지도 몰랐다.
“케이루으! 케이루으!”
그때 호영에게도 익숙한 고블린 한 마리가 등장하였다. 굽은 허리에 거무튀튀한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는 고블린이었다.
호영이 ‘제사장 고블린’이라고 명명한 그 고블린은 호영을 보고서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지배자를 대하는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호영은 그런 고블린의 경배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당연한 대우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찾아왔다.”
“키리릭? 무, 꼬?”
호영이 말문을 열었으나 제사장은 알아듣지 못하였다.
제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짓으로 고블린 하나를 불러들였다.
그러자 조그만 고블린이 무언가를 들고서 제사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엎드려 있던 제사장은 상체를 일으키고서 호영에게 말했다.
“케레. 케레.”
“마정석이야 일단 주니까 받아 주기는 하겠지만…….”
조그만 고블린이 가져온 것은 바로 마정석이었는데, 아무래도 호영이 현리 부족에 가 있는 동안 바치지 못했던 공물을 지금 바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호영이 고블린 부락을 찾아온 것은 마정석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인간. 그는 바로 인간을 찾으려 고블린 부락에 온 것이었다.
마정석을 받아 든 호영은 열심히 보디랭귀지를 구사하였다. 만약 고블린이 단순한 몬스터라면 보디랭귀지를 해 봤자 의사소통이 되진 않겠지만, 고블린은 이래 봬도 언어가 존재하고 나름의 지성을 갖춘 종족이었다.
특히 제사장 고블린은 지력이 상당할 것이라 추측되니 호영의 보디랭귀지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폼은 안 나지만 그건 어쩔 수 없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이지만 어쨌든 고블린족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제사장 고블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왼편을 가리켰던 것이다.
아무래도 그쪽 방향에 인간이 있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호영은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고블린 부락을 가장 먼저 찾아오길 잘한 듯싶었다.
물론 의사소통이 된 게 확실한지는 아직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돌아간다.”
“다른 부족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나?”
“인간을 찾는 것은 내일이다. 오늘은 너무 늦었어.”
호영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있는 상황. 이런 시간대에 산을 돌아다니는 것은 그리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다.
초강도 납득하였는지 동조하는 얼굴을 하였다.
둘은 이내 동굴로 되돌아갔다.
동굴로 되돌아오니 전사들을 통제하던 수호가 둘을 반겼다.
“돌아왔나, 추장.”
수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씨의 어른으로서 현리 부족의 권력자라고 할 수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친위대의 일개 전사에 불과하였다.
같은 수씨 형제의 견제로 친위대의 전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호영은 새삼스레 수호의 이력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나가 있는 동안 야숙 준비는 다 해 놨겠지?”
“……조금만 있으면 끝난다.”
호영의 물음에 수호가 어색한 얼굴로 대답하였다. 호영이 맡겼던 일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쯧.”
그런 수호를 초강이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혀를 찼다. 한눈에 봐도 수호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초강은 나흘 전부터 공공연하게 수호를 경멸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무엇을 잘못할 때마다 모욕적인 비난을 퍼부었고 때로는 폭행을 가하기도 하였다.
누가 보면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초강이 수호를 싫어하는 이유는 딱히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초강이 수호를 싫어하는 이유. 그건 단 하나였다. 바로 수호가 무능하다는 것.
사실 수호는 수씨 일족으로서 건장한 체구를 가졌음에도 사냥에 관련된 경험이 일천한 편이었다.
수영이나 낚시 같은 것은 잘할지 몰라도 전사로서의 실력은 형편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전사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진 초강으로선 불만스러울 수밖에. 초강에게는 수호가 무능하게밖에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었지.’
호영도 딱히 수호를 좋게 보지는 않았었다. 초강처럼 수호가 전사답지 못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수호가 수씨 일족이라는 이유가 더 컸다.
수씨 일족. 지금은 호영에게 충성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호영으로선 현리 부족의 세 일족은 견제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과연 세 일족이 4년 뒤에도 추장에게 충성할까? 호영이라면 모를까, 그들이 대준에게 충성할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호영은 수호를 경계하였다. 친위대 내부에서 불온의 씨앗이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요즘 하는 행동이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단 말이지. 머리도 제법 비상한 것 같고.’
솔직히 처음 그를 봤을 때는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행동하기에 단순 무식의 전형이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영의 권위에 전면으로 반발하는 행동이 무식하다고밖에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친위대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본 바,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다혈질의 기질은 분명히 있었지만 호영의 명령을 이해하는 속도나 무언가를 외우는 속도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수호의 자질을 보고 나니 수호가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나중에야 견제하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은 인재로 사용하기가 용이했던 것이다.
‘4년 동안 최대한 부려 먹어 주지.’
* * *
다음 날이 되자 호영은 전사들을 이끌고 어제 제사장 고블린이 가리켰던 남동 방향으로 움직였다.
물론 그 방향에 사람이 있을 거라 기대하고 움직이는 것은 아니었다. 산이 꽤나 넓고 또 풍요롭다지만 과연 산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지금만 해도 수십 명의 전사를 대동하였는데 위기가 발생하였다.
크허허허헝!
몸길이만 4미터는 되어 보이는 초대형 맹수. 심지어 칼같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길이가 20센티미터쯤 되어 보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외형을 가진 맹수였다. 이런 맹수인지 몬스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의 생명체가 도처에 널려 있었으니 인간이 살아가기가 쉬울 리 없었다.
“호, 호랑이다!”
“으아아아아!”
여든 명. 무기를 든 사내가 무려 여든 명이나 되었음에도 공포에 질린 것은 맹수가 아닌 인간이었다.
‘이러니 인간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겠지.’
호영은 혀를 찼다.
눈앞에 보이는 호랑이를 닮은 맹수.
분명 위압적이게 느껴지기는 하였지만 그래 봤자 한 마리에 불과하다. 인간이 맹수에 비해 나약하다고 해도 목숨을 불사하고 싸운다면 열 명 안팎의 희생으로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었다.
하물며 거인을 죽인 호영이 있으니 열 명은커녕 단 한 명의 피해도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인간은 겁부터 먹고 본다.
아마 산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초강, 수호. 도망치는 전사가 있다면 죽여라.”
“알았다!”
“…….”
갑작스러운 호영의 명령에 초강은 이유를 묻지 않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수호는 달랐다. 그는 동료를 죽이라는 호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추장, 도망치는 전사를 죽이라니 그 무슨……?”
퍼억!
호영의 결정에 이견을 내세우려던 수호였지만 그는 미처 말을 끝마치지 못하였다. 초강이 다짜고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기 때문이다.
‘개판이군. 개판이야.’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맹수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전사들은 공황에 빠져 있고 그 전사들을 통솔해야 될 수호와 초강은 싸움질을 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호영은 초강을 나무라지 않았다. 호영이 생각하기에 초강의 행동은 틀리지 않았다.
수호는 어떻게 보면 호영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
초강은 호영을 대신하여 벌을 내려 준 것에 불과하였다.
다시금 혀를 찬 호영은 ‘크르릉’ 하는 소리에 허리를 낮추었다. 숫자 때문인지 함부로 덤비지 못하던 호랑이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전사들의 오합지졸 같은 모습을 보고 승리를 확신한 모양이었다.
‘도약할 생각이로군. 나를 노리는 건가? 영리한 놈이야.’
호영은 조금 긴장하였다. 저 정도의 호랑이라면 5미터 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도약할 수 있을 터. 지금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보니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크아아앙!
그리고 이런 호영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조금씩 다가오던 호랑이가 자세를 낮추더니 갑자기 도약하여 호영에게 덤벼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