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호영의 신체 능력이 제아무리 괴물적인 수준이라 해도 신장만 15미터에 달하는 거인의 손짓을 아무렇지 않게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스쳐도 사망이니 다소 무리하게 움직여야 하는 까닭이었다.
그에 따라 체력의 소모가 가속화되었는데, 이래서야 폭군이 먼저 지칠지, 호영이 먼저 지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결국 호영으로선 더욱 과감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한 곳만 노린다.”
회피가 수월해졌으니 굳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할 필요가 없어졌다. 움직이는 동선을 최소화하여 폭군의 약점 한 곳만을 노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호영이 생각한 폭군의 약점은 단 하나였다. 앞서 공략했던 폭군의 왼쪽 눈. 이미 작지 않은 타격을 입었던 곳인지라 공략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푹, 푹!
주먹으로 폭군의 왼쪽 눈을 파 내려 갔다. 그러자 폭군도 자신의 눈만큼은 공격할 수 없었는지 어쩔 줄 모르며 고통스러워하였다.
물론 비명만 지른 것은 아니고 손바닥으로 내리치거나 손가락을 집어넣는 둥, 어떻게든 호영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호영은 이미 폭군을 상대하는 데 적응한 상태였다. 손가락은 가볍게 피해 주고 폭군이 내지르는 비명은 억지로 참아 내며 우직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 어느덧 그는 폭군의 뇌에 닿을 수 있었다.
“우어어어어어!”
자신의 죽음을 예상한 것일까? 위압적인 고함과 듣기 싫은 비명만 내지르던 폭군이 절망으로 가득 찬 절규를 터뜨렸다.
그에 따라 지반이 흔들리고 땅이 꺼지며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호영은 폭군의 머릿속에 있음에도 바깥의 소란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더 늦어졌다간 현리 부족의 모든 건물이 무너질 수도 있겠군.’
호영은 그 생각을 가지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푸른빛을 띠고 있는, 그의 마력이 가득 담겨 있는 주먹이었다.
콰아아앙!
지금까지는 마력을 최대한 아꼈었다. 폭군의 공격을 피할 때만 간간이 쓰고 반대로 호영이 공격할 때는 아예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랬던 이유야 단순했다. 창을 잃어서 효율적으로 마력을 사용할 수단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마나란 몸속의 근육처럼 자연스럽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아니었다. 권법이나 따로 마나를 사용하는 근접 스킬이 있지 않은 이상, 움직임 하나하나에 마나를 사용하는 것은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가만히 있는 상대를 공격할 때는 상황이 달랐다. 굳이 ‘효율’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까닭이었다.
무식하게 마력을 모아서 내지르면 그것만으로도 최강의 공격이 될 터. 실제로 결과는 그의 생각처럼 되었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폭군의 뇌가 산산조각 난 것이었다. 그에 따라 요동치던 폭군의 움직임도 멎었는데, 폭군의 즉사를 의미하였다.
“휴우.”
연기가 모락모락 나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호영.
정말 위험천만한 전투였다.
분명 폭군을 상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확률이 반반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알고 보니 절반도 채 되지 않았었다.
그만큼 폭군의 전투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대화 능력이라니. 거인이 더 거대해졌을 때는 정말 패닉에 빠질 뻔하였었다.
회귀라는 경험이 없었다면 그렇게 신속한 반응을 보이지도 못했을 것이리라. 호영은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폭군의 몸속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폭군의 몸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폭군의 몸이 본래 5미터에 달하는 체격으로 되돌아갔다. 죽으면 본래의 몸으로 되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어느덧 구덩이로 몰려온 현리 부족의 부족민들. 그들은 호영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동시에 함성을 터뜨렸다.
호영이 주먹을 번쩍 드니 더욱 열광적인 함성이 쏟아졌다.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주변 지형이 엉망으로 변했지만 사람들은 분명 웃고 있었다.
폭군의 죽음.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미소를 짓게 만들었던 것이다.
‘게임은 이제 막 시작되었는데, 벌써 엔딩 찍는 기분이군.’
피식, 속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며 호영도 부족민들과 마찬가지로 승리의 함성을 터뜨렸다.
* * *
“오늘은 오크들이 조용하군. 인간 좀 어떻게 해 달라고 매일같이 소란을 피우더니.”
7미터의 신장을 가진 지배자. 스스로 ‘현군’이라 부르는 거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함을 드러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지배하고 있는 오크들이 꽤나 말썽을 부렸었다. 자신들을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인간들을 어찌해 달라는 이유에서 비롯된 말썽이었다.
물론 말썽이라고 해 봤자 감히 거인의 잠을 방해하거나 귀찮게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공양’하는 시간에 인간의 시체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인 것일 뿐.
아무튼 오늘의 오크는 평소와 달랐다. 어떤 소란도 피우지 않고 조용히 공양만 하고 돌아간 것이었다.
‘오크들이 조용하다면 뭐, 나야 좋지.’
현명한 지배자로서 자신이 다스리는 종족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현군은 오크가 조용하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사실 그로서도 인간을 대하는 것이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오크들이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 이유와 똑같았는데, 인간 그 자체보다는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폭군’이라는 존재가 꺼려졌던 것이다.
폭군! 그는 사실 거인족의 주류 세력에서 갈라져 나온 비주류 세력의 거인이었다.
주류 세력의 거인은 보통 오크 이상의 강인한 종족을 지배하였다. 당연히 나약한 인간 따위를 지배하고 있는 폭군은 비주류에 속한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현군의 입장에서는 제아무리 비주류에 속한 폭군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인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거인에게 있어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을 정도로 궁지에 물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오크에게 명령하여 인간을 공격하게 한다?
‘폭군’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극단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늙어서 힘의 대부분을 잃었다지만 폭군 역시 자랑스러운 거인족의 일원. 그가 극단적으로 나온다면 현군 역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현군은 폭군의 도발을 애써 무시하였다.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오크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그로서도 기분이 나빴지만 궁지에 물린 폭군과 대립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오크들이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으니 현군은 만족스럽게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식사도 끝났으니 편하게 자도 좋을 것 같았다.
#친위대를 창설하다
“폭군을 죽였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부족을 키워 나가야겠어.”
평소처럼 조깅하고 돌아온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늘 새벽, 마침내 폭군을 죽인 호영이었다. 만일 평범한 사람이라면 폭군을 죽였다는 것에 그저 기뻐했겠지만 호영은 벌써부터 다음 할 일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굉장한 워커홀릭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다른 유저들은 무얼 하고 있으려나?’
호영은 그런 궁금증을 가지며 스마트폰을 들었다.
스마트폰을 손에 든 호영은 인터넷에 들어가 익숙한 사이트를 검색했다. 센추리 공식 홈페이지. 그가 유일하게 들락거리는 사이트였다.
‘사람이 더 많아졌군. 이 사이트만 보면 한국 유저도 적지는 않은 것 같아.’
의외로 풍성한 게시물 숫자를 보며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은 자유 게시판의 최상단에 있는 게시물을 클릭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튜토리얼을 깰 이유가 없네요 ㅎㅎㅎㅎ
안녕하세요. 이틀 전, 아바타의 죽음으로 다시 초보자 섬으로 돌아온 간장치킨입니다.
그렇게 서두를 연 글쓴이는 거의 열 줄에 가까이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한탄을 써 내려갔다.
대충 요약하자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나약한 능력을 가진 아바타로 시작했다가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호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글을 읽어 나갔다.
글쓴이는 억울한 심정이겠지만 센추리에서 이런 경험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유저들이 글쓴이보다 못한 처지에서 출발하여 더욱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특히 약소 종족으로서 인간의 세력이 지나치게 약한 1회 차는 사정이 더 열악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글쓴이의 한탄을 시큰둥하게 읽어 냈다. 그리고 마침내 본론을 읽게 되었다.
센추리는 튜토리얼을 깨는 것보다 초보자의 섬에서 노는 것이 훨씬 재미있어요. 이건 경험자의 이야기니까, 튜토리얼 깨려는 사람은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예요. 솔직히 센추리 하는 사람 중에 사서 고생하고 싶은 사람은 없잖아요? 아무리 현실 같은 게임이라도 즐기면서 하는 게 좋죠. 튜토리얼을 깨지 않는다면 게임을 게임같이 즐길 수 있습니다. 적어도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거나 추위에 벌벌 떠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새로 시작하는 분들, 명심하세요. 괜히 살인을 강요하는 튜토리얼을 깰 필요 없어요. 굳이 튜토리얼을 깨지 않아도 이 게임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즐길 수 있으니 말이에요.
-맞는 말 ㅇㅇ. 사이코패스 짓 하면서 깰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님. 나도 온갖 고생 하다가 이건 아닌 듯싶어서 그냥 자살했음. 솔직히 초보자의 섬에서 노는 게 훨씬 재밌음. 애초에 섬이라고 할 만큼 조그만 곳도 아니고.
-하지만 과금 전사가 아니라면 게임을 게임처럼 즐길 수는 없을걸. 딱딱한 빵만 먹으며 살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윗분 말 ㅇㅈ합니다. 센추리는 현질 안 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ㅈ망겜임 ㅉㅉ
-돈 없으면 센추리 하지 마세요. 솔직히 센추리에서 쓰는 돈이 뭐가 아깝습니까? 생전 먹어 본 적 없는 값비싼 요리들을 1만 원 안팎으로 먹을 수 있는데. 이 정도면 개이득이지, 뭐. 거기에다 외국인들도 쉽게 만날 수 있고 ㅋ
리플까지 다 훑어보니, 확실히 그의 생각보다 유저의 숫자가 제법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호영이 회귀하기 전만 해도 주변에 센추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 한국에는 센추리 유저의 숫자가 적은 줄만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낙관적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내용을 종합해 보자면 센추리를 플레이하는 유저들 대부분이 튜토리얼을 깨지 않은 채 초보자의 섬에서만 생활하고 있었다. 튜토리얼을 깨지 않는다면 유저들이 아무리 많아 봤자 크게 의미가 없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 나도 5회 차 때 초보자의 섬에서 제법 즐겼으니까.’
초보자의 섬은 말 그대로 튜토리얼조차 깨지 못한 초보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훈련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주로 몬스터를 사냥하며, 전투 기술을 습득한다.
그런데 웃긴 것은 분명 튜토리얼을 깨기 위해 존재하는 곳인데 너무 재미있어서 사람들이 튜토리얼을 깰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다고나 할까?
먹고, 마시고, 놀고. 초보자의 섬에는 어떠한 제약이 없었다. 현질, 즉 현실의 돈으로 게임 돈을 어느 정도 사 놓으면 정말 마음껏 놀 수 있었다.
10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40평 이상의 넓은 집을 임대할 수 있었고, 10만 원만 충전해도 몇 달 동안 먹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펴도 몸에 해롭지 않았다. 그야말로 현실의 제약 같은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놀고먹는 게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놀고먹는 게 지친다면 자기계발을 해도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