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그때 양옆에서 안과 성이 공격하였다. 호영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 내고는 창을 두 번 내질렀다.
그러자 안과 성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하지만 아직 세 명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한층 더 굳어진 얼굴로 호영에게 달려들었다.
부우웅!
세 방면에서 이루어지는 공격! 그러나 피육이 꿰뚫리는 소리 한번 없이 그저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 들렸다.
지켜보는 전사들 모두가 경악하였다. 몇몇은 비명에 가까운 기함을 내질렀다. 그만큼 호영이 보여 주는 무력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공격하고 있는 세 전사들의 심정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장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은 그들이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속내를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다.
서걱!
그들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공격에 이미 절명했기 때문이다.
“더 덤빌 사람 있나?”
“…….”
“다행이군.”
다행이라고 말하는 호영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였다.
전사들, 심지어 강철의 심복이라 불리는 전사들조차 그런 호영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아는 추장이 아님을 확실하게 깨달은 것이었다.
호영은 자신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는 전사들을 보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사이코패스가 부족 사회를 통치한다면 가장 이상적인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양심과 도덕 그리고 감정 따위가 거세된 사이코패스만큼 야만의 시대에 어울리는 성향은 없으니까.’
실제로 줄루족의 샤카나 고대의 정복자들을 보면 인격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이야 위인으로 추앙받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명백한 사이코패스들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호영은 적어도 1회 차에서만큼은 사이코패스에 버금가는 잔혹한 지도자가 되기로 하였다. 다음 회 차에서도 냉정한 행동을 할 것이지만 1회 차에서는 더욱더 단호하게 행동하리라.
모두가 공포에 떨며 침묵하는 가운데, 초강에게 공격을 당해 중상을 입은 강철이 불현 듯 입을 열었다.
“이럴 것이었으면 처음 봤을 때 나를 죽였어도 되지 않나? 추장의 무력이라면 나의 도움 없이도 제사장과 늙은이들을 죽이는 게 가능했을 것인데.”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면서도 살려 달라느니, 용서해 달라느니 하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물음을 던질 뿐이었다.
그런 강철의 의연한 모습을 보며 호영은 침음을 삼켰다.
‘보면 볼수록 아까운 인재로군. 야망만 아니었어도…….’
마음 같아서는 그를 용서하여 계속 기용하고 싶었다. 이번 혁명에서 느꼈듯이 강철의 능력은 무척이나 출중한 편이었다.
전사로서의 자질도 훌륭하니 이렇게 죽이는 것은 여러모로 손해였다. 하지만 문제는 호영에게 주어진 시간이 단 4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4년이 지나면 1회 차가 끝나고 호영이 사용하던 아바타는 본래 주인의 것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2회 차가 시작될 때까지 남은 시간 동안 호영이 아닌 대준이 강철을 상대해야 할 터.
솔직히 호영은 대준이 그리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육체 능력이야 대단한 수준이라지만 지력은 고작 15다.
더군다나 대준의 성향도 호영의 영향으로 조금 달라지기는 하겠으나 본래의 유순한 성격은 계속 유지될 것이었다.
그 말은 결국, 대준이 강철에게 먹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연하겠지만 그것은 호영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여 기회가 생긴 지금, 단호하게 처벌하였다.
“왜 진작 죽이지 않고 이제야 죽이냐고 물었느냐? 당연한 것을 묻는군.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죽여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 하! 하! 하! 하!”
호영의 말을 듣고선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대소를 짓기 시작한 강철.
“정말 변했다. 믿기지 않을 만큼!”
“할 말이 더 없다면 이만 끝내지. 고통만 길어질 뿐이니까.”
“추장! 변해 줘서 고맙다.”
갑작스러운 감사 인사에 호영은 눈을 찡긋거렸다.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호영의 반응과 상관없이 강철은 말을 이어 나갔다.
“힘만 센 추장은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폭군과 싸우다가 지친 추장을 죽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추장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고맙다, 추장, 변해 줘서.”
“…….”
“현리의 전사들아! 우리의 추장이 돌아왔다! 모두 경배하고 따라라! 나는 흙이 되어서 추장을 따를 것이다!”
“강철…….”
그것은 유언이었다. 부족의 전사들에게 남기는 강철의 유언.
순간 호영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미 한번 대준을 배신한 인물이고 심지어 폭군을 죽일 때 어부지리를 노리려 했던 인물이지만 그의 마지막은 냉철한 호영조차 감동하게 만들었다.
‘죽어서도 나를 따른다니.’
강철의 눈을 감겨 주고 전사들을 진정시킨 이후에도 그의 마지막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실수했는지도 모르겠네.”
야망이 크다는 이유와 일벌백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강철을 처벌하였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후회가 들었다.
꼭 죽였어야 하는가? 죽였어도 4년 뒤에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잠시간 후회와 번뇌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아니, 나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호영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강철은 대준의 자식과 초강의 자식 그 외에 대준을 따르는 전사들을 죽이는 데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를 살려 두었다간 초강이 되었건 다른 전사가 되었건 분란을 일으킬 것이 분명하였다.
무엇보다 이미 끝나 버린 일이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주먹을 강하게 쥔 그는 서둘러 잠을 청했다. 혁명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혁명은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현리 부족을 지배하고 있는 거인.
내일이 바로 그 거인, 폭군을 척결하는 날이었다. 결전의 날을 위해 아바타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폭군을 죽여라
“과연 폭군을 죽일 수 있을까?”
현실로 돌아온 호영은 생수를 마시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거인족. 회귀 전부터 악명이 자자하던 종족이었다. 아마 지금 1회 차를 플레이하고 있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거인 때문에 적지 않게 고초를 겪고 있을 것이었다.
1회 차의 세상은 거인족의 것이었고 따라서 세계 어디에나 거인족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니까. 당연하겠지만 거인족은 호영으로서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바타가 괴물 같은 능력치를 가졌음에도 승리를 확신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호영은 이내 이를 악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인조차 죽이지 못한다면 나는 돌아온 의미가 없다.’
회귀한 이상 최고가 되어야 한다. 같은 유저, 같은 인간 안에서의 최고가 아닌, 모든 종족을 통틀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폭군? 최강의 아바타를 가진 이상,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만약 지금의 아바타로 거인을 이겨 내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거인을 이겨 내지 못하리라.
“다만 현명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어.”
일단은 제사장을 죽임으로써 현리 부족을 아군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건 굉장한 이점이었는데, 만약 제사장이 살아 있었다면 그녀는 폭군의 편에 서서 호영을 적대하였을 것이다.
그 말은 호영이 폭군을 상대할 때, 현리 전사들이 적으로 등장할 것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는 말이었다. 폭군만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웠으니 이는 실로 엄청난 성과였다.
하지만 호영은 폭군의 아군을 제거한 것으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적의 아군을 제거하고 도리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으니 그들을 유용하게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꿀꺽!
다시금 생수를 마신 호영은 여러 작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가장 먼저 화공을 떠올려 보았는데, 안타깝게도 그리 효과적인 작전이 아니었다.
폭군이 자고 있을 때 불을 지펴야 하는데 아무리 잠보에 게으름뱅이 폭군이라 해도 자신의 몸이 불타는 상황에서 계속 잠자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거인족의 재생력을 생각하면 화공으로 얼마나 타격을 입을지도 의문이었고 말이다.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은 수공이었다.
현재 폭군이 집처럼 사용하는 곳은 현리 부족의 목책에서 대략 100미터 정도 떨어진 구덩이였는데 그 구덩이는 동쪽의 강과 제법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폭군의 구덩이에다 강물을 잇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
문제는 현리 부족에게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폭군이 잠에서 깨어난 순간 현리 부족의 상황을 알게 될 터. 제사장이 죽었다는 사실도 분명히 알게 될 것이었다.
즉, 수공을 사용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이었다. 하면 또 무슨 전략이 있을까? 누워 있는 폭군을 흙으로 압사시키는 전략, 큰 바위를 굴러 타격을 주는 전략 등 그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전략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돌창만 주고 거인과 싸우라 하기에는 그들의 무력이 썩 믿음직스럽지 못하였다.
폭군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호영만이 할 수 있는 일. 마력을 갖지 못한 전사들을 정면에 세웠다간 오히려 방해만 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그렇다면 전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뿐이군.’
호영은 소설 하나를 떠올렸다. 거인과 소인이 나오는 소설이었다. 그 소설에서는 소인국 사람들이 자신보다 12배나 거대한 거인을 결박하는 장면이 나왔다. 호영은 바로 거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 소설의 내용대로 한다면 12배는커녕 3배 정도밖에 차이 나지 않는 폭군을 결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소설과 센추리는 많은 것이 달랐다. 소설 속 거인과 달리 센추리의 거인족은 몬스터 이상의 괴물 같은 능력을 가진 종족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의 능력 역시 소설 속보다 훨씬 뛰어난 만큼, 폭군을 ‘방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전사들이 약간의 도움만 준다면, 폭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할 이유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한 호영은 거침없이 캡슐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결착이라는 것을 내야 할 시간. 그는 망설임 없이 폭군에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우우웅.
로그인할 때 나는 특유의 기계음을 들으며 눈을 감고 있던 호영은 익숙한 감각, 코 안을 파고드는 짜릿한 청량감을 느끼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가 다시 눈을 뜨니 익숙지 않은 천장이 보였다. 어제 그가 대준의 몸으로 잠을 청한 ‘추장’의 집이었다.
앞으로 저 천장에 적응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며 상체를 일으킨 호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소란스럽군.”
목재로 만들어진 귀틀집이라 방음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집 밖의 소란이 그대로 들려왔다.
그는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는 나무 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리 부족의 낮 풍경이 훤히 보였다. 마치 판자촌처럼 허름한 나무 집이 얼기설기 모여 있는 부족의 풍경.
하지만 호영의 눈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곳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현리의 부족민들이었다.
현리 부족민들은 저마다 불안한 얼굴을 하며 입을 놀리고 있었는데, 단순히 시끌벅적한 모습이라기보단 공황 상태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모두 조용히 해라! 추장이 나왔다!”
바로 그 순간, 초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렁찬 그의 목소리에 부족민들은 하던 행동을 모두 멈추고 호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초강의 지시를 받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