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였다. 단호한 호영의 손 속! 그 손 속 아래에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추장을 대신하여 부족을 통치하였던 제사장이 죽었다.
그녀의 죽음은 실로 많은 것을 의미하였다.
작게는 지도자의 교체를 의미하였고, 크게는 인간이 거인에게 저항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덜덜!
호영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설마 살해의 충격으로 몸이 떨리는 것일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현실에서야 살해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지만 센추리에서는 무수한 인간을 살상해 본 호영이다.
제사장처럼 60대 할머니를 직접 살해한 적은 없었으나 그렇다 해서 정신적 충격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대준, 네놈이 떨고 있는 것이냐?’
아바타의 진짜 주인이 동요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의 상황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괜찮나, 추장?”
그때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초강이 호영만큼 굳어진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딱딱한 표정이었으나 호영은 알 수 있었다. 초강이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피식.
그의 걱정에 호영은 문뜩 웃음이 나왔다.
아까부터 말도 하지 않고 불퉁한 얼굴을 하던 초강이었는데 호영이 조금 약한 모습을 보이니 언제 삐쳤냐는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마음이 상했어도 호영을 생각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일까.
호영은 초강의 어깨를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다.”
짧은 한마디에 초강도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순박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이제 슬슬 나의 본심을 말해도 될 것 같군.’
아까는 말할 수 없었던 그의 본심. 제사장을 죽임으로써 거사가 절반 이상 끝났다고 할 수 있는 지금이라면 말할 수 있었다.
그는 곧장 초강의 귀에 입을 대며 조용히 말했다.
초강은 그런 호영의 귓속말에 의문 어린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경악하였다.
“헉, 정말이냐?”
“늘 말했지 않느냐,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고.”
“대단하다. 추장이 그런 생각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도 실수하지 않게 조심해라. 가능한 피해를 줄이고 싶으니까.”
“나만 믿어라. 추장 다음으로 강한 전사는 바로 나다.”
자신만만한 그 대답에 호영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선 곧장 귀틀집에서 나왔다.
“으아악!”
“사, 살려 줘!”
제사장을 죽이고 귀틀집에서 나온 호영의 귓가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응징의 철퇴를 맞이하게 된 배신자들의 비명 소리였다.
호영이 제사장을 죽이는 동안 강철을 위시한 전사들도 바쁘게 움직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부족의 장로 즉, ‘늙은이’들의 처리가 끝났을 터.
지금 비명을 지르고 있는 자들은 늙은이들의 가족이거나 제사장의 가족일 것이었다.
그 뒤로 대략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어느덧 비명 소리가 잦아졌다. 마치 부족 전체가 고요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무언가가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끝난 것 같군.”
제사장의 귀틀집 앞으로 속속 모이기 시작하는 전사들. 그들이 이곳에 모인다는 것은 혁명의 끝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전사들의 얼굴에는 환희가 엿보였다.
조용하게 이루어지는 작전이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함성을 내지를 법한 얼굴들이었다.
그런 전사들을 보며 호영은 불쑥 말을 꺼냈다.
“제사장이 죽었다.”
“…….”
“현리 부족의 추장인 내가 제사장을 죽였다!”
그 한마디에 전사들이 잠시 침묵하더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으로 더욱 고요해진 분위기. 하지만 그같은 분위기는 잠시뿐이었다.
“우와아아아아!”
전사들이 열렬한 함성을 내질렀다.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렁찬 함성이었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함성!
사실 호영의 합류로 결과는 애초부터 정해진 것과 다름없다고 볼 수 있었다. 호영의 무력을 막을 만한 존재는 적어도 부족 내에선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사들의 심정은 조금 달랐다.
제사장은 무척이나 신비스러운 인물. 더군다나 거인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 인물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전사들은 제사장이라는 존재에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호영에게는 그저 추악하게 늙은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사들에겐 부족의 어른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것이다.
만약 호영이 나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제사장을 죽이지 못했을 터. 심지어 냉철한 성격의 강철조차 그랬을 거다.
그만큼 제사장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반란을 억제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같은 존재를 호영이 죽였다고 하니 전사들로선 절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승리가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저벅저벅.
그때 호영의 정면에 선 전사들이 좌우로 움직였다. 누군가를 위해 길을 열어 주려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열어 준 틈 사이로 듬직한 체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
사내의 이름은 강철. 전사들의 우두머리이자 이번 거사를 계획한 인물이었다. 그의 등장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함성은 멎었고 전사들은 오직 그와 호영만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정말 대단하다. 추장이 제사장을 죽인다고 했었을 때 믿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크게 감탄하듯 말을 건네는 강철이었다. 그런데 강철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면 의미심장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호영의 암습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는 말처럼 들리지 않은가.
아마 실제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맞을 것이었다.
대준의 성격은 다소 무른 편에 속했고 외할머니인 제사장을 죽이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듣는 입장에서 강철의 말이 기분 좋을 리는 없었다. 호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경고하듯 강철에게 말하였다.
“추장의 말을 의심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니까.”
“……그렇군. 미안하다.”
자신의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는 강철을 보며 호영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속으로 ‘정말 아까운 자야.’라고 생각하며 강철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항은 있었던가?”
“제사장을 따르는 전사들이 저항하였다. 하여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잘했군. 제사장을 따르던 전사들을 굳이 살려 둘 필요는 없지.”
전사라고 다 같은 전사가 아니었다. 현리 부족은 수백의 인구를 가진 부족. 당연히 그 안에는 여러 파벌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강철이 전사들과 함께 척살한 무리는 제사장의 수족과도 같은 전사들이었다. 즉, 호영에게 있어 응징의 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추장, 정말 많이 변했다.”
살짝 당혹해하는 강철. 그가 아는 대준이라면 적대 세력을 숙청했다는 것으로 결코 칭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안타까워했을 터.
제사장을 죽인 것도 그렇지만 강철에게는 참으로 의아하게 느껴지는 대준의 변화였다.
“내가 변해서 두려운가?”
“……아니, 나는 오히려 좋다고 본다. 이전의 추장은 나약하였으니까.”
“나를 배신했던 이유도 내가 나약했기 때문이겠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모르겠지만 추장의 말이 맞다. 이전의 추장은 내가 믿고 따르기에는 많이 부족했었다.”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강철의 성격이라면 대준에게 불만을 가지는 것도 이상할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강한 무력을 가진 대준이지만, 지나치게 따뜻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배신을 용납할 수는 없지.’
갑자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낸 호영.
강철이 의아하게 호영을 바라보다가 이내 경악하였다.
난데없이 자신에게로 달려드는 초강!
현리 부족의 유망주로서 대준만 없었어도 부족 제일의 전사라 불렸을 초강의 급작스러운 공격에 강철은 무방비하게 당하고 말았다.
푹!
“이게 무슨……?”
분노를 표출하기보단 어이없다는 듯,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강철이었다. 그의 복부에는 단창이 꽂혀 있었다.
방금 초강이 꽂은 단창이었다.
“배신자를 용서할 수는 없는 일이지.”
“……!”
호영의 그같은 말에 강철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표정은 제사장이 죽기 직전에 지은 표정과 비슷하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질고 따뜻한 지도자였던 대준이었기에 더욱 믿기 힘든 변화였다. 거사를 도와준 강철을 갑자기 숙청한다니?
강철을 따르는 전사들도 크게 당황해서는 자신의 우두머리가 공격당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안, 해, 성, 황, 병, 준.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제사장의 명령에 따라 우리의 뒤를 악착같이 쫓았던 네놈들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마치 죽음의 사신이 죽음을 선언하는 것 같았다. 호영에게 지명된 강씨 성을 가진 여섯 명의 전사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호영을 바라보았다.
애절한 그들의 눈빛에는 강철에 대한 복수 따위는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살려 달라는 그 절박한 마음만이 눈빛에 담겨 있을 뿐이었다.
하기야 호영은 현리 부족의 추장이었다. 비록 쫓겨났다고는 해도 제사장이 죽은 이상, 호영이 추장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보다 호영의 무력은 고작 여섯이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전사들 모두가 덤벼야지만 겨우 상대할 수 있을 터.
‘물론 그것도 이제는 불가능하겠지만.’
안 그래도 괴물 같은 육체를 가진 아바타인데 이제는 마나에 관련된 스킬까지 가지게 되었다. 마나란 평범한 육체도 한계를 넘게 해 주는 엄청난 힘이었으니 원래도 강했던 사람이 가지게 되면 더욱 무시무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모인 전사들 전부가 덤벼도 호영을 어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우, 우리는 장대처럼 거인의 개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 제사장의 말을 따랐을 뿐이다.”
“맞다. 그리고 우리는 장대와 나머지 전사들을 죽이는 걸 도와주었다. 추장이 우리에게 이러면 안 되는 거다.”
그들이 말하는 장대라는 인물은 대준이 폭군을 척살하려고 나설 때 함께 따라나섰던 전사들 중 한 명이었다.
본래 대준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전사였는데 그는 폭군을 공격하는 결전의 날, 대준을 배신하고 폭군의 편에 섰다.
그 때문에 기습 공격은 무산되었고 폭군과 정면으로 싸우게 되었다. 배신자를 모두 용서했을 대준조차도 그를 ‘응징의 대상’으로 확실하게 구분했을 정도였다.
“장대보다 덜 나쁘다고 해서 배신했다는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지.”
단호한 호영의 말에 여섯 명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제 그들도 살아날 방법이 호영을 죽이는 것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었다.
“용서해 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다!”
“추장이 나쁜 거다!”
역시 부족이 자랑하는 전사들답게 추진력이 남달랐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약속이라도 내린 것처럼 동시에 호영에게 달려든 것이다.
호영은 무덤덤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초강을 향해 손을 들어 보였다. 나서지 말라는 의미가 담긴 손짓이었다.
그러고서는 창을 들어 보였다.
솔직히 여섯을 상대하는 데 무기를 들 필요는 없었지만 진압은 되도록 신속하고 깔끔하게 끝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나머지 전사들이 동요하지 않는다.
부웅!
고개를 살짝 움직임으로써 해의 공격을 피해 낸 호영은 마주 창을 찔렀다. 분명 뒤늦게 공격하였는데도 호영의 뼈창은 이미 해의 목줄을 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