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열 센추리-14화 (14/345)

# 14

호영은 현리 부족을 되찾기로 결심한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현리 부족을 관찰하였다.

힘이 부족할 때는 적의 약점을 공략해야 하는 법.

그가 현리 부족을 매일같이 관찰한 것도 적의 허실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20일이 조금 넘게 지난 지금, 현리 부족의 약점과 폭군의 약점 모두를 파악할 수 있었다.

현재 그가 당당하게 현리 부족 인근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 약점을 이용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아군이라고?”

“저기 오는군.”

그때 목책에서 세 명의 사내가 호영이 있는 언덕을 향해 다가왔다. 모두 초강보다 나이가 있는 사내들로 현리 부족의 주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전사들이었다.

“추장, 늦어서 미안하다.”

“그보다 준비는 다 되었겠지?”

“물론이다. 전사들에게 이야기해 놓았다. 때가 되면 움직일 것이다.”

호영은 흡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동안 현리 부족을 단순히 관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무려 3주가 넘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구경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항상 효율적으로 움직이려 노력하는 호영이기에 현리 부족을 관찰하면서 ‘아군’이 될 만한 자들을 탐색하였다.

그렇게 대략 열흘간의 탐색 끝에 발견한 자들이 바로 눈앞에 있는 전사들이었다.

“설마 이들이 아군이라는 것인가?”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초강이 말하였다. 호영이 고개를 돌려 초강을 바라보니 그는 적대감으로 가득한 눈으로 전사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군이다, 초강.”

“추장, 이놈들은 배신자다. 우리를 공격한 놈들이다. 우리의 새끼들도 이놈들 때문에 죽었다.”

그 말에 전사들의 표정이 급변하였다.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자, 마주 분노하는 자, 그리고 태연하게 호영을 바라보는 자.

호영은 태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강철’이라는 이름의 전사를 눈여겨보고는 내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전사들을 아래쪽에 두고 와서 다행이군. 그들까지 있었다면 말릴 틈새도 없이 싸움이 벌어졌겠어.’

애초에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초강만 데려온 것이지만 초강의 분노를 보니 조금은 착잡한 기분이었다.

“초강, 나는 분명히 말했다. 이들은 우리의 아군이라고.”

“…….”

“너만은 나의 말을 거역하지 않기를 바란다, 초강.”

“……알았다. 추장의 말에 따르겠다.”

이를 악물며 대답하는 초강.

이해가 가지 않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호영의 말이니까 억지로 따라 준다는 모습이었다.

그런 초강을 보며 호영은 씁쓸한 얼굴을 하였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의 뜻을 이해시켜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대업을 망치고 말 것이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너도 나의 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니.’

호영은 다시 표정을 굳힌 채 강철을 바라보았다. 강철은 현재 호영을 대신하여 전사들의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당연하겠지만 초강의 반응을 보고서 그가 마음을 바꾼다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이번 거사에서 강철이 중대한 역할을 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강철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해야 할 만만 할 뿐이었다.

“어두워지면 와라. 추장만 온다면 늙은이들을 죽이는 데 실패할 이유가 없다.”

그 말에 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게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폭군을 제거하고 부족을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호영은 부족으로 되돌아가는 강철의 뒷모습을 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 * *

2시간 뒤, 마침내 해가 지자 호영은 예정대로 움직였다. 여자들을 지킬 두 명의 전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전사들과 함께 현리 부족으로 향한 것이다.

‘솔직히 이들의 도움은 크게 필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함께할 필요가 있지. 어쨌든 이들은 나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존재들이니까.’

대준을 따라 폭군에게 대항했을 정도로 대준에게 충성적인 전사들이었다. 비록 나이가 어린 터라 전투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다 해서 데리고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번 거사는 향후 부족의 미래를 결정짓는 일대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휘이이이이.”

목책에 도착하자 호영은 휘파람을 불렀다. 일종의 접선 신호라고 볼 수 있었는데, 의외로 반응이 신속하였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추장, 넘어와라.”

“알겠다.”

전사의 목소리에 호영은 2.5미터 정도의 목책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초강을 비롯한 나머지 전사들도 호영처럼 쉽게는 아니지만 서로를 도와 가며 목책을 넘어왔다.

모두가 목책 내부로 건너오는 데 성공하자 호영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현리 부족의 전사들을 바라보았다. 현리의 전사들은 돌창 따위를 든 채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폭군은?”

선두에 우뚝 서 있는 사내, 강철을 향해 호영이 물었다. 그의 물음은 이번 거사에서 성공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혁명의 끝은 폭군을 제거하는 데 있는 바, 폭군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무척이나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구덩이에서 잠자고 있다.”

다행히도 게으른 거인은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구덩이라 불리는 거대한 호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아마 상황이 끝날 때까지 계속 잠만 잘 것이었다. 호영이 관찰하기로 폭군이 깨어 있는 시간은 하루 1시간도 채 안 되었으니까.

“늙은이들은?”

“자고 있다.”

마침내 이번 거사에서 최우선적으로 척살해야 할 대상자들까지 확인을 끝마치자 호영은 나직하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곧바로 시작하지.”

나직하기만 한 그 말에 전사들의 가슴속에서는 격정의 파도가 일렁거렸다. 모두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란!

그들이 하려는 것은 일종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부족의 진짜 지도자는 호영이기에 반란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지만 전사들의 마음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준이 부족을 통치했을 때부터 속칭, 늙은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영향력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늙은이들의 우두머리는 대준의 외할머니이기도 한 부족의 제사장이었다. 그녀는 거인을 신으로 모시는 제사장으로서, 부족에 거인이 등장하자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인물이기도 하였다.

당연하겠지만 거인의 지배를 받는 현리 부족에서 거인을 숭배하는 제사장의 권력이 낮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대준이 거인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부족에서 쫓겨난 이후 그녀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의 그녀는 부족민 전체가 인정하는 부족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대준은 힘이 있었으면서도 단지 자신의 할머니라는 이유로 그녀를 죽이지 못했었지. 멍청하게 거인한테 정면에서 승부하다가 도망치는 처지가 되었고 말이야.’

하지만 호영은 다르다. 그는 오늘, 제사장을 죽이고 배신자들을 응징할 것이다. 그 이후에는 폭군을 죽일 것이고 말이다.

“가자!”

거창한 함성 소리는 없었다. 다만 평소보다 훨씬 힘찬 발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렇게 호영은 혁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부족 중심부로 향하였다.

물론 강철을 위시한 몇몇 전사들은 중간에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모든 배신자들이 중심부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었고 일거에 잡아들이려면 이처럼 흩어져서 공략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내 호영은 부족의 중심부에 있는 제사장의 귀틀집에 도착하였다.

쾅!

이곳까지 와서 예의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호영은 다짜고짜 문을 부수고 귀틀집 안으로 들어섰다.

모두가 신성하게 여기는 제사장의 집. 그 안을 강제로 들어선 호영은 거리낌 없이 그녀를 불렀다.

“할멈.”

“……대준이냐?”

잠에서 막 깨어난 탓인지 목소리가 척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만 그럴 뿐, 마치 그녀는 호영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역시 추장을 대신하여 부족을 통치하는 여장부답게 범상치 않았다. 물론 그래 봤자 오늘 죽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네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철 그놈이 결국 일을 저질렀다는 뜻이구나. 내 그리 말했거늘.”

“강철이 아니더라도 나는 왔을 것이다.”

“왜지? 너라면 부족을 떠나서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

“현리가 내 것인데 왜 내가 떠나야 하지? 애초에 부족을 떠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어. 당신이 이 부족을 망친 셈이지. 그러니 나는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것이다.”

그 말에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철없는 아이의 행동이 답답해 죽겠다는 그런 한숨 같았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니. 성장한 게 없구나.”

“할멈이야말로 달라진 게 없어. 예나 지금이나 할멈은 부족에 도움이 안 돼.”

“하면 나를 죽이기라도 할 생각이냐?”

“할멈을 죽일 게 아니라면 부족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호영의 단호한 대답에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는 강철이 일을 저지를 것은 예상했어도 호영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지금 이곳에 온 것도 일종의 포로나 인질로 삼으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했을 터.

진짜 대준이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대준이 그녀를 죽인다는 것은 부족의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안타깝게도 대준이 아니었다.

사내의 정체는 호영. 그리고 그녀와 조손 관계인 대준과 달리 호영에게 있어 눈앞의 노인은 동족을 배신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는 추악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사정이 있었겠지. 애초에 평생 동안 거인을 숭배하고 살아온 늙은이가 반항 같은 것을 생각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의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잖아?’

동족을 배신하고 추장을 부족에서 쫓아낸 죄, 호영이 대신 벌해 줄 것이었다.

그런 호영의 기세를 느낀 것일까? 제사장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죽인다면 폭군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그런데도 죽이겠다는 것이냐?”

“어차피 폭군도 죽일 생각이었다. 폭군이 움직이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지.”

“그게 가능하다고 보느냐? 설령 폭군을 죽일 수 있다고 해도 다른 거인의 습격은 어떻게 막으려는 것이냐? 대준아, 아직 늦지 않았다. 폭군이 눈치채기 전에, 조용히 물러나라. 그렇지 않으면 부족이 너로 인해 멸망할 수 있어!”

어떻게든 호영을 설득하려는 그녀. 정말 부족의 미래를 걱정하여 하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을 피하기 위한 기만인지 호영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이 어떻건 크게 의미는 없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서 죽어야 했다. 그녀가 죽는 것이 호영에게 ‘이득’이었으니까.

“더 이상 들어 줄 필요가 없을 것 같군.”

나직하였지만 호영의 목소리에는 지독히 시린 냉기가 서려 있었다. 제사장은 그런 호영의 목소리에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대준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준은 ‘자기 사람’에게만큼은 언제나 관대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배신당했을 때조차 말이다.

눈을 크게 뜬 그녀는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호영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였다. 아마 대준의 정체, 즉 호영의 정체에 대해 물으려는 것이었을 터.

“너, 너는 대준이 아닌……?”

푸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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