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그런데 지금 현리 부족은 그러한 오크족을 향해 공격하려는 모양새였다. 수백의 전사들도 아닌 고작 서른 안팎으로 보이는 전사들로 말이다.
호영은 표정을 굳히며 전사들을 따라갔다.
저벅저벅!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리 부족의 전사들이 향하는 곳은 오크족의 영역이 확실해 보였다.
맵 기능을 살피니 이미 오크족의 영역으로 들어선 상태. 현리 부족의 전사들도 그 사실을 아는지 보폭을 줄이며 은밀하게 움직였다.
‘도대체 오크족의 영역에 들어온 이유가 뭐지? 이곳에서 무엇을 얻겠다고.’
차라리 전면적인 전쟁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북쪽으로 향한 전사들의 숫자는 고작 서른에 불과하였다. 나머지는 식량을 모으려는 의도인지 다른 방향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쟁도 아니고 식량을 모으겠다는 것도 아니라면……. 설마 오크족과 협상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그렇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외교적인 이유는 절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호영이 알기로 1회 차의 오크는 호전성과 야만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안 그래도 야만성이 남다른 오크인데 1회 차의 보잘것없는 세력을 가진 인간과 대화를 할 것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하면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호영은 정보가 없어 답답함을 느꼈지만 일단 묵묵히 전사들의 뒤를 미행하였다.
원래라면 현리 부족의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살펴야 했겠지만 왠지 호영은 전사들의 행동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호영은 어느덧 오크족의 영역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 근처에 오크 부락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크족의 행동반경은 무지막지하게 넓은 편이었고, 이곳이 오크족의 영역 깊숙한 곳이라고 하지만 인간들에게나 깊숙한 곳일 따름이었다.
다만 오크족이 마치 영역 표시를 하듯 계속 돌아다니는 것은 사실이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호영은 더욱 은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나타나는군.’
그때였다. 현리 부족 전사들이 땅에 엎드리는 동시에 호영의 시야로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초록색의 피부를 가진 무리.
바로 오크족이었다.
“취익! 취이익!”
“취이익.”
여섯 마리의 오크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도 없었고 자신들끼리 웃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참으로 경계심 없는 모습들이었지만 그만큼 이 근방이 확고한 오크족의 영역임을 의미하였다.
“지금이다. 모두 공격!”
넙죽 엎드린 채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던 현리 전사들이 오크가 근처까지 다가오자 그제야 벌떡 일어서며 공격을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창을 던졌고 그 뒤로는 무작정 달려들었다. 만약 오크가 아닌 조금 더 이성이 강한 종족이라면 서른 명의 인간을 본 순간 도망쳤겠지만 상대는 오크였다.
그들은 자신을 공격한 인간들을 향해 똑같이 달려들었다. 전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른 명 대 여섯 마리.
압도적인 결과가 나와야 정상이었지만 전투는 생각보다 치열했다. 당장 죽는 사람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오크에게 치명타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장기전이 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전사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이었고 오크보다 영악하였다.
한 마리의 오크를 다섯 명이서 상대하면서도 결코 섣부르게 행동하지 않았다. 오크에게 공격당한 전사는 곧장 뒤로 빠졌고 그 틈에 다른 전사들이 오크의 사각에서 공격하였다.
오크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팔이 두 개인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인간의 체력이 다하기 전에 오크들은 하나둘 싸늘한 주검이 되어 버렸다.
‘생각보다 잘 싸우는데? 돌창 따위로 어떻게 오크를 죽이나 싶었더니.’
전투를 지켜보던 호영은 제법 감탄하였다.
솔직히 전사들을 무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외로 전투는 압승으로 끝이 났다.
그의 생각보다 전사들은 지능적이고 영악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득이 없을 텐데.’
아무리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두 명이 죽었고 또 네 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중에서 한 명은 목숨이 위급한 상황.
만약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면 숭고한 희생이라 부를 수 있겠지만 호영은 그저 의문이었다. 오크 여섯 마리 잡는다고 어떤 이득이 있을까?
물론 마정석을 얻을 수는 있을 것이다. 고블린처럼 오크도 어느 정도 마나의 축복을 받은 종족이었고 평균적으로 고블린 이상의 마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호영이 초강이나 다른 전사들의 반응을 보았을 때, 마정석은 부족에서 그리 유용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부족의 늙은이들이나 욕심을 가지는 돌멩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세 명 이상의 전사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오크의 사체를 취하는 이유가 뭘까?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을 해결할 기회가 찾아왔다. 현리 부족의 전사들은 오크들의 사체를 짊어지고 부족으로 되돌아갔는데, 중상자 한 명이 두 사체와 함께 버려진 것이었다.
저벅저벅.
호영은 더 이상 몸을 숨기지 않고 중상을 입은 전사를 향해 다가갔다. 기절한 것인지 아니면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전사는 호영의 등장에도 어떠한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렇게 동료를 버리고 가도 되는 것인가.”
전사를 내려다보며 호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물론 호영이라고 해서 ‘매정하다.’느니, ‘동료애가 없다.’느니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인간이 공격했다는 증거를 버젓이 남겨 두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사체와 부상자를 대우하지는 않더라도 증거는 남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호영의 혼잣말을 들은 것인지 사경을 헤매던 전사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더니 말을 더듬거리며 호영에게 말했다.
“추, 추장?”
“살아 있었군.”
“정말 추장인가?”
가슴 부위에 긴 혈흔이 새겨진 전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호영을 올려다보았다. 현리 부족의 추장, 대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던 그의 등장은 죽어 가던 전사조차 경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면? 나 말고 추장이 또 있는가?”
그 말에 전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호영은 전사가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죄책감과 후회. 전사는 바로 그 감정들을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호영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전사는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였다.
“……추장. 미,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갑자기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이지?”
“추장을…… 따랐어야 했다. 늙은이들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었다.”
난데없는 사과. 그러나 호영은 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준의 입장에서 전사는 증오스러운 배신자일지 모르지만 호영에겐 아니었다. 호영에게는 그저 죽어 가는 전사일 뿐이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호영이 배신자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감정적인 이유가 아닌 이성적인 이유로 복수를 하리라.
하지만 눈앞의 전사에게 복수는 무의미하였다. 이미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에 이르렀으니까.
“폭군이 무슨 짓을 했나 보군.”
“……오크를 잡아 오라 했다. 다른 사냥감은 받아 주지 않고서 오직 오크만…….”
호영은 그제야 현리 부족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리하게 오크족을 공격한 것. 그것은 부족을 위해서가 아닌, ‘공양’을 위해서였다.
“부족 사람들은 아직도 폭군의 지배에 순응하는가?”
“추장이 없는데 어찌 폭군에 저항할 수 있나? 우리는 그저 따를 수밖에 없다.”
“한심하군.”
혀를 차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전사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호영의 말에 기분이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는 것 같았다.
“추장이 한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용맹한 전사가 아니다. 추장의 말에 따르지 않았을 때부터, 우리는 잘못된 길을 걸었다. 추장은 우리를 용서하지 마라.”
두서없는 전사의 말. 사내는 ‘우리는 더 이상 용맹하지 않다.’, ‘우리는 더 이상 전사가 아니다.’ 그 말만 반복하더니 결국 숨이 끊어졌다.
호영은 전사의 눈을 감겨 주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현리 부족 전체가 배신자 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들에게도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이다.
‘과연 그들을 한심하다고만 평가할 수 있을까. 무려 거인을 상대하는 일이야. 마나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수백 년 뒤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지.’
재해! 인간에게 있어 거인족이란 재해와 같았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재해 말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현리 부족을 비난하기보단 거인에 맞서 싸운 대준의 용기에 감탄하였다. 마나도 가지지 못한 자가 거인에게 맞서 싸웠다니.
불끈. 호영은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폭군, 그 거인 놈을 죽여야 할 것 같았다. 솔직히 지금도 막막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대준조차 그랬지 않은가. 호영이라고 못할 것이 없었다.
“이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과거로 돌아온 의미가 없다.”
생각해 보면 이까짓 절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귀 전에 그가 겪었던 절망은 빛 한 줄기 없는 칠흑과도 같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에 비교하자면 폭군이라는 거인을 상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위기를 극복하고 마리라.
‘다행인 것은 전사들이 폭군에게 불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야.’
만약 전사들이 폭군에게 완전히 충성한다면 호영에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때는 정말 다른 인간 세력을 찾는 게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아바타의 기록에서도 다른 인간 세력에 대한 정보는 아주 사소한 것밖에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인간 세력이 현리 부족만 있는 것은 절대 아닐 테니까.
강만 건너도 인간 세력은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영은 폭군의 빈틈을 발견했고 그 빈틈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그 빈틈이란 다름 아닌, 전사들의 변심이었다. 일지에 적혀 있는 내용대로라면 전사들은 폭군에게 충성적일 테지만 오늘 직접 확인해 본 바로는 그렇지 않아 보였다.
눈앞의 전사도 말했지 않았던가. 식인을 하며 오크와의 무리한 싸움을 강제하는 지배자인 줄 알았다면 결코 대준을 배신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전사들을 나의 편으로 세울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폭군을 죽일 수 있다.’
속으로 그같은 생각을 한 호영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현리 부족을 관찰하였다.
“폭군은 지독할 정도로 잠이 많군. 원래 거인족이 다 이랬던가? 거의 하루 종일 자는 것 같은데.”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관찰하자 현리 부족은 몰라도 폭군의 약점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폭군의 약점은 바로 수면이었다.
현리 부족을 관찰할 때마다 자신의 집(거대한 구덩이)에서 잠만 자는 폭군. 깨어 있는 시간은 하루에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니라고 볼 수 있었지만 호영으로선 아주 의미 있는 발견이었다.
#부족 탈환
센추리가 출시된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스마트폰을 확인하니 센추리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호영은 그 반응들을 보며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네. 역시 회귀는 나 혼자 했거나 소수가 했다는 것이 확실한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