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부족 사회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여자들은 항상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동굴에서 그녀들이 노동할 거리가 있을 리 없었고 그렇다 해서 사냥에 가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자들에게 시킬 일을 따로 만들어야 하나?’
호영은 그녀들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그런 생각을 가졌다. 그 역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는 말에 크게 동의하는 사람이었다.
현대인으로서 여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이곳은 엄연히 다른 세계였다. 현실에서나 통용되는 관념을 센추리에 끌고 올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먹어라. 배를 가득 채워도 좋다.”
하지만 우선 그녀들에게 고기를 내주었다. 당연히 동정에서 비롯된 행위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필요가 있기에 하는 행동이었다.
‘이들 중엔 대준의 아이를 낳을 여인도 분명 있을 것이다.’
센추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성장이 아니었다. 물론 대준처럼 강인한 육체로 성장시킨다면 그것으로도 나쁘지 않을 것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세력을 만들고 그 세력을 계속해서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1회 차가 끝나면 2회 차가 시작되기 전까지 센추리 안에서는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게 된다. 지금 호영이 사용하고 있는 대준이라는 아바타도 그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 자연스럽게 사라질 터.
그렇기에 ‘자식’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2회 차의 플레이는 대준의 손자 또는 증손자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저, 정말 먹어도 되나?”
“추장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고, 고맙다!”
그녀들은 호영의 말에 크게 기뻐하며 늑대고기를 먹었다. 전사들의 무덤덤한 시선에 기가 죽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지만 먹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호영도 그녀들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시작하였다. 솔직히 그에게 있어 그리 만족스러운 식사는 아니었다.
그나마 익혀 먹으니 억지로 넘어가기는 하지만 식감이 퍽퍽하고 질긴 것이 현실의 고기와는 비교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결국 고기를 잠시 내려놓은 호영은 ‘행동 설정’이라는 기능을 눌러서는 로그아웃 이후, 대준이 해야 할 행동들을 설정하였다.
‘우선 고기를 배 터지게 먹게 한 다음, 근력 운동을 시키고 재워야겠다. 아, 자기 전에 암컷들이랑 될 수 있으면 같이 자게 해야겠군.’
이 ‘행동 설정’이라는 기능은 사람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기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종의 매크로라고 할 수 있는 기능이었다.
직장에 다니거나 학교에 다니는 유저들은 필연적으로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행동 설정’이라는 기능은 그 부족한 시간을 만회하게 해 주었다.
물론 호영처럼 오직 센추리만 하고 사는 사람에게도 행동 설정은 필요하였다. 사람인 이상 밥은 먹어야 했고 잠도 자야 했기 때문이다.
‘대준의 지능이 더 높았다면 더 다양한 행동을 설정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아무튼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
로그아웃을 하니 어느덧 새벽이 되어 하루가 완전히 바뀌었다. 호영은 요구르트를 마시며 쓴웃음을 지었다.
“벌써부터 시간관념이 사라지는 것 같네.”
센추리가 정식으로 출시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시간이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1:4라는 시간 비율. 그것이 괴리감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시간의 괴리감도 괴리감이지만 육체적 괴리감도 작지 않아.’
방금까지만 해도 괴물 같은 육체를 소유하고 있던 호영이다. 그런데 지금의 호영은 조금 단련되었을 뿐인 평범한 육체를 움직이고 있었다.
이질감은 결코 작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 괴리감과 이질감 때문에 센추리를 플레이 하면서도 ‘초보자의 섬’에서만 활동하는 유저들이 많았다.
아니, 센추리를 하는 대부분의 유저들이 줄곧 초보자의 섬에서 활동한다. 그곳은 비록 명예와 부가 따르지는 않지만 게임을 게임처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쓴웃음을 지은 호영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는 다짐하듯 말하였다.
“더 강해져야겠어.”
오늘만 해도 운동에 투자한 시간이 4시간이나 되는 호영이지만 그는 만족을 몰랐다. 회귀하기 전에는 그저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만 만족하였다면 이제는 한계를 두지 않고 정진할 생각이었다.
이러한 호영의 다짐은 새벽의 추위도 이겨 내게 만들어 주었다. 호영은 곧장 조깅을 시작하였고 땀을 흘리며 1월의 매서운 추위를 굴복시켰다.
* * *
최진수는 계속해서 울리고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면 알 법도 한데, 아직까지 전화질이네. 참 귀찮은 년이야.”
이소희.
그에게 전화를 건 여자는 유학을 가기 전, 한국에서 잠시 사귀었던 이소희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일종의 CC였는데, 사실 그는 그렇게 진지한 마음으로 사귄 것은 아니었었다.
유학 가기 전, 마치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거라고 변명하기는 했지만 그조차도 사실 장난에 가까운 말이었다.
직설적으로 말해서 최진수는 그녀가 질릴 대로 질린 상태였다. 그저 과거의 추억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하게 이소희보다 그놈이 더 기억에 남는군. 참 웃기는 놈이었는데 말이야.’
최진수는 자신의 대학 동기이자 일종의 연적 관계였던 한 사내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송호영. 그가 다니던 대학에서 꽤나 알아주던 인물이었다. 선후배, 교수 가릴 것 없이 모든 이들과 원만한 관계를 가졌고 학교에서 퀸카라 불리던 이소희와도 사귀었었다.
또한 다재다능하여 운동이건 PC 게임이건 못하는 것이 없었다. 어찌나 잘나가는지, 재벌가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최진수조차도 질투하고 시기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처음에는 나름대로 친구처럼 지냈었다. 송호영의 성격 자체가 워낙 원만했기 때문에 최진수 특유의 고압적인 태도를 크게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최진수는 송호영을 대할 때 친구를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부하를 대하는 것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송호영이 웃으며 자제를 요구하였지만 최진수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둘은 머지않아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같은 불화는 한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최진수가 송호영의 여인을 빼앗아 간 사건이었다.
이소희!
송호영의 연인이었던 그녀는 갑자기 송호영에게 결별을 선언하며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최진수의 여인이 되었다.
당연하겠지만 송호영으로선 자신의 연인을 최진수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둘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하였고, 최진수는 해외 유학을, 송호영은 자퇴를 함으로써 그 관계는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놈, 게임도 제법 잘하던데 센추리는 해 봤으려나?’
최진수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학에서 자퇴한 뒤로 요식업에 전전하며 같잖은 삶을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비웃음만 나왔었다.
신분에 어울리는 직업을 가졌다고 조소를 지었던 것이다. 하지만 만약 송호영이 센추리를 시작한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송호영, 그는 최진수에게 있어 질투를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던 사내였다. 재능이라는 것을 가졌고, 그 재능은 분명 센추리에서도 유용하게 쓰일 만한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만약 송호영이 센추리를 시작한다면 최진수는 어쩌면 그에게 뒤처질 수도 있었다.
“다른 것은 참아도 그것만큼은 참지 못하지.”
한국에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북미에서는 크게 흥행할 게임이 센추리였다. 이미 미국에서 사귄 친구들을 통해 해외의 반응을 들었던 최진수이기에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굳이 해외의 반응을 볼 필요도 없었다. 그가 직접 경험한 센추리라는 게임. 비록 초보자의 섬에 갇혀 있는 상태였으나 초보자의 섬에서 느꼈던 재미만으로도 이미 그 어떤 것보다 짜릿했다.
게임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최진수에게조차 이런 재미를 느끼게 하였으니 센추리가 머지않아 세계적으로 크게 흥행하리라고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만약 안전성에 대한 논란만 완전히 해결된다면 센추리는 인터넷 이상의 파급효과를 가져다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걱정할 필요 없겠어. 나중이 되면 가격이 낮아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흙수저가 사기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니까.’
인상을 찌푸리던 최진수는 기기의 가격을 생각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족히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기기였다. 더군다나 북미와 유럽에서만 기기를 판매하고 있었기에 한국에서는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해외 직구라는 것이 있지만 그것도 쉬운 것은 아니니까.
아무튼 송호영처럼 빈곤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할 만한 게임은 절대 아니리라.
최진수는 미소를 지은 채 캡슐 안으로 들어섰다.
* * *
평소처럼 2시간의 수면을 끝마친 호영은 기상하자마자 센추리에 접속하였다. 고작 2시간밖에 자지 않았으니 피로가 풀리기는커녕 더 피곤할 법도 하였지만 그의 눈빛은 선명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호영은 평소 ‘하루에 2시간씩 네 번 숙면’이라는 특이한 방식으로 숙면을 해결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몇 년 뒤에 센추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익히게 된 숙면 방식이지만 회귀한 이후에는 곧장 이같은 수면법을 사용하였다.
덕분에 고작 2시간 만의 수면으로도 그는 본래의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무튼 센추리에 접속한 그는 곧바로 대준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하지만 따로 확인할 것도 없었다. 시야가 암흑 천지인 것만 봐도 대준의 현재 상황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자고 있었나? 마나를 감지하느라고 무리했다고는 해도 잠이 지나칠 정도로 많군.’
지금으로선 나쁘지 않은 일이었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잠이 많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잠이 많다는 것은 결국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대준의 육체와 동기화하였다.
그로부터 대략 10초 정도가 흘렀을까? 세상 모르고 잠을 자던 대준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추장, 이제 일어나나?”
“일어났으면 우리 그거 하자.”
대준, 아니 호영은 자리에서 일어나기 무섭게 들이대는 두 여자를 보고 흠칫하였다. 대준의 기준으로 보면 미인이겠지만 그의 기준으로는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여인들이었다.
실제 나이는 어릴 것이 분명한데도 30대는 가볍게 넘어 보이는 노안에, 까무잡잡한 피부까지. 그는 속으로 ‘아이를 만드는 것은 앞으로 대준이 담당해야겠어.’라고 중얼거리며 두 여자에게 말했다.
“안 된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추장이 지금 안 된다고 했나?”
“헉! 내가 아는 추장이 아니다. 추장, 무언가에 당한 것이 틀림없다.”
두 여자는 호영의 거절에 크게 경악하였다. 장난치듯 경악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경악하는 얼굴들이었다.
‘얼마나 방탕하게 생활했으면…….’
물론 원시 시대에서 할 수 있을 만한 유희가 그것밖에 없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호영으로선 괜히 민망한 기분이었다.
자신보다 나이도 어린 주제에 벌써 몇 명의 여자와 몸을 섞은 것인지……. 만약 그 여자들이 미인이었다면 진심으로 부러워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지금 당장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니까.”
“그게 더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