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한 번도 최초의 특전을 받아 본 적이 없는 호영이기에 상당히 기대하고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방해를 받으니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최초의 특전을 누군가에게 뺏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압도적으로 처리해야겠어.’
수많은 고블린을 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딱히 불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급할 뿐이었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 고블린이란 언제든지 학살할 수 있는 나약한 종족에 불과하였다. 비록 그 영악함은 짜증이 날 정도였지만 지금처럼 단순히 치고받는 전투라면 무서울 게 없었다.
“하압!”
‘케륵’거리며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던 고블린들. 어떻게 동굴을 찾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호영은 속으로 다짐하였다. 제 발로 동굴을 찾아온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다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부우웅! 우지직!
그가 휘두르는 뼈창에선 경악스러운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의 결과는 훨씬 더 경악스러웠다. 고블린의 머리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박살 났고 측면에서 공격했던 고블린들도 영문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압도적인 무력! 고블린들은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재빠른 편에 속하는 고블린인데 오히려 호영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였다. 그저 일방적으로 죽어 나갈 뿐이었다.
물론 호영도 가끔씩은 고블린 특유의 변칙적인 움직임 때문에 공격을 허용한 적이 있었지만 크게 의미는 없었다. 근력이 80을 넘긴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힘이 세다는 뜻이 아니었다.
비록 상태 창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근력이라는 능력치 안에는 방어력이나 충격 흡수 같은 능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상태 창이 아닌 스킬 창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80이 넘는 근력을 가졌다면 그 육체는 바위보다 단단한 셈이었다.
고블린의 공격? 부상을 입은 곳에 타격을 주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제 입었던 부상들은 고작 하루 만에 거의 다 회복되었고 말이다.
솔직히 호영으로선 창을 쓸 필요조차 없을 정도였다. 그냥 주먹만 휘둘러도 고블린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키리릭! 케켈.”
그때 고블린들의 움직임에 변화가 생겼다. 마구잡이로 호영에게 달려들던 고블린들이 이제는 움직임을 바꿔 호영의 뒤에 있는 전사들을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호영을 어찌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니 호영의 동료라도 죽이겠다는 그런 생각인 것 같았다.
“쯧! 그냥 도망치면 좋았을 것을.”
예상과 다른 고블린들의 움직임에 호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더욱 앞으로 나섰다. 뒤가 걱정되기는 하였지만 고블린의 영악함을 생각하면 약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가능한 한 피해야 할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입구가 비좁은 탓에 숫자의 우위를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더군다나 대준만큼은 아니지만 능력치가 무척이나 뛰어난 초강도 있으니 고블린을 막기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았다.
“케에에엑……!”
“죽어라.”
푸욱!
전사들이 의외로 선전하는 사이, 호영은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뛰어난 창술 실력을 이용하여 고블린의 방벽을 뚫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키 큰 고블린을 죽이는 데 성공하였다.
전투가 시작된 지 고작 5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우두머리의 죽음 때문일까? 고블린들의 기세가 바뀌더니 갑자기 쏜살같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보여 주었던 용맹한 모습이 마치 거짓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호영은 어제처럼 고블린의 도주를 허락하지 않았다.
“모두 쫓아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어제야 전사들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산속에서 방황하던 처지였기에 감히 추격전을 시도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이었으나 전사들의 부상이 꽤나 회복되었고 동굴이라는 은신처도 얻은 상태였다.
그러니 이참에 앞으로의 동굴 생활에 방해가 될 고블린을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호영은 악을 쓰며 도망치는 고블린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였다.
조그만 체구로 잽싸게 도망치는 고블린들이지만 호영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추격전에서 살아남은 고블린의 숫자는 고작 여섯 마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 여섯 마리도 결코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이 아니었다.
‘이곳이 고블린의 본거지로군.’
민첩 수치 65에 체력 수치가 79인 호영이다. 아니, 컨디션이 회복되었기 때문인지 79였던 체력이 80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야말로 전율적인 체력이 아닐 수 없었는데, 평범한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떨어지는 고블린 따위가 이런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가진 호영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섯 마리의 고블린. 그들은 도망친 게 아니라 미끼가 된 것이었다. 고블린 부락 전체를 낚아채 줄 미끼 말이다.
“추장, 바로 공격하나?”
고블린을 쫓아온 것은 호영 혼자만이 아니었다. 호영이 중간에 명령하여 모든 전사들을 동굴로 복귀시켰지만 단 한 전사만은 호영의 곁을 지켰다.
가장 듬직한 체구를 가진 초강이라는 이름의 전사였다. 그는 호영만큼은 아니지만 규격 외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다.
수치로 따지면 평균적으로 30~40은 될 것 같았는데, 아무리 1회 차라도 실로 대단한 능력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가 호영의 곁을 따라올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런 능력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니, 지금은 지켜본다.”
“지켜본다?”
초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
하기야 방금 전에 보았던 호영의 무력이라면 단신으로 고블린의 부락을 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고블린의 부락은 결코 그 크기가 작지 않았지만 이미 쉰 마리가 넘는 고블린이 제거된 상황이다. 지금 부락에 남아 있는 고블린의 숫자는 많아 봤자 육십 정도에 불과할 터. 그런데도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있을까?
“잠시만 기다리면 너도 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여전히 의문 어린 표정을 짓는 초강이었지만 호영은 마땅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고블린 부락을 지켜볼 뿐이었다.
10분, 20분. 그리고 30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무척이나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호영처럼 해야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는 특히나 말이다.
하지만 호영이 지금 해야 할 일보다 고블린 부락의 행동에 대응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였다. 아니, 애초에 그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외부의 위협이 사라져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초조해하지 않고 묵묵히 고블린의 행동을 주시하였다. 30분을 넘겨 기어코 1시간가량을 기다린 호영. 마침내 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자, 고블린 부락으로.”
사실 그가 생각했던 반응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호영이 생각했던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고블린 부락이 단체로 도주하거나, 아니면 다시 한 번 공격을 준비하거나.
몬스터의 습성을 생각하면 재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지만 고블린의 영악함을 생각하면 복수를 포기하고 아예 도망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여 호영은 두 가지 모두를 가정하였다. 그런데 의사 결정이 신속한 편에 속하는 고블린이 1시간 넘게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사실을 의미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내가 가장 원하는 반응이라 할 수 있어. 지금까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항복을 생각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으니까.’
호영으로선 고블린이 다시 쳐들어오는 것과 아예 도망치는 것, 둘 다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니었다.
어차피 몬스터가 넘쳐나는 1회 차에 주인 없는 땅이 존재할 리 없었다. 그 말인즉슨, 고블린이 사라진다고 해도 다른 몬스터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호영은 다시 무의미한 일을 반복해야 한다. 몬스터와 무제한적인 전쟁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몬스터를 죽인다는 게 완전히 무의미한 일은 아니고 나름의 소득이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 무엇보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호영으로선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고블린은 지금의 자리에 남아 있되, 호영에게 적대하지 않아야 했다. 지금 호영이 고블린 부락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도 그같은 결과를 창출하기 위함이었다.
저벅저벅!
대놓고 고블린 부락에 다가가니 비명에 가까운 고블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무장한 고블린들이 튀어나와 호영을 위협하였다.
하지만 위협만 할 뿐, 공격을 가하지 않는다는 점만 봐도 고블린들이 호영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고블린들의 표정은 두려움으로 가득하였다. 조잡한 창을 들고 있지만 덜덜 떠는 모습을 보면 과연 저 청을 휘두를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다.
“네놈들의 습성은 나도 잘 알고 있지. 네놈들은 약자에게는 더없이 강한 주제에 강자에게는 약한 놈들이야.”
말을 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뒤를 따르는 초강 역시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히려 두려움에 떠는 것은 숫자로 압도하고 있는 고블린 쪽이었다.
고블린들은 호영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뒤로 주춤거렸다. 어느덧 부락의 중심지까지 침입을 허용하였고 그제야 뒷걸음질을 멈추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침입을 허락한 이상, 강한 척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이미 고블린 전사들 뒤에는 성체가 되지 못한 어린 고블린들이 보이고 있었으니까.
“케엑!”
그때 고블린 전사들의 진영에 변화가 생겼다. 중앙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특이하게 생긴 고블린이 걸어 나온 것이었다.
기다란 지팡이에 어울리지 않은 수염까지 갖춘 고블린.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게 느껴지는 그런 고블린이었다.
“키루룩. 케이루으.”
당연하겠지만 호영은 고블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미래가 되면 언어학자 중에 몬스터의 언어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생기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하지만 고블린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뿐, 그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호영은 알 수 있었다.
“나에게 투항하겠다는 것이냐?”
“케이루으! 케이루으!”
두 마디를 외치더니 갑자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케이루으! 케이루으!”
그것은 일종의 경배였다. 제사장으로 보이는 고블린족의 우두머리를 시작으로 고블린족 전체가 호영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짐승들이 배를 내보이는 것이 충성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인간은 예로부터 절을 함으로써 자신의 충성을 표현하고는 하였다.
이것은 고블린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블린들이 호영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은 호영에게 충성하겠다는 맹세였다.
‘하지만 이놈들은 믿을 수가 없는 종족이지.’
고블린을 투항하게 만든 것은 호영의 의도대로였다. 그러나 고블린은 무척이나 영악하고 간사한 종족이었다. 지금도 넙죽 엎드리고 있지만 아마 속으로는 호영에게 복수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나름 현실적인 고블린족이지만 그렇다고 몬스터 특유의 맹목적인 호전성이 없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렇기에 호영은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싸늘한 얼굴을 한 채 가죽 주머니에서 조그만 돌멩이들을 꺼냈다. 바로 마정석이었다.
“해가 뜨면 마정석 하나를 바쳐라. 만약 하루라도 바치지 않는다면 너희를 죽여 가져갈 것이다.”
항복했으니 너그럽게 대하라?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고 필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