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6화
- 그런 쓸데없는 일에 힘을 소비하지 마라. 지금은 힘을 모을 때이지, 낭비할 때가 아니다.
그런 트리버의 생각을 읽은 목소리가 곧장 경고했다.
지금까지 누누이 설명했건만, 감정에 휩쓸려서 다시 헛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역시 마물은 마물인 모양이었다. 참으로 생각이 짧았다.
- 어느 정도 힘이 모인 뒤엔 사용하기 싫어도 사용해야 할 테니, 어리석은 생각 말고 조용히 힘이나 모아라.
목소리가 말에 세뇌 마법을 담았다. 형체 없는 그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었다.
다행히 트리버는 마물이라서 이성이 강하지 않아 쉽게 통했다.
한껏 불만을 품고 있던 트리버의 얼굴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울창한 나무 사이로 트리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세뇌를 당한 탓인지 고조가 없이, 마치 기계 같은 억양이었다.
그에 만족한 목소리가 다시금 말에 세뇌를 담았다.
- 자, 이제 힘을 흡수해라. 전처럼 너무 많이 빼앗으면 티가 날 테니,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와 동시에 트리버의 머릿속에서 잡념이 사라졌다. 커다란 나무에 등을 기댄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트리버의 목과 손, 발에 연결된 고리에서부터 소량의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들은 한차례 트리버의 몸을 유유히 맴돌다가 이내 그의 몸으로 천천히 흡수되었다.
*
트리버가 신전에 나타났던 그때, 대신관은 그 장소에 함께 있었다.
다만 투명 마법을 걸어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한 뒤, 트리버가 신관들을 학살하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대체 저건 정체가 뭘까.’
나타날 때마다 몹시도 의아했다. 마왕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왜 자꾸 나타나서 마물을 소환하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겁도 없이 신전에 쳐들어오다니.’
처음에는 레이나가 시켜서 저러는 걸까 의심했었는데, 이제 더는 그런 하찮은 연극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저토록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공격하는데, 연극일 리가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신전을 몰락시키려 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아아악! 사, 살려 줘!”
아니, 그렇게 되어 가고 있었다. 트리버의 손짓 한 번에 신관 대여섯이 죽어 나갔고, 수십이 쓰러졌다.
그 옆에서 주문을 외는 성녀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손발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고,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니 시급히 도와주어도 모자란 상황이거늘. 대신관은 투명 마법을 유지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신전에서 함께 지내 오긴 했지만, 대신관에겐 대체할 자들이 수두룩한 소모품에 불과했기에, 성녀만 죽지 않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참이나 물끄러미 지켜만 보고 있자, 갑자기 트리버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사이에 신관과 성녀가 온 힘을 쥐어짜 공격을 퍼부었으나, 그는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신전을 떠나 버렸다.
‘결국 이번에도 알아낸 것은 아무것도 없나.’
아쉽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계획이 수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신전이 공격받음으로 인해 구실 삼아 성녀를 채찍질하기 더욱 용이한 환경이 되었을지도.
‘어차피 진짜 마왕이든, 가짜 마왕이든 둘 다 없애면 그만이니까.’
신전이 온통 아비규환 상태였으나 대신관의 머릿속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이 상황을 어떻게 잘 이용해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할까 고심할 뿐이었다.
“대신관님은 어디에 계시지?!”
그 와중에 자신을 찾는 신관들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고 본격적인 계획에 들어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물론 여기서 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상하니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겸사겸사 다친 척이라도 하여 신관들과 성녀의 동정심을 유발한다면, 다음 계획이 수월할 것이다.
그리 생각한 대신관은 곧장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방으로 들어간 그는 곧장 공격 마법을 자신에게 사용했다.
파지직. 번개처럼 번쩍인 검붉은색 마법이 그의 왼팔에 성인 남성 한 뼘 크기의 상처를 남겼다.
레이나와 트리버가 사용했던 마법보다 더 음산하고 거부감이 드는 색이었다. 진득하게 굳은 핏물 같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신관은 타인의 앞에서 공격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몸에 직접 거는 투명 마법이나, 이동석을 사용하는 정도의 마법은 겉으로 색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서 괜찮았지만, 공격 마법만큼은 어쩔 수 없이 외부에 드러나기 때문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자라고 하면 응당 성녀처럼 새하얀 마법을 사용해야 마땅한데.
어째서 제 마법은 마왕의 마법보다 더 불쾌감이 드는 색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타인에게 보여 주지 않으면 그만이었기에 깊이 생각할 문제는 아니었다.
이런 사소한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가 바로 코앞에 놓여 있었다.
잡념을 밀어낸 대신관은 서둘러 사람들이 모인 홀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는데, 늦잠을 자다가 뒤늦게 깨어나 헐레벌떡 소란이 이는 장소로 가던 케일란과 마주쳤다.
“뭐야? 너도 늦잠 잤어?”
대신관이 늦잠도 자? 그런 것치고는 저긴 대신관의 방이 아닌데. 대체 뭘 하다가 나온 거지?
눈을 가늘게 뜬 케일란이 대신관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러다가 그의 왼팔에 생긴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어? 너 다쳤어? 뭐야, 언제 다쳤어? 방금 비명이 들리던데, 너도 공격당한 거야? 대체 뭐한테 공격당한 건데?!”
귀찮게 그의 말이 길었다. 하필이면 케일란과 마주쳐 귀에서 피가 날 것만 같았다.
“요즘 세상을 어지럽히는 그자입니다.”
그래서 대충 대답하며 발걸음을 옮기자, 대신관의 뒤를 냉큼 따라붙은 케일란이 흥미를 보였다.
강제로 신전에 남게 된 것이 짜증 나긴 한데, 역시 농사보다는 전투 쪽이 적성에 맞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걔가 널 공격한 거야? 그래서 숨어 있었던 거고?”
“상처를 입어 잠시 지혈하고 나왔습니다.”
“흠, 그래?”
케일란의 시선이 다시금 대신관의 왼팔로 향했다. 이상하네. 그런 것치고는 치료가 전혀 안 됐는데.
끔찍하게도, 복도에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꽤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케일란이었으나, 대신관의 설명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런 뜬금없는 장소에서 마왕에게 상처를 입고, 마왕은 그가 지혈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런데 지혈 또한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그 미심쩍은 눈빛을 대신관도 깨달았으나, 달리 변명을 한다거나 신경 쓰진 않았다.
어차피 케일란은 성녀를 돕기 위한 소모품일 뿐이었다. 늘 헛소리만 하는 성격이었기에 그의 말을 귀담아들을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서로를 의심하고 무시하며 잠시 걷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비규환 상태의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대신관님!”
“대, 대신관님! 상처가……!”
“괜찮으십니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성녀가 치유 마법이라도 사용한 듯 아까와는 다르게 대부분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공격을 당해서 잠시 지혈을 하고 왔습니다. 서둘러서 온 건데, 상황이 이미 끝난 모양이군요.”
옆에서 대화를 듣던 케일란의 한쪽 눈썹이 삐죽 솟았다.
반면 신관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아아! 세상에……!”
“더 일찍 대신관님을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성녀님! 성녀님! 어서 치유 마법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누군가가 크게 다쳤다는 소리에 남은 부상자들을 치료하던 성녀가 서둘러 달려왔다.
그러다 상처를 입은 이가 대신관이라는 것을 확인하곤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신관님……?!”
온 힘을 다해 트리버를 상대하고, 그 뒤 치유 마법까지 쉴 새 없이 사용하여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대신관을 치료했다.
이를 본 대신관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애써 감췄다.
공녀를 만난 뒤부터 상태가 조금 이상했었는데, 이제 다 나은 모양이었다. 다음 계획을 바로 실행해도 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성녀님. 항상 큰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전하는 따뜻한 말에 성녀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랬듯, 얼굴을 붉히며 좋아할 줄 알았거늘.
‘차를 너무 많이 마시게 했나.’
조금 실망스러운 반응이긴 했지만, 말만 잘 들으면 그만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대신관이 아주 잠시 눈을 감고 힘을 집중했다.
한데 그때였다.
쿠구구궁-!
신전 밖에서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그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서둘러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주위에서 새카맣고 거대한 마물들이 잔뜩 소환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허……!”
“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숫자에 신관들이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몰래 소환을 마치고 뒤늦게 밖을 확인한 대신관이 탄식을 금치 못하며 입을 열었다.
“……방금의 공격은 여흥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