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4화
“로스틴! 로스틴! 괜찮아?!”
레이나의 외침에도 로스틴은 미동이 없었다. 어딜 어떻게 다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다친 듯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체……. 대체 왜 이런 거야……?”
레이나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트리버를 돌아보며 물었다.
태생이 마물이니 본능이 이성을 앞질렀다면 이해가 가겠지만, 지금의 트리버는 퍽 멀쩡해 보였다.
흔들림 없이 두 발로 꼿꼿이 서서 자신과 로스틴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반면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트리버가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답했다.
“레이나, 왜 내게 화를 내는 거야? 혹시 로스틴을 확실히 죽이지 않아서 그래?”
그러면서 그가 다시 로스틴을 공격할 것처럼 손에 불꽃을 둘렀다.
“……!”
그에 레이나가 서둘러 힘을 사용하여 트리버의 불꽃을 꺼트리니,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왜? 로스틴이 강해서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이제는 그보다 자신이 강한데 레이나가 저토록 냉랭한 반응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심지어 불같이 화를 낸 레이나가 마구잡이로 마법을 퍼붓기 시작했기에, 트리버는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저질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그때, 트리버에게 침투한 목소리가 다시금 그의 생각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 안타깝게도 힘을 보여 주어 제압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군.
‘뭐?’
강한 자를 해치워 힘을 보여 주면 레이나가 자신에게 올 거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늦었다고?
트리버의 마음이 심히 요동쳤으나, 덕분에 도리어 파고들 틈을 더 찾게 된 목소리는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 킬킬킬, 걱정할 것은 없다. 늦었다고는 해도 예상했던 상황이니.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결국 레이나는 네 손에 떨어질 것이다. 말만 잘 따른다면.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는데?’
트리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미 혼란으로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해진 그는 전적으로 목소리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 더 큰 힘을 보여 주고 제압해라. 네가 세상을 지배한다면 더는 거스르지 못할 것이다.
‘더 큰 힘……?’
- 그래. 트리버, 마왕이 되어라. 내 목소리를 듣고, 검은 힘을 사용하는 너는 마왕이 될 자격이 있다. 네 그 힘으로 세상을 어둠으로 물들여 모두를 굴복하게 만들어라!
말도 안 되는 명령임이 분명하거늘, 드디어 목표를 찾았다는 듯 트리버의 눈이 새빨갛게 빛났다.
잠시 멍하니 허공을 보며 목소리에게 세뇌를 당하던 그는 다시 눈을 돌려 레이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 적의가 그득했다. 대답 여하에 따라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전투태세를 갖춘 그녀의 전신이 긴장하고 있었다.
역시 목소리의 말이 맞았다. 지금처럼 레이나를 대할 순 없었다.
저런 눈을 한 사람은 다정함과 친절함이 아닌, 공포와 억압으로 제어하는 수밖엔 없었다.
“다시 올게.”
세상을 모두 파괴하는 한이 있더라도 레이나를 옆에 두겠다고 다짐하며 안광을 빛낸 트리버가 훌쩍 뛰어 모습을 감췄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돌연 로스틴을 공격하더니, 트리버는 뜬금없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당혹스러웠으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음 공격을 대비하고 있던 레이나가 다급히 사람들을 불렀다.
“빨리, 빨리 의사를 불러! 신전에도 연락을 넣고! 성녀를 불러와! 당장!”
그제야 잔뜩 얼어 있던 사람들이 헐레벌떡 움직였고, 레이나는 여전히 미동도 없는 로스틴을 조심스레 방으로 옮겼다.
*
다행히 로스틴은 목숨이 위험하진 않았다.
게임 속에서 여주를 대신하여 온갖 공격을 다 맞았던 설정 덕분인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마법에도 그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 그러니까 큰 부상은 없습니다만, 내상이 조금 심각합니다. 그게, 그러니까……. 마치 불이라도 삼킨 듯한 상처군요…….”
방출한 불꽃의 열기를 흡입한 탓이었다. 진찰을 끝낸 의사가 레이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의 몸 주위로 검은색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해자로 의심하는 눈초리가 역력했으나, 아니라고 답할 여유는 없었다. 아니,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치료할 수 있어? 아니, 무조건 치료해. 마당 온실에 널린 게 귀한 약초니까 어떻게 좀 해 봐!”
“예, 예!”
레이나의 다그침에 고개를 조아린 의사가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를 돕기 위해 사람들이 뒤를 따라붙었다.
홀로 남게 된 레이나는 털썩 침대 옆에 마련한 간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왜,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대체 왜? 왜 갑자기 트리버는 로스틴을 공격한 거지?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아니, 로스틴을 공격했으니 혹시 로스틴과 싸우기라도 한 건가.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까지 공격한다고?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마른세수를 하며 자책하고 있자, 자잘한 생채기가 생긴 로스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눕혀 놓아도 되는 건가?’
외상보다는 내상이 심각하다고 하긴 했지만, 등으로 공격을 전부 받은 상태였다.
아무리 튼튼한 몸이라고는 하나, 용암 같은 불꽃 공격을 받고도 등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몸을 뒤집기에는 환자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의사가 이리 눕혀 놓고 나갔으니 맞긴 할 텐데, 계속되는 걱정으로 불안하고 초조했다.
“……내가 여주였다면 바로 치료했을 텐데.”
신에게 제대로 뜻을 전달하지 못해서 여주가 되지 못한 게 이토록 한탄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왜 날 감싼 거야……. 자기나 잘 피하지……!”
갑작스러운 공격이기는 했지만, 로스틴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는 당할 자가 없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경계심이라고는 전혀 없던 자신은 좀 다쳤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 자신의 안위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고 보니 로스틴은 미궁에서도 같은 행동을 했던 적이 있었다. 미궁의 최종 보스를 만났을 때였다.
“나라면……. 내 몸부터 지켰을 거야. 이렇게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도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다치고 말고를 생각하지 않고 냅다 공격부터 했을지도. 차라리 그게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로스틴이 덜 다쳤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더는 돌이킬 수 없는 가정을 거듭하는 사이, 로스틴이 눈을 떴다.
잠시 낯선 천장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이내 머리맡에 앉아 있는 레이나를 발견했다.
“……레이나.”
제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레이나가 얼굴에서 손을 치웠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로스틴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보다 생기가 부족한 것이 아주 멀쩡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눈을 뜬 게 어디인가 싶었다.
“……괜찮나? 다친 곳은?”
로스틴이 레이나에게 물었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물을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자기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 걱정이나 하는 탓에 레이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에 로스틴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오늘따라 무거운 팔을 뻗어 레이나의 손을 잡았다.
“어디 다친 건가? 아픈 곳이 있어?”
“있을 리가 없잖아! 그쪽이 날 감싸고 그 큰 공격을 혼자 다 받았는데……!”
생각만 하던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자 괜히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입술을 깨물었더니, 그러지 말라며 로스틴의 손이 레이나의 입술에 닿았다.
“다행이군.”
“하나도 다행 아니거든!”
“아니, 다행이야. 영애가 다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야. 나는 몸이 튼튼하니 괜찮아. 영애는 그렇지 않으니까.”
지금 누가 누구한테 튼튼을 운운하는 거야.
에피소드에서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인 조연 주제에 감히 레벨 1,000을 찍은 최종 보스를 걱정하고 앉았다니.
어이가 없다고 답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나올까 말까 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기 때문이다.
“왜 울지?”
“그쪽이 다쳤으니까! 다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걱정되는 한편 괜히 울컥 화가 치밀어 올라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마음을 그대로 말하자, 로스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왜 웃어. 지금 웃을 때야?”
아프다고 울어도 시원치 않은데 왜 웃고 난리야.
레이나의 타박에도 로스틴의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뚝뚝 흘리는 레이나의 눈물을 대신 닦아 주며 말했다.
“그래, 웃을 때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