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20화
오늘은 달리 일정이 없었기에 대신관은 성녀와 함께 바로 루벨라이트 공작저로 향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곧장 성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잃어버린 기억 때문에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신관들을 여럿 붙여 기분을 맞춰 주고 있던 참이었다.
성녀는 타인을 돕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기에, 다친 자들이 있다면 치료를 받으라고도 해 놓았다.
“와! 성녀님, 감사합니다. 어릴 때 다쳐서 생긴 흉터까지 전부 치료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앗, 아니에요……!”
“너무 겸손하십니다.”
“맞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성녀는 온실에서 다친 신관들을 치료하며 위안을 얻고 있었다.
조금 백치인 구석이 있지만, 역시 성녀는 성녀. 성품이 남달랐다. 괜히 신께 선택받은 것이 아니었다.
성녀의 기분이 한결 나아진 것 같아 더는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어 보였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대신관이 기척을 냈다.
“여기 있었군요.”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대신관의 등장에 성녀의 주변에 모여 있던 신관들이 서둘러 예를 차렸다.
성녀가 자신 역시 예를 차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큰 보폭으로 훌쩍 걸어 성녀의 지척까지 다가온 대신관이 그녀의 흰색 드레스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며 말을 이었다.
“성녀님, 시급히 도와줘야 할 병자가 있습니다. 함께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병자가 있다는 말에 성녀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다루기 쉬워서 참으로 다행이라며 눈을 곱게 접은 대신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성녀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으나, 그녀는 자신을 몹시도 좋아하고 있었으니 속으로는 좋아할 것이 분명했다.
계산을 마친 대신관이 손을 잡은 채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팔이 떨어져 나갔다고 하더군요.”
“팔이요……?!”
“다시 붙이기는 했지만, 완벽하게 붙진 않은 모양입니다.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한다니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꽤 중상이라는 설명을 마치자 사색이 된 성녀가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녀의 머릿속엔 팔을 다친 가여운 환자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 차 보였다.
그렇게 황급히 루벨라이트 공작저에 도착하자, 공작이 반색하며 대신관과 성녀를 맞이했다.
“대신관님! 성녀님! 드디어 오셨군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아침부터 큰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오늘따라 더더욱 아픈 팔을 부여잡은 채였다.
옷을 입고 있어서 겉으로 티는 나지 않았지만, 응접실에 앉아 상의를 벗자 그의 끔찍한 상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잘도 이런 상태로 버텼군요.”
대신관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그에 공작이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그래서 계속 와 달라고 요청했는데, 바쁘다면 직접 가겠다고도 했는데 무시한 것이 대신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친히 공작저까지 와 준 상태였다.
그것도 성녀 혼자만 보낸 게 아니라 그도 함께 말이다.
지켜보는 사람까지 괜히 제 팔을 확인하게 만드는 상처에 성녀가 서둘러 손을 뻗었다.
“바, 바로 치료할게요! 치유의 빛……!”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온 빛과 함께 공작의 상처가 점점 아물었다.
뼈와 근육, 신경과 피, 살 등의 신체 조직이 빠르게 원상태로 돌아가며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뻐근하면서도 시원한 이상한 감각이었다. 상처를 입은 그날부터 줄곧 떠나지 않았던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성녀의 치유 마법을 받자, 언제 팔이 떨어져 나갔었냐는 듯 공작의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었다.
심지어 피부까지 갓 태어났을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지켜보던 하인들이 입을 쩍 벌렸다.
부드럽고 뽀송뽀송해진 상처 부위를 매만지던 공작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정말 신의 기적이군.”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치료해 주러 오지 않은 것에 대한 원망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성녀님께 감사 인사를 하세요.”
멍하니 감탄만 하고 있자, 대신관이 공작의 무례를 지적했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공작이 서둘러 성녀에게 예를 차렸다.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녀님!”
언제 성녀를 욕했냐는 듯 공작의 태도가 일변했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멀쩡해진 팔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환희에 젖어 있었다.
레이나가 태어난 이후로 신앙심이라고는 일절 없었거늘, 감쪽같이 나은 자신의 팔을 보니 신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네, 네에…….”
한데 그런 그의 감사 인사를 받는 성녀의 상태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왠지 껄끄러워하는 분위기였다.
공작이 너무 호기로워서 그런가. 잠시 고민하던 대신관이 성녀에게 말했다.
“공작님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저택 구경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공작을 찾은 까닭이 바로 이것이었다. 대신관은 그와 긴밀하게 나눌 대화가 존재했다.
안 그래도 자리가 불편했던 모양인지 성녀가 반색했다.
“아, 네! 그렇게 할게요.”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대신관은 하인들까지 모두 물리곤 굳이 이곳에 온 까닭을 본격적으로 털어놓았다.
“사병이 필요합니다. 최대한 많이요. 가능한 많이 모아 주십시오.”
“사병…… 말씀이십니까?”
공작이 자신이 뭘 잘못 들었냐는 듯 되물었다.
각 가문의 사병 수는 법에 의해 한정되어 있었다. 너무 많은 사병을 가질 시, 반역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같은 맥락으로 일정 규모 이상의 집회나 모임, 단체, 회의 등도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대한 많은 사병을 모으라니. 그것도 대신관이라는 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에 대신관이 여유롭게 설명을 이었다.
“마왕을 없앨 생각입니다. 성녀님 혼자로는 역부족이라서요. 그러는 편이 공작에게도 좋은 일 아닙니까?”
마왕이라는 말에 공작은 사색이 되었다. 그게 레이나라고 언급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찔려서 주변에 누가 없나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다행히 미리 사람들을 물려 놓은 참이었기에 응접실 안에는 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이 놓이진 않은 공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황제 폐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곧 사병이 필요할 만한 일이 일어날 테니까요. 공작께선 때를 맞춰 사병을 모으기만 하면 됩니다.”
설마 무슨 예언이라도 떨어진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대신관에게 좋은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마왕을 없애 주기만 한다면 영혼이라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공작의 표정이 결연했다. 사병으로 황성을 치라고 해도 그렇게 할 것처럼.
역시 성녀를 데리고 생색을 낸 것이 효과가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신관이 맑게 웃었다.
“그럼 공작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전 재산을 모두 털어 내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많이 모아 주십시오.”
*
그 시각, 응접실에서 빠져나온 성녀는 공작저를 둘러봤다.
처음에는 대신관과 공작이 무슨 대화를 나누나 엿들을까 했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하인들까지 줄줄이 응접실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곤 이내 마음을 접었다.
“성녀님, 저택 안내를 도와드릴까요?”
“아니에요. 혼자 돌아볼게요. 치유 마법을 썼더니 조금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어요.”
“아! 그러셨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성녀의 신성함에 하인들이 친절을 베풀었으나, 그녀는 혼자 있고 싶었다.
다행히 성녀에게 호감이 가득한 하인들이 눈치껏 자리를 비웠고, 성녀는 오롯이 홀로 저택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히 발견한 것이 지하로 내려가는 입구였다. 복도 구석에 있던 작은 문이었기에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어째서인지 성녀의 눈에는 문 사이에서 검은색 연기 같은 것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성녀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작은 문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잠겨 있었으나, 레벨 800인 그녀가 열지 못하는 문은 없었다.
그렇게 작은 문을 열자, 그곳에서 기다렸다는 듯 검은색 연기가 쏟아져 나왔다.
대신관도 기겁을 하고 남을 정도의 검은 연기였지만 누군가를 해친다든가, 공격한다든가 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하에 가득 들어차 있던 연기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남을 해치고 싶지 않은데,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데, 왜 이런 저주를 받아서 이토록 비참한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듯 조용히 울다가 이내 환영처럼 잔잔히 사라졌다.
“레이나…….”
성녀는 조용히 레이나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녀의 눈에 레이나를 향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성녀가 조심스럽게 작은 문을 매만지고 있자, 어느새 대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공작이 그런 성녀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소리를 높였다.
“서, 성녀님! 거, 거긴 더러운 것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 공작이 구구절절 변명했다.
“저, 저택에 두긴 더러운데, 치우기는 곤란한 것을 보관하는 장소라서 고귀하신 성녀님께서는 보실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그에 아주 잠깐 성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찰나였기에 눈치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군요.”
공작의 말을 믿겠다는 듯 성녀가 예쁜 눈을 휘며 웃자,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