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16화
“아니,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데려가? 고귀하신 성녀님 아니야?”
공손히 대접해도 모자라거늘, 마치 납치라도 하듯 데리고 사라지는 대신관에 레이나는 불쾌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분명 게임 속에서 여주가 저런 취급을 당하는 일은 없었는데.
그녀의 편을 들어 줄 사람들을 자신이 거의 다 데려와서 그런가 싶어 쓸데없이 부채감이 느껴졌다.
“……신전에 따라가는 건 좀 오버지?”
“아쉽게도 신전은 쉽게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공격을 목적으로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지 않는 이상.”
로스틴이 흘러내린 레이나의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을 이었다.
“공녀의 말대로 고귀하신 성녀님이 단독 행동을 해서 화가 난 걸지도. 데려가서 극진히 대하지 않을까 싶은데.”
몇 번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성녀는 잘 구슬리지 않으면 엇나가는 성격으로 보였다.
실제로 성녀는 그런 성격이었다. 만약 저 상태로 데리고 돌아가서 대신관이 잘 타이르지 않는다면 엇나갈 확률이 높았다.
“여기까지 혼자 와서 오해까지 풀고 간 사람이니 알아서 잘 대처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건 그래.”
걱정하기에는 성녀는 지금까지 너무나도 잘해 왔다. 미궁과 던전이 없음에도 레벨을 800까지 올린 그녀였다. 어지간한 근성과 정신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보호자 격인 대신관이 손수 데려간 참이니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맞아. 알아서 잘하겠지.’
무력으로 그녀를 어떻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아마도 자신 외엔 없을 테니까.
납득한 레이나가 로스틴을 돌아보았다. 하다 만 것이 있으니 계속해야 했다.
“일단 다시 춤출까?”
“좋은 생각이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이 겹쳐졌다. 멈췄던 음악도 재개되었기에, 마주 보며 웃은 두 사람은 다시 연회장 중앙으로 돌아갔다.
*
몇 번의 이동 끝에 신전으로 돌아간 성녀는 곧장 대신관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잡았던 손목에 옅은 멍이 생기려 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손목을 치료한 성녀가 상황을 전부 설명하겠다며 호소했다.
“제 이야기를 들으시면 분명 납득하실 거예요!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어요!”
“……알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저도 함께 알아보도록 하죠. 우선 제 방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대, 대신관님의 방이요……?!”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장소가 언급되자 성녀가 당황했다. 레이나의 명예를 위해 빨리 해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아가 버릴 만큼 충격적이었다.
“예. 밤이 너무 늦었고 중요한 이야기 같으니, 남들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 하는 게 좋을 테니까요.”
“아, 아아. 그, 그렇죠…….”
너무나도 타당한 대답에 성녀의 기분이 저조해졌다. 딱히 바란 대답이 있는 건 아닌데, 기대한 것도 없는데, 까닭이 명확하여 어쩐지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조금 우울해진 기분으로 대신관의 방에 도착한 성녀는 바로 레이나의 이야기를 풀었다.
어디까지 말해도 될까 고민이 들었으나, 전부 다 말하지 않으면 납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때문에 성녀는 레이나가 자신과 같은 세계에서 소환된 사람이고, 원치 않게 마왕이 되었다는 말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비록 그런 운명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레이나는 절대 남을 해칠 생각이 없다고 했어요. 생각해 보면 정말 그래요. 레이나는 지금까지 나쁜 짓을 한 적이 전혀 없는걸요!”
왜 굳이 나쁜 짓을 사서 하겠냐며 성녀가 구구절절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 눈도 채 깜빡이지 못하고 성녀의 말을 유심히 듣던 대신관이 드디어 깨달았다는 듯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된 원흉을.”
신탁이 왜 멈추었는지, 세상이 왜 신탁대로 돌아가지 않는지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레이나 루벨라이트가 문제였다. 그녀의 몸에 이상한 것이 들어가 있으니 일이 이렇게 된 것이다.
‘그 여자 때문일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설마 그 여자까지 신의 부름을 받았을 줄은.’
아니, 그녀를 부른 것은 자신이 모시는 신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악신에 가까운 다른 사악한 무언가의 힘이 작용한 것이겠지.
“원흉이라니요. 레이나는 착한 사람이니 더는 싸울 일이 없게 되었을 뿐이에요……!”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기에 성녀가 빠르게 대신관의 단어를 정정했다.
그러나 대신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요, 성녀님께서는 지금 속고 계십니다. 정말 싸울 생각이 없었다면 왜 공녀는 미궁과 던전을 없앴을까요? 처음부터 말로 잘 해결하면 되었을 것을.”
“그, 그건……. 혹시 몰라서 살기 위해 그랬다고…….”
자신과의 사이가 좋아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성녀는 두 번이나 레이나를 모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좋게 말을 걸어 준 그녀가 대단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대신관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분명 성녀님의 앞길을 막기 위함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이 모든 일에서 가장 이득을 보고 있는 것은 레이나 루벨라이트입니다. 성녀님께서 마땅히 가졌어야 할 명예와 업적까지 모두 가져가기도 했죠.”
사실 꽤 감탄한 참이었다. 아주 작정하고 성녀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부단하게 노력을 했구나 싶기도 했고.
역시 예상했던 대로 레이나가 문제였다. 실마리까지 모두 풀려서 원인을 알았으니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레이나를 죽이는 것이 신의 뜻이었다. 그녀만 해치운다면 이 세상은 다시 신의 뜻대로 움직일 것이 분명했다.
“아, 아니에요! 정말 레이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하고 있어요!”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자, 잘 통하니까요……! 같은 세상에서 왔고……!”
불행한 전생을 겪고 죽음을 통해 게임 속에서 환생한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성녀는 레이나와 아주 잘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대신관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그런 척 맞춰 준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마왕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밝혀진 게 없었기에 추측 가능한 부분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 세상에서 최초로 레벨을 1,000까지 올린 존재였다.
어떤 능력을 지녔을지 모른다. 타인의 생각을 읽거나, 기억을 읽었을지도.
그러나 레이나와 대화해 본 성녀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건 기억을 읽거나 배워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수능, 대학, 게임, 유행 등등. 정말로 그 세상에서 살았어야만 알 수 있을 소소한 이야기까지 나눈 참이었으니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아서 답답해진 성녀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 알아주지 않는 걸까. 자신의 설명이 그렇게나 부족했나? 마치 벽과 대화하는 기분에 참담함이 밀려왔다.
한편, 전과는 달리 모순점을 짚어 줬음에도 말을 듣지 않는 성녀에 대신관이 생각을 달리했다.
아무래도 마왕에게 단단히 세뇌를 당한 모양이었다. 평범한 대화로는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이 답답한 존재를 포기하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건 성녀뿐이었다.
물론 레이나가 여러 가지 술수를 쓴 탓에 레벨을 올릴 장소가 사라지긴 한 상태였다.
북부의 미궁, 서부의 던전, 남부의 괴수, 동부의 마왕까지. 모두 해치워 진정한 성녀로 거듭나야 마땅하거늘, 개중의 셋을 레이나가 망친 뒤였다.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마물을 계속 뽑아내 성녀를 키우면 될 터이니 말이다.
최대한 성녀를 키워서 지원군과 함께 토벌하러 간다면 어떻게든 될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 그 방법밖엔 없었다.
‘마음 같아선 내 두 손으로 손수 마왕을 해치우고 싶지만.’
불행히도 대신관은 공격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아니, 그는 타인의 앞에서 거의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이제는 성녀를 설득할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사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고 자신의 방으로 초대한 참이기도 했고.
“알겠습니다. 성녀님만 아시는 무언가가 있는 모양이네요. 그럴 수도 있겠죠. 더 설명을 들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갑자기 믿겠다는 말을 꺼내는 대신관에 성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요?!”
“예. 그런데 목이 좀 말라서, 차라도 드시면서 얘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하인도 들이지 않은 탓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계속 말을 하고 있던 상태였다.
반가운 말에 성녀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에 대신관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벽을 손가락으로 톡톡 몇 번 두드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벽인 줄 알았던 공간이 열리더니, 작은 금고 하나가 나타났다.
그 속에서 찻잎 몇 장을 꺼낸 대신관이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던 물병에 이를 넣었다.
물에 닿은 찻잎은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투명한 물을 확인한 대신관이 찻잔에 물을 따라 성녀에게 권했다.
“방금 뭘 넣으신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 성녀가 잔에 담긴 투명한 물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대었다.
무언가를 넣은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제가 즐겨 마시는 차입니다. 더는 구할 수가 없어서 몰래 숨겨 간직하고 있던 귀한 차이죠.”
그러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거라는 듯 대신관이 평온한 얼굴로 찻잔에 입을 대었다.
그에 성녀도 자연스럽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맛이 입 안을 온통 감쌌다.
“와! 맛있어요!”
“그렇죠? 그래서 제가 좋아하는 차입니다. 불행히도 더는 구할 수가 없지만요. 제가 따로 찻잎을 가지고 있다는 건 비밀입니다. 다른 사람과는 공유하고 싶지 않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