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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106화 (106/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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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한 것이 무색하게, 이동석에서부터 황성까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서둘러 들어가서 출석 체크만 하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하며 황성 정문을 통과하려던 레이나는 뜻밖의 복병을 만나게 되었다.

“죄송합니다만, 초대장이 없으신 분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레이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전에는 그렇게나 가기 싫다고 했는데도 마음대로 끌고 들어가더니, 이제는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고?

뭐가 이렇게 제멋대로라는 말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레이나가 어깨를 으쓱이자, 로스틴이 제 초대장을 내보였다.

“내 동행으로 입장하지. 신원 확인은 황태자 전하께서 해 주실 거다. 이전에 전하의 초대로 황성에 왔던 적이 있으니까.”

정확히는 초대가 아니라 납치에 가까웠기에 그의 말에 날카로운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에 초대장을 확인한 경비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곳에 적힌 이름이 무려 로스틴 윈터스노우 공작이었기 때문이다.

로스틴 윈터스노우.

무력으로서는 세상에 견줄 자가 없는 그는 경비병에게 있어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런 대단한 인물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었기에 그가 서둘러 자세를 고쳐 서곤 거수경례했다.

“시, 실례했습니다!”

경비병의 얼굴에 존경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데 그런 그의 눈에 뒤늦게 레이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색 연기가 들어왔다.

독특한 드레스 디자인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드레스 주변이 연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서, 설마……!’

일전에 황성을 마물에게서 구해 주신 그 루벨라이트 공녀님?!

다행히 경비병은 레이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물이 나타났던 그날, 그는 바로 코앞에서 마물을 맞닥뜨렸었다.

황성의 병사라고는 하나, 신참이었다. 정식으로 능력을 인정받은 기사도 아니었다.

기사가 무리를 지어도 마물과 호각을 다툴 정도인데, 한낱 병사인 그가 홀로 마물을 처치할 순 없었다.

그래서 죽음을 직감하곤 눈을 꼭 감았거늘, 갑자기 나타난 레이나가 힘을 개방하여 그를 구해 주었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로스틴이 신과 같은 존재라면, 레이나는 신 그 자체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물 때문에 황성에 있던 모든 이가 어쩌지도 못하고 있던 상황을 한순간에 잠재워 버린 신.

그런 대단한 분에게 초대장을 운운하며 황성에 들어갈 수 없다고 딱딱하게 대답했다니.

당연한 절차였고 마땅한 대응이었으나, 병사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는 그의 옆에서 케일란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나는?’이라고 물었다.

“나, 나도 초대장 없는데?! 각하의 동행으로 나도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죄송한 말씀이지만, 가족이 아닌 이상 동행은 한 분으로만 정해져 있습니다.”

“가, 가족 같은 관계인데!? 그리고 나 케일란 모어라고! 나 몰라?!”

레이나와 로스틴만큼의 유명세는 없었으나, 케일란도 나름 이름이 알려진 용병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것과 황성의 출입은 별개였기에 병사가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지난번에는 그냥 들어갔다고!”

물론 그때는 마물 때문에 경계 근무를 서며 누군가의 신원을 조회할 상황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막무가내로 우기고 있자 누군가가 케일란의 등짝을 퍽! 내리쳤다.

“케일란!”

붉은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이 돋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그녀가 몹시도 분노한 얼굴로 다시금 케일란의 등짝을 후려쳤다.

“도대체 그동안 어딜 싸돌아다녔던 거야!”

“어, 엄마?!”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케일란의 모친인 모어 백작 부인이었다. 자세히 보니 전체적으로 큼직큼직한 케일란과 이목구비가 닮아 있었다.

제 명에 못 살겠다며 모어 백작 부인이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어떻게 2년도 넘게 집에 안 올 수가 있어!”

“어머니께서 많이 걱정하셨다.”

그녀의 곁에 선 젊은 남성이 추임새를 넣었다. 그 역시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갖고 있었다.

생김새는 케일란과 비슷했는데, 열정이 가득해 보이는 케일란과는 달리 침착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아무리 귀족의 삶을 포기했다고 해도 가끔은 집에 들렀어야지.”

“혀, 형……?!”

그는 케일란의 첫째 형이었다. 곧 모어 백작의 뒤를 이어 백작 작위를 잇게 될 인물이기도 했다.

“여기 이렇게 나타난 걸 보면 귀족의 삶을 완전히 포기한 것 같지도 않지만.”

용병으로서 멋대로 살면서 귀족이 받는 혜택도 누리겠다는 심보에 모어 백작 영식의 표정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아니! 나는 자유롭게 살 거라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몸은 착실하게 성인식에 출석했군.”

모어 백작가의 장남이 막내를 순살로 만들어 버렸다.

“자, 자유에는 돈이 필요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받을 돈이잖아!”

늘 그랬듯 막무가내 논리를 펼치는 케일란이었으나, 기세는 조금 누그러진 상태였다.

형이 무섭긴 한 모양이었다. 옆에서 백작 부인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케일란을 노려보고 있기도 했고.

“잘도 그런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왔구나. 창피한 줄도 모르고!”

케일란의 전신을 훑은 백작 부인이 다시금 가슴을 두드렸다.

첫째도 둘째도 멀쩡한데, 왜 막내만 저렇게 되었을까 그녀가 통탄했다.

더는 못 봐주겠다며 그녀가 케일란을 끌고 황성 안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초대장을 내보인 모어 백작가의 장남이 따랐다. 무언가를 잔뜩 실은 마차와 하인도 함께였다.

뭔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가족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케일란이 내놓은 자식같이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타박하는 손길과 말투에는 애정이 있어 보였다. 케일란이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황성 앞에서 기다리고 있기도 했고.

“그나저나, 나는 안 된다고 했으면서 하인은 그냥 들어가게 두네.”

“하인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귀족들이 많으니까. 하인은 동행인으로 치지도 않고.”

실제로 귀족들은 하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한 인격체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행 인원에 제한 없이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삼엄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모순적인 검문 방식이었다.

“그럼 이제 우리도 들어가지. 곧 식이 시작될 테니.”

“응.”

그리하여 제 앞에 내밀어진 로스틴의 손을 붙든 레이나는 무사히 황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는데, 황성은 정문부터 본성까지 돈을 바르다 못해 분쇄해서 뿌렸나 싶을 정도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흠, 역시 분수대는 중앙인가.”

분수대 중앙 불변의 법칙. 중간에서 조금이라도 치우친 분수대는 용납할 수 없다는 법칙이었다.

방금 스스로 만든 법칙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곡창 지대를 떠올렸다.

분수대를 마을 정중앙에 설치하되,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분수대까지 길을 뻥 뚫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여기 바닥은 뭐로 시공한 거지? 걷기 꽤 편한데, 콘크리트 바닥이라는 게 이 세상에도 존재하나?”

“콘크리트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맞춰 자른 돌을 깔아서 그 위를 연마하는 방법이 있다.”

“그럼 거의 대리석 까는 수준이겠다. 비싸겠네.”

“바닥이라고는 하나 황성에 깔린 돌이 비싸긴 하지.”

대화가 자연스레 일 얘기로 흘렀다.

의복까지 예쁘게 맞춰 입고 성인식에 참석해서 하는 이야기가 돌바닥을 연마하는 방법과 비용이라니.

로스틴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아무리 목석같은 자신이라도, 같이 파티에 참석한 이성과 할 대화가 아닌 것 같아서 어쩐지 이 상황이 웃겼다.

그리고 그런 화제를 꺼낸 장본인인 레이나가 자꾸 귀엽게 보여서 스스로가 웃겼다.

“그래도 이왕 꾸밀 마을, 돈을 왕창 내서라도 최고로 멋지게 만들 거야.”

심지어 동부에서 바로 보이는 경계 지역이었기에 레이나의 의지가 더더욱 불타올랐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말하도록. 최우선으로 처리할 테니까.”

“꼭이야.”

거대한 영토를 가진 공작의 든든한 지원 약속에 레이나가 방긋 웃었을 때였다.

뒤에서 몰래 접근한 누군가가 그녀의 목 앞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이내 레이나의 목덜미에 차가운 무언가가 닿았다.

화들짝 놀라서 힘을 사용하려는데, 꽤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레이나, 성인이 된 걸 축하해.”

“노엘?”

“정답.”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노엘이었다.

레이나에게 목걸이를 채운 노엘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생각보다 훨씬 잘 어울린다.”

그제야 레이나는 제 목을 내려다보았다. 목걸이라서 고개를 숙여도 잘 보이지 않아야 마땅한데, 어린아이 주먹만 한 루비 목걸이가 너무나도 눈에 잘 들어왔다.

이상하게 갑자기 기분이 나빠진 로스틴이 눈썹을 치켜떴다.

반면 레이나는 ‘세상에 이렇게 큰 루비가 존재하는구나.’ 놀라하다가, 저택에서 굴러다니는 사파이어 조각상을 떠올렸다.

‘잠깐만, 로스틴이 비싸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별생각 없었는데, 대체 그건 얼마짜리지……?’

조각상을 부수면 지금 목에 건 목걸이를 스무 개도 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레이나가 딴생각에 팔린 사이, 노엘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이번에 광산에서 채굴한 루비야. 레이나에게 가장 먼저 선물하고 싶었어.”

그래서 굳이 성인식까지 온 모양이었다. 집에 보석 조각상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나, 이렇게나 큰 보석 목걸이는 처음이었기에 레이나가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어 노엘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온 거야?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올 수 없다고 했는데.”

“다른 약속을 잡았어. 광산에 대해서 보고할 게 있다고 했지.”

참 나. 레이나는 이쯤 되면 초대장 운운하며 퇴짜를 맞은 건 자신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황성에 오나 봐라. 레이나가 굳게 다짐했을 때였다. 방금 지나친 황성 정문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비켜라! 이분은 성녀님이시다! 감히 어느 분의 앞을 막는 것이냐!”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까지 성인식에 참석한 모양이었다. 레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쩔까. 삼세번의 기회 중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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