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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78화 (78/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78화

“저희는 신탁과 신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부는 늘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신탁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유독 서부만 그렇다고? ……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엘은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듯 차분히 설명했다.

“서부에선 얻을 것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짐작하고 있습니다. 저희 영토는 대부분이 사막이라서 신전에 바칠 공물이 없거든요. 저 역시 달리 기부금을 내고 있지 않고요.”

그럴 돈이 있다면 영지에 투자하겠다며 노엘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전대, 전전대의 서부 공작들 모두 그러했다. 메마른 영토를 가진 서부는 대대로 가난했기에 신전에 일절 기부하지 않았다.

신을 믿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신이 있어도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모름지기 신이라면 가난하고 소외된 환경에 처한 사람부터 도와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이 세계의 신은 그 반대였다.

서부는 신에게서 버림받은 땅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서부 사람들이 조금 거친 면이 있습니다. 그 대신 심성이 곧고 정신력이 강한 편이죠.”

그건 샌디의 편지로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대충 사정을 납득한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런데 영지를 활용할 수 없는 건 북부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긴 합니다만, 북부는 황실에서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고 있어서 서부와는 사정이 조금 다릅니다. 저희가 완전히 메마른 모래사막인 것에 반해, 북부는 영토 자체에 문제도 없고요.”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레이나가 그런 것처럼 불을 피우면 어떻게든 영토의 활용이 가능했으니.

“어쨌든 그로 인해 서부에는 신탁을 일부러 알려 주지 않는 건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괘씸죄 같은 걸로요.”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었다.

“음, 그렇구나…….”

레이나가 어른들의 사정에 공감했다. 서부가 왜 그런 설정인지, 왜 서부의 공작만 여자인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게임 속에서도 서부의 비중은 별로 없었어. 성녀는 서부에서 던전만 깨고 바로 가 버리기도 했고.’

남주 후보가 아닌 자는 어쩔 수 없이 분량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속의 노엘은 성녀에게 몹시도 고마워했다. 지금까지 신도 돕지 않았던 자신들을 도와줘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러면 좀 슬퍼지는데.’

대체 왜 신은 서부를 차별한다는 말인가. 가뜩이나 영토도 메말라 있는데, 예언까지 안 해 주면 어떻게 살라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저는 대신관이라는 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만들어진 것 같은 미소와 은근히 비꼬는 말투가 특히 싫습니다. 속에 뱀이 수천 마리는 들어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아덴이 공감한다는 듯 옆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는 레이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신관의 이야기를 여기서 하게 될 줄은 몰랐기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맞장구를 쳤다.

“너도? 나도! 대신관은 진짜 속을 알 수가 없어. 무슨 말을 하든지 웃으면서 하는 게 제일 기분 나빠.”

기분이 좋을 땐 웃고, 나쁠 땐 화를 내거나 무표정한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인데, 대신관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자신이 불리한 상황이든, 아니든 말이다. 마치 불쾌한 엉덩이의 골짜기 같달까. 아니, 아니. 불쾌한 골짜기.

“저도 공녀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신을 모독하는 것 같아서 조금 말하기 껄끄러웠는데, 대신관은 인간 같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맞아, 맞아! 걔 진짜 이상해!”

공통된 적이 생기자, 대화가 활력을 띠었다.

말도 더 잘 통하는 느낌이었다. 그 상대가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는 대신관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설마 이래서 신탁을 천 년 전에 발표했나?’

공통의 적을 만들어서 모두가 뭉치게 하고 신전의 입지를 쌓기 위해?

사실 천 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발표할 필요는 없었다. 마왕 어쩌고, 성녀 어쩌고는 일이 일어난 뒤에 발표해도 무방한 신탁이었다.

말해 줘도 뭘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저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마왕에 두려워하며 성녀만 기다릴 뿐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신전은 천 년 동안이나 건재했다. 아니, 건재를 넘어서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우연치고는 꽤 맞아떨어지는 가설이었기에 레이나가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 마차가 공작 성에 다다랐다. 예상은 했지만 이번에도 마차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이 레이나를 환영했다.

「루벨라이트 공녀님! 환영합니다!」

손으로 직접 쓴 플래카드도 보였다. 경계 마을에서 그랬던 것처럼 작은 아이에게서 예쁜 꽃다발도 받았다.

그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검은색 마법을 쓰는 멋진 마법사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님-”

“공녀님의 대단한 마법에 서부는 구원받았습니다-”

“오오-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루벨라이트 공녀님-”

오마이갓.

노래 자체는 괜찮았는데 가사가 실로 끔찍했다. 레이나는 저도 모르게 꽃다발 뒤에 얼굴을 숨겼다. 공감성 수치 테스트 같았다.

‘창피해…….’

그렇다고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감사하다는 마음을 노래로 불러 표현하는데 싫을 리가 없었다.

문제는 감동이 반이라면, 나머지 반이 수치스러움이라는 것이었지만.

어쨌든 공들여(?) 만든 노래까지 감상한 레이나는 고맙다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따로 준비했다며 몇몇 사람들이 꽃다발을 건넸다.

“공녀님!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덕분에 경계 마을에 사는 제 부모님께서 무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더는 품을 수 없을 만큼 꽃다발이 너무 많았다.

그쯤 되자 감동이 수치심을 이겼다. 이미 노래가 끝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 뭐야. 나 이벤트 좋아하네.’

처음도 아닌데 이렇게 기쁠 수가 있다니. 몰랐는데 이벤트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모양이다.

귀찮게 손수 마차를 끌고 온 공작의 이벤트가 모두 통하는 순간이었다.

뜻밖의 자아 성찰을 한 레이나를 노엘이 성 근처의 저택으로 이끌었다.

“서부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자재로 만든 저택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다른 저택을 고르셔도 됩니다. 아니, 둘, 셋, 넷을 가지셔도 괜찮습니다.”

“응? 아니, 괜찮아. 없어도 돼. 나 이미 저택 갖고 있는걸.”

레이나가 거절하자, 노엘은 다른 곳을 소개했다.

“서부에서 가장 감각이 뛰어난 디자이너의 부티크입니다. 공녀님께서 마음대로 이용하실 수 있게 말해 두겠습니다.”

“이곳은 황실에도 납품하는 장인이 운영하는 보석 가게입니다. 원하시는 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그리고 여기는 유명한 주방장이 운영하는-”

노엘의 소개는 계속되었다. 레이나가 말만 한다면 뭐든 주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아니, 괜찮아. 아까부터 말했지만 정말 다 필요 없어. 우리 집에 왕 큰 보석 몇 개나 있고, 전속 디자이너도 있고, 전속 요리사도 있고, 다 있어.”

“그래도 뭐라도 하나는 받아 주셨으면 좋겠는데…….”

노엘이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막으로 부탁을 들어 달라고 간청했다.

“연회에라도 참석해 주시면 안 될까요? 공녀님에게 딱 맞을 드레스도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그 정도는 뭐, 알겠어.”

또 무언가를 단단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연회는 참을 수 없지. 이벤트를 좋아하는 레이나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뒤 레이나는 잔뜩 씻겨지고, 입혀지고, 꾸며져서 휘황찬란하게 장식한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꾸며질 수가 있구나.’

지난 축제 때 너무 꾸몄다고 창피해했었는데, 지금과 비교하면 그땐 거의 평상복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신기하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따질 새도 없이 ‘이게 대체 뭐람?’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렇게 레이나는 걸을 때마다 보석끼리 요란하게 부딪히는 엄청난 드레스를 입고 연회장에서 노래까지 감상했다.

“검은색 마법을 쓰는 멋진 마법사 레이나 루벨라이트 공녀님-공녀님의 대단한 마법에 서부는 구원받았습니다-”

불행히도 아까 그 노래였다. 다만 엄청난 성량과 기교를 자랑하는 가수가 부른다는 것이 조금 달랐다.

‘대단하고 멋진데……. 역시 가사가 좀 그래.’

차라리 사람들끼리 모여서 소박하게 부르는 것이 나았다. 지금은 쓸데없이 웅장하고 가사가 잘 들려서 수치스럽기만 했다.

2절도 있었던 모양인지 노래를 계속하는 가수에게 애매한 미소를 보낸 레이나가, 옆에서 뿌듯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노엘에게 물었다.

“그래서, 진짜 부탁하고 싶은 게 뭐야? 공작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으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 털어놔 봐. 나한테 뭐 부탁할 거 있지?”

그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노엘이 눈동자를 굴리며 대답했다.

“아, 너무 티가 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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