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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40화 (40/143)

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40화

“성에서 구입하도록 하지.”

그래서였다. 굳이 쓸모도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은.

“엇! 정말이십니까?”

체이스가 반색했다. 누구의 기사인지 모를 반응이었다.

“그래. 어차피 기존의 식재료들을 영지 밖에서 수입하던 상황이었으니, 이참에 영지 내의 재료를 소비하는 것이 낫겠지.”

사실 공작 성 내부에 온실을 만들고 작물을 길러도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외부에서 얼린 재료들을 수입해 온 까닭은 루카 때문이었다.

만에 하나 루카가 온실에서 녹을까 봐.

루카는 천방지축인 데다가 호기심이 많은 나이였기에, 괜한 위험은 남겨 두지 않는 편이 나았다.

어젯밤의 회상을 마친 체이스가 빠른 아침 식사를 위해 간결하게 대답했다.

“공작님께서 어차피 작물들을 밖에서 수입해 오고 있었으니, 그럴 바엔 공작 성에서 소비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공작님께서 그렇게 해 준다면야 나야 고맙지. 저택도 그냥 주시더니. 진짜 좋은 사람이잖아?”

얼굴도 모르는 공작에 대한 레이나의 호감도가 상승했다.

“좋아. 앞으로 공작 성의 작물은 전부 내가 담당해야겠어. 물론 공작이니까 아주 많이 심어서 비싸게 팔 거야. 그 정도는 이해해 주시겠지?”

때마침 저택에 도착하여 대충 이야기를 들은 베로니카가 의문의 눈빛을 띠었다.

‘공녀님……? 작물은 제가 관리하고 재배하는 중입니다만……?’

뜻밖의 중노동을 하게 된 그녀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갑자기 죄송합니다만, 공작 성의 재료를 모두 감당하려면 지금 이 상태로는 조금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작 성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생각보다 더 많았다.

성 옆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을 정도이고, 가족이 없는 자들은 성에서만 지내기도 했다.

때문에 온실을 더 짓는다고 하더라도 지금 인원으로는 무리였다.

“사람을 더 구할 순 없어? 주변에 심심해하는 친구들은? 보수라면 잘 쳐줄 자신이 있는데.”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베로니카가 제일 잘 아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마을 사람들은 모두 레이나에게 적대적이었다.

채소를 싸게 주겠다는 말에도 아무도 사지 않았는데, 일을 하겠다고 나설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음…….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레이나는 그녀의 대답과 표정에서 불가능할 것이라는 뜻을 읽어 냈다.

“뭐, 정 없다면 외부에서라도 구해 볼게. 누군가는 하겠다고 하지 않겠어? 아니면 말고.”

좋은 기회이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처음부터 비싸고 맛있는 작물을 자급자족하려고 시작한 일이었기에, 아니면 안 하면 그만이었다.

두 번째 좋은 소식은 뜻밖의 곳에서 일어났다.

늘어지게 하품하며 식당에 나타난 케일란에게서였다.

매일매일 혹독한 청소에 시달리고 있던 그가 피곤에 절은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음? 케일란. 머리에 뭐 칠했어요? 왜 두피가 빨갛죠?”

“……엥?”

가뜩이나 머리털이 다 빠져서 그쪽은 민감한 사안이고, 괜히 얘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인데.

일어나자마자 미아에게 두피를 지적당해 불쾌해진 케일란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칫, 멀쩡한 남의 두피에 관심 끊지? 잠깐! 다들 왜 쳐다봐! 구경났어?”

멀쩡한 두피가 아니었고, 누구라도 신기해하며 구경할만한 상태였다.

미아의 지적에 케일란의 두피 따위 안중에도 없던 레이나가 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정말이네? 빨갛게 뭐가 보여.”

“……뭐라는 거야, 진짜.”

상대가 무시무시한 사람이라서 대놓고 욕은 못 하겠고. 케일란이 아주 작게 구시렁댔다.

“다들 와서 봐 봐!”

그러자 한술 더 뜬 레이나가 모두를 불러 모았다.

체이스와 베로니카 등등은 자리에서 일어나 케일란의 두피로 모여들었다.

“어? 진짜네요? 뭐가 보입니다.”

“으응? 이거 뭐지? 빨간데?”

“앗! 혹시 사라졌던 머리카락 아닐까요? 원래 빨간색이었다고 했던 것 같은 기억이……?”

안나의 그럴듯한 추리에 케일란의 얼굴에 자리했던 주름이 몽땅 날아갔다.

서둘러 자리를 이탈한 그가 번쩍이는 은쟁반에 제 머리를 비추어 보았다.

“으아아악! 진짜다! 진짜야! 머리카락이 자라고 있어!”

다행히 불꽃이 모근까지 모두 태워 버리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신께 감사를 표하는 사이, 레이나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혼잣말했다.

“흐음. 다시는 털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려면 따로 지시해야 하는 모양이네. 진짜 ‘털’만 태운 모양이니까.”

별것 아닌 혼잣말이었지만, 갓 지옥에서 탈출한 케일란에게만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또다시 불꽃을 사용하게 만드는 날이 온다면, 더는 전신의 털이 자라지 못하도록 해 주겠다는 협박으로 들렸다.

다시 식당으로 달려온 그가 아주 바른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신체적인 고통을 주지도 않았는데, 몹시도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앞으로도 요긴하게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한 레이나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나쁜 소식을 듣게 된 것은 식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식전 샐러드를 마시듯 해치운 체이스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성녀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 들으셨습니까?”

사실 따져 보면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의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이야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성한 힘을 사용하는 성녀는 다친 사람을 낫게 해 주고, 마물을 처치하며, 배고픔에 허덕이는 자들에게는 음식을, 어둠의 마왕에게는 징벌을 내릴 존재였기 때문이다.

성녀가 나타나서 싫어할 존재라고는 신탁의 마왕과 이를 따르는 부하들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잠시 침묵이 일었다. 마왕이라고 아주 강력하게 의심받는 사람과 그 부하들의 식사 자리였기에.

그 사이에서 침묵을 깬 것은 처치당할 대상 1호인 레이나였다.

“그래? 몰랐어. 성녀라니 잘됐네.”

“……진심이야?”

개중에서 제일 눈치가 없는 케일란이 되물었다. 다들 궁금했던 점이라 귀를 쫑긋 세웠다.

레이나가 즉답했다.

“진심이야.”

사실 아주아주 조금 X됐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성녀가 소환되는 것은 어차피 정해진 일이었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나도 즐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나쁜 짓을 한 것도, 할 예정도 없으니 당당했다.

단순히 마법이 검다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자신을 엄벌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었다.

성녀의 성격이 일자무식 케일란과 비슷하다면, 다짜고짜 찾아와서 마왕을 해치우겠다고 나설 수도 있겠지.

‘그럼 어떡하지?’

무작정 덤비는데 가만히 있을 수도 없고, 맞서 싸워야 하나?

그렇게 된다면 진짜 마왕으로 보일 텐데.

흐으음. 레이나가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이내 빠른 결론을 내렸다.

‘같이 때려야지, 뭐 어쩌겠어.’

내키지는 않지만 신탁의 마왕 해야지, 뭐. 그 대신 확실하게 성녀를 조져 버릴 생각이었다.

눈에는 눈, 공격에는 공격. 신탁대로 굴러가게 둘까 보냐.

생각을 정리한 레이나가 반쯤 구워진 스테이크에 나이프를 꽂았다.

“헉! 아, 알겠어. 무, 물어봐서 미안…….”

질문을 한 당사자인 케일란이 과하게 놀라 쪼그라들며 조용히 식사를 재개했다.

*

에드워드 신관을 통해 마왕에 대한 전의를 불태운 성녀는, 잠도 제대로 자지 않으며 매일매일 열심히 마법을 단련했다.

물론 성과가 큰 것은 아니었다. 아니,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작고 초라했다.

함께 움직이며 성녀의 레벨을 올려 줬어야 할 케일란이 레이나의 저택에서 바닥이나 닦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케일란과 팀을 맺고, 그가 다 잡은 마물을 한 대씩 때려서 죽이는 방식으로 벌써 레벨 100까지는 올렸어야 하거늘.

불행히도 그럴 수 없었기에, 성녀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쉴 새 없이 마법을 난사하며 겨우겨우 레벨을 5까지 올린 상태였다.

고작해야 이제 레벨 5면서 뭘 잘했다고 푹 잠이 든 건지, 그녀를 물끄러미 보던 대신관이 ‘흐음’ 한숨을 내쉬며 턱 끝을 매만졌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해서 전혀 달라진 점을 못 느끼겠군요.”

“아……! 그래도 성녀님은 아주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곧 마왕을 단숨에 무찌를 수 있을 만큼 대단히 성장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형편없다는 평가에 감히 에드워드가 성녀를 대신하여 변명했다.

물론 곧장 죽을죄를 지었다며 바닥에 넙죽 엎드리기는 했지만.

“알겠습니다. 성녀님을 잘 보필하십시오.”

다행히 대신관은 그의 죄를 묻지 않고 그녀의 방을 떠났다.

그는 늘 그랬듯 홀로 제 뒤를 따르는 성기사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루벨라이트 공작저로 가야겠습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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