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34화
“……그녀 몫의 일이라니? 쟤가 정확히 뭘 하던 앤데……?”
“저택 청소, 빨래, 설거지, 말 여물 주기, 마구간 청소 등등.”
까지는 절대로 아니었지만, 생각나는 걸 모두 입에 담자 케일란이 사색이 되었다.
“지금 나더러 그런 하찮은 잡일을 하라는 거야……?!”
“하찮은 잡일이라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자고로 집이 깨끗하고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어야 일이 잘 풀리는 법이었다.
누가 그런 명언을 했냐면 그냥 레이나의 생각이었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거의 집에 틀어박혀 지냈기에 최대한 깔끔하게 지내고 싶었다.
그런 만큼 안나의 역할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녀가 저택을 관리하겠다고 나서 주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한데 그런 소중하고 귀한 안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다니. 게다가 그녀의 일을 폄훼하기까지.
용서할 수 없었다. 레이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케일란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게 사라지고 대신 목에 초커 같은 불꽃이 생겼다.
“뭐, 뭐야?!”
풀어 주는 건가?! 싶었는데, 하필이면 목에 불꽃이 생겨 생명의 위협이 느껴졌다.
“묶인 채로 일을 할 순 없으니까. 안나, 걔한테 네가 했던 일을 알려 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빠뜨리지 말고.”
사실 안나가 일을 시작한 것도 이제 겨우 하루, 이틀이었기에 했던 일이랄 것이 없었다. 이제 막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뭘 알려 주라는 걸까.
안나가 심각하게 고민하자, 문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집사가 끼어들었다.
“공녀님,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만, 안나는 몸이 아픈 상태라 집사인 제가 대신 알려 줘도 되겠습니까?”
부인을 배려하는 남편의 마음이 반, 너 오늘 잘 걸렸다의 마음이 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모두에게 전해졌다. 단 한 명, 케일란만 제외하고.
“그렇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저택을 오랫동안 관리해 온 집사가 더 잘 알 테지.”
전혀 오래되지 않았고, 관리도 거의 레이나가 했지만, 그렇게 되었다.
허락이 떨어졌기에 집사의 눈이 빛났다.
그의 눈에서 감히 제 부인을 다치게 만든 놈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아무래도 앞으로 케일란이 꽤나 고생할 것 같았다.
아주 마음에 들었다. 레이나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케일란은 모두의 기대를 배반하며 한 차례 반항을 시도했다.
“귀족인 내가, 내가 그따위 일을 할 것 같아?!”
“조이고 태워.”
“으아아악!”
케일란이 목을 붙들고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부위가 부위인 만큼 온도를 높게 올린 것도 아닌데 괜히 오버하면서.
“하, 할게! 할게! 제발!”
케일란이 애원했다.
레이나는 귀찮으니까 제발 한 번에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 참. 그리고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마. 저택 담을 넘어가는 순간 자동으로 줄어들도록 설정해 놨으니까.”
아무리 미워도 죽이고 싶진 않았기에, 적당히 조이다가 풀어지도록 지시해 놓았지만.
이를 알지 못하는 케일란의 눈에 낭패의 기운이 서렸다.
혹시나 해서 덧붙인 말이었는데 진짜 도망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어쩜 저렇게…… 단세포일까. 지금까지 내 능력을 봤다면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지 않나?’
사고라는 걸 할 수 있기는 한 걸까.
정말이지, 귀족이 아니었다면 밥벌이나 제대로 했을지 의심스러웠다.
“자, 가시지요. 할 일이 태산입니다.”
“젠장!”
서두르자는 집사의 말에 케일란이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그러고는 곧장 레이나의 눈치를 보았기에 무척 없어 보였지만.
“열심히 해. 제대로 못 하면 저녁은 지옥에서 먹을 줄 알고.”
싱긋 웃은 레이나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칫! 바로 불만을 내뱉은 케일란이 다시금 눈치를 보더니 이내 순순히 집사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
“실패했습니다. 바로 잡혔습니다.”
케일란의 뒤를 몰래 밟았던 성기사가 보고를 마쳤다.
그는 북부 공작 성에 함께 다녀왔던 이였다.
성공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빨리 잡힐 줄이야.
나름 몸을 쓰는 일은 꽤 하는 편이라서 재미있는 소식을 가져올 줄 알았는데.
대신관이 실소했다.
“실망스럽네요.”
시키는 일은 곧잘 하고, 시키지 않은 일에도 나대며 솔선수범하는 성격이라서 이세계에서 성녀가 오면 제일 먼저 붙여 주려고 했건만.
성격상 아무것도 모르는 성녀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허세라도 부리며 알려 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안 될 것 같았다. 번거롭겠지만 한동안은 신전에 두고 가르치는 편이 나을 듯했다.
예상대로 풀리지 않는 일에 고개를 내젓는데, 한 신관이 급히 찾아왔다.
“대신관님! 샘이 번쩍이고 있습니다!”
신탁이 내려오는 샘을 지키는 신관 중 하나였다. 그의 얼굴이 조급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샘이 번쩍이는 까닭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새로운 신탁이 내려오거나, 신탁에서 예언했던 무언가가 실행되었을 때.
신탁이 내려왔다면 대신관인 자신이 바로 알 수 있었을 테니 그건 아니겠고.
그럼 두 번째 경우라는 건데.
‘설마, 벌써?’
그가 아는 예언 중에 달리 실행될 무언가는 없었다. 성녀가 나타나는 것 외에는.
슬슬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대신관은 급히 샘으로 향했다.
그러자 정말 신관의 말대로 5평쯤 되어 보이는 샘에 눈이 멀 정도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엄청난 빛의 향연에 신관들은 물론, 대신관마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빛이 사라진 것은 약 십 분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언제 빛으로 만연했냐는 듯 적막을 찾은 샘에 작은 인형(人形) 하나가 두둥실 떠올랐다.
“서, 성녀님이시다!”
누군가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성녀님이 드디어……!”
“오오……! 이 세상에 구원의 손길이!”
매사에 침착하고 여유로운 대신관마저 넋을 놓은 채, 샘에 떠 있는 인형을 주시했다.
비단 같은 백발에 도자기 같은 피부. 작은 체구였지만 필시 그 안에 숨겨진 힘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으리라.
대신관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아주 오랜만에 그의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무언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서둘러 신관들에게 명령했다.
“다들 무얼 하고 계십니까? 당장 성녀님을 귀빈실로 옮기고 의사를 부르십시오.”
*
집사는 케일란을 아주 혹독히 굴렸다.
어느 정도냐면, 매일매일 검술 연습을 하여 더는 근육통이 생길 리가 없는 팔뚝에 새로운 근육통을 만들 만큼 굴렸다.
“이것도 닦은 거라고 닦은 겁니까? 어떻게 아직도 바닥이 새카말 수가 있지요?”
“완전히 열심히 닦았다고! 벌써 다섯 시간째! 원래 새카만 색의 바닥 아니냐고!”
그쯤 되자 케일란은 소소하게 반항했다. 한쪽 어깨를 제대로 쓰지도 못하는데, 다섯 시간이나 같은 바닥을 닦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쯧쯧쯧.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변명만 하시다니. 안나는 저 작은 체구로 한 시간 만에 모든 바닥을 깔끔하게 청소했는데.”
결코 그런 적은 없었지만, 집사는 대체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냐며 케일란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보통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화를 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제기랄! 처음이라 미숙해서 그런 거라고! 한쪽 어깨도 다쳤고!”
다행히 케일란은 두 번째 타입이었다. 새 걸레를 손에 쥔 그가 다시 맹렬하게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십 년 묵은 때가 그의 강력한 힘에 의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감히 귀족인 그에게 이토록 쏠쏠하게 복수를 하게 될 줄 몰랐던 집사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다시 밭일을 하려고 나가려던 때였다.
“저녁 드십시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다. 오늘의 일과가 끝이라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오, 벌써 식사 시간이라니.”
“칫.”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자신에겐 개도 안 먹을 죽 같은 것을 주겠지.
그리 생각하며 케일란이 바닥을 닦는 손에 더욱 힘을 주는데, 위층에서 긴 하품을 하며 내려오던 레이나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뭐 해? 저녁 먹어야지.”
엥? 나도?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케일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 그를 대충 지나치며 레이나가 말을 이었다.
“다이어트해? 싫으면 말고.”
“아, 아니! 먹을 거야!”
케일란이 들고 있던 걸레를 냅다 집어 던지며 벌떡 일어났다.
혹여나 집사가 트집을 잡을까 봐 레이나의 뒤에 바짝 붙었다.
그런데 설마 다 같이 먹는 건 아니겠지? 숫자는 적어도 신분의 차이는 있잖아.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당연하다는 듯 모두가 한 식탁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심지어 자신처럼 암살을 시도하려다가 붙잡힌 포로까지.
마왕이라 개념이 없는 건가? 아니,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다 함께 저녁을 먹는 게 말이 돼?
이상하다고 생각한 케일란이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의문이 허기를 이기지 못했다.
얼른 스푼을 들고 고소한 냄새가 마구 풍기는 수프를 먹으려는데.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은스푼에 이상한 것이 비췄다.
마치 머리카락이 모두 사라져 대머리가 된 듯한 자신의 얼굴이 같은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