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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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틴이 돌아간 뒤, 레이나는 큰 상심과 고민에 빠졌다.
‘이 나쁜 공작 놈들.’
나라에 공작이 많은 것도 아닌데, 왜 하나같이 나쁜 놈들뿐인가.
어떻게 세금 조금 안 냈다고 집을 뺏어 갈 수가 있어? 아니, 애초에 왜 세금을 안 낸 거야, 공작이라는 작자가.
사실 조금 안 낸 것이 아니라서 윈터스노우 공작은 충분히 그럴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해는 해도 분노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까 그 공작 영식이 돌아가서 잘 얘기해 줘야 할 텐데.’
고지식해 보이는 말투나 태도를 떠올리면 안타깝게도 그럴 것 같진 않았지만.
‘생각을 해야 해. 쫓겨나지 않을 방법을.’
온실을 짓고 사람까지 뽑아 놨는데 여기서 쫓겨날 순 없었다.
저택을 사겠다고 계속 우기거나, 월세를 내겠다고 해서라도 남아야만 했다.
거절하지 못할 큰 금액이라도 제시해서 말이다.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공작쯤 되면 돈이 많긴 할 테니 싫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최후의 방법을 쓰는 수밖엔 없었다. 어지간한 사람들에게는 통하는 방법이었다.
‘……좀 빌어 봐야지, 뭐.’
갈 곳이 없으니 제발 조금만 더 살게 해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으면 봐줄지도.
이제 딸린 부하도 꽤 되니 단체로 빌면 봐줄 가능성이 컸다.
‘그사이에 모르는 척 월세까지 내서, 돈까지 받아 놓고 쫓아내려고 하냐며 정식으로 항의를 하면 되겠지.’
곰곰이 따져 보면 먹힐 가능성이 0에 수렴할 정도로 얼렁뚱땅 계획이었지만,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런 심각한 고민을 하며 아침 식사를 끝내자, 집사의 부인인 안나가 레이나를 찾아왔다.
“모처럼 거둬 주셨는데 가만히 있기 죄송해서요. 여기서 제가 할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그나마 제가 잘하는 청소와 정리를 도맡아 하는 게 어떨까 싶었습니다.”
그녀는 부재중이었던 하녀장 역할을 도맡아 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침 필요했던 상황이기는 했다.
방은 각자 알아서 청소한다지만, 이 큰 저택을 깨끗하게 관리하려면 담당하는 누군가가 필요했다.
“좋아.”
찰나의 고민도 하지 않은 레이나는 안나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보수로는 코를 지급했다.
“이, 이런 것까지 주지 않으셔도 되는데……!”
이미 남편과 딸이 거액의 보수를 받은 데다 거취까지 제공하는 상황이었기에 무료로 봉사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세상이 얼마나 험악하고 차가운데, 무료 봉사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걸 미리 줘야 지금처럼 큰일이 났을 때 옆에서 열심히 빌어 줄 것 아닌가.
“그냥 주는 거 아니야. 잘하라고 주는 거야.”
안나가 너무나도 질겁하자 받아 두라는 뜻으로 그리 대답한 레이나는 문득 이전에 동상을 옮기다가 기절 직전까지 갔던 집사를 떠올렸다.
끼리끼리 어울린다고, 그의 부인인 안나에게서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잘하라고 하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냅다 열심히 해 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너무 깨끗하게 관리하진 마. 그런 곳은 오히려 부담스럽고 불편하니까. 적당히 사용감도 있어야 마음 놓고 지내지.”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안나는 집사가 종종 보였던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
다행히도 남편보다는 눈치가 빠른지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로써 저택에 필요한 모든 구성원이 모이게 되었다.
거의 소수 정예 부대 수준이었다. 필요한 사람은 다 있고, 필요 없는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의 인력이 주로 농업에 치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완벽했다. 당장 머물 집이 없다는 것만 빼면.
‘그게 제일 중요하지만…….’
그러나 무릎을 꿇어서라도 빌 거라서 괜찮았다. 방금 빌 사람이 한 명 더 늘어서 마음이 든든했다.
그렇게 레이나가 그럭저럭 가벼워진 기분으로 베로니카에게 오늘 심을 약초의 효능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을 때였다.
익숙한 얼굴이 다시 저택을 찾았다.
사람 몇 정도는 들어가고도 남을 듯한 커다란 짐마차와 함께.
‘……뭐야. 설마 저 마차에 날 처박아서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아니겠지?’
긴장하며 말에서 내리는 로스틴을 째려보는데, 그 역시 썩 달갑지 않다는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 모두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표정은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어느 한쪽이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상황처럼 보였다.
모두가 긴장으로 삽과 호미, 모종 등을 꽉 쥐고 숨을 죽이는데, 서로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제발 봐줘. 월세 낼게.”
“소유권을 양도하지.”
……? 응?
품에서 서류를 꺼내던 로스틴의 움직임이 멈췄다.
레이나는 가슴 앞에 모아 빌려던 손을 순식간에 등 뒤로 숨겼다.
아주 잠깐의 침묵 뒤, 언제 비굴한 말을 꺼냈냐는 듯 그녀가 표정을 달리했다.
“그래? 뭐, 정 그렇게 하겠다면야. 공작님께서 좋은 결정을 하셨네. 그런데 손에 그건 뭐야? 설마 소유권 양도에 관한 서류? 감추지 말고 당장 이리 내놔 봐. 빨리.”
분명히 방금 봐 달라고 비굴하게 말을 꺼냈던 것 같은데.
한 박자 늦게 말을 꺼낼걸. 아니, 서류라도 조금 늦게 꺼낼걸.
아주 조금 후회가 된 로스틴이 혀를 차며 서류를 완전히 꺼냈다.
“……그래. 소유권을 양도하겠다는 서류다. 단, 세금을 체납했던 전적이 있으니 조건을 붙여서.”
“무슨 조건인데? 말만 해.”
조건을 보지도 않고 그리하겠다며 눈을 반짝이는 꼴을 보니, ‘조건으로 정체를 말하라고 할걸.’이라며 로스틴이 속으로 다시금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서류를 내보인 뒤였다.
말을 번복하는 꼴사나운 짓을 할 순 않았기에, 서류에 적힌 내용 그대로를 레이나에게 읊어 주었다.
“연 1회 징수했던 재산세를 주 1회로 변경하여 나누어 받도록 하지. 한 번이라도 체납한다면 다시 공작령으로 귀속된다는 조건도 함께.”
“잠깐만. 무슨 폭탄 돌리기도 아니고 한 번이라도 늦으면 다시 뺏긴다니, 너무하잖아? 그냥 미리 낼게. 한 10년 치 다 받아 가.”
“자신이 없는 건가?”
긍정적인 대답을 듣기 위해 일부러 도발한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레이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자신 없어.”
깜빡 잊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성격상 깜빡 잊을 가능성이 너무 컸기에, 차라리 고액의 월세를 내라는 조건이 더 나았다.
상대가 귀족이니만큼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로스틴이 침묵했다.
레이나 역시 침묵했다.
설마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해서 당장 나가라고 하진 않겠지 생각하며.
말없이 서로를 관찰하며 생각을 읽어 보려 노력하던 두 사람은 잠시 뒤, 또다시 동시에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한 번까지는 봐줘.”
“좋아, 그럼 미리 내도록 해.”
그러나 이번에는 레이나보다 로스틴이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주에 1회씩 내는 대신, 다음 주의 세금을 전주에 미리 내도 되는 것으로 합의하지. 그리고 한 번까지는 늦어도 봐주겠다.”
으악. 뒤늦게 레이나는 자신이 눈치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으, 젠장. 조금만 더 입을 닫고 있을걸. 하지만 이미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 뒤였다.
한 번까지는 봐주겠다니, 꽤 양보한 게 틀림없으리라.
물론 두 번 늦을 수도 있기에 확실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천재지변이 생길 때도 봐줄 거지? 지리상 강한 눈보라가 한 달 내내 내릴 수도 있잖아? 세금을 내러 가고 싶어도 낼 수 없게 말이야.”
“……좋다. 그 정도는 융통성 있게 봐주도록 하지.”
애초에 그녀가 세금을 내러 오기 전에 매주 찾아와 받을 생각이었다.
하나 나름 공작 영애라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부탁하니 체면을 봐서라도 알겠다고 하는 것이 마땅했다.
서로에게 그럭저럭 괜찮은 계약을 체결한 두 사람이 처음보다 많이 누그러진 눈빛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오오, 역시 우리 공녀님.’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던 레이나의 부하들이 속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얼마야? 가진 현찰이 없어서 내고 싶어도 못 내거든. 혹시 황금이나 보석 같은 걸 줄 테니 바꿔 줄 수 있어?”
“어려운 일도 아니니 그렇게 하지. 먼저 이것부터 해결하고.”
로스틴이 동행한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에 짐마차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서둘러 짐칸을 열어 안에 있던 자를 끌어 내렸다.
“으, 으아아악!”
바닥으로 내던져진 루벨라이트 공작가의 집사가 비명을 질렀다.
가뜩이나 동상에 걸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아픈데, 딱딱하고 찬 바닥에 부딪히니 산산조각이 나는 고통이 일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이 눈앞에 존재했다.
아니, 온 사방에 깔려 있었다.
저택을 모두 둘러싸다 못해 하늘에까지 둥둥 떠 있는 검은 불꽃에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 모습에 로스틴의 눈빛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로스틴이 바닥에서 웅크린 채 미동하지 못하는 집사의 얼굴을 레이나에게 내보였다.
그러자 레이나의 집사가 헉 숨을 삼키며 손에 들고 있던 호미를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