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999 흑막 공녀가 되었다 10화
*
정말 레이나의 말대로 불꽃은 두 시간쯤 지나자 사라졌다.
기사의 정수리 위에 고정되어 그가 걷는 대로 따라다니다가 말이다.
‘대체 정체가 뭐지?’
로스틴은 이미 수 시간 전에 불꽃이 사라진 기사의 정수리를 하염없이 응시하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검은빛을 내는 불꽃 마법이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신탁의 마왕에 관한 걸 제외하고는.’
남을 해치려는 불길한 마법일수록 검은빛을 띠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부터 지금까지 완벽한 검은색의 마법은 없었다.
하지만 공녀가 사용한 마법은 확실한 어둠이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고 진한 어둠.
‘그런데 남을 도우려던 목적이었던 것 같다는 말이지.’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언가 잘못 보기라도 한 것일까?
자신뿐만 아니라, 마물 토벌에 동행한 수많은 병사들과 함께?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하지만 자신이 본 것이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마물을 내쫓은 공녀의 눈이 퍽 맑고 투명하기 그지없었다.
말투가 짧고 직설적인 편이기는 하였으나, 음습한 마왕의 그림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지.”
“저, 말씀이십니까……?”
로스틴의 혼잣말에 집무실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기사가 대답했다.
“저, 공작님. 저도 이만 흩어진 마물들을 추격하는 토벌대에 합류할까요……?”
아까까지 머리 위에 검은 불꽃을 띄우고 있던 기사였다.
불꽃은 사라졌으나,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지척에 두고 지켜보던 참이었다.
로스틴의 시선이 시계로 향했다. 불꽃이 생겼다가 사라진 지 세 시간째.
만에 하나는커녕, 레이나의 불꽃 덕분에 회복한 혈색이 만개한 꽃처럼 피어올라 있었다.
물론 세 시간째 생각에 잠긴 로스틴과 단둘이 남겨져, 표정은 늦가을의 썩어 바스러진 낙엽보다도 좋지 못했지만.
“그러는 게 좋겠군.”
긍정이 떨어지자 기사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그가 당장 날아갈 기세로 벌떡 일어나는데, 로스틴이 말을 이었다.
“병력이 많을수록 마물들도 더 빨리 정리될 테니까.”
그러면서 동행하겠다는 듯 깃펜을 내려놓으며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 굳이요……?’
레이나 덕분에 발그레 달아올랐던 기사의 뺨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공작님까지 안 가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만…….”
“내가 합세한다면 더 빨리 끝나겠지. 서둘러 마물들을 정리해야 아까 그 공녀를 감시할 병력도 확보될 테고.”
“그건, 그렇겠지요…….”
공작님만큼 센 사람도 없으니까요.
사실 다른 기사들은 없어도 무방할 만큼 로스틴은 전무후무한 힘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북부에 출몰하는 마물들은 기사 서넛이 함께 공격해야 겨우 한 마리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는데, 로스틴은 홀로 여럿을 한 번에, 그것도 거뜬히 상대할 정도였다.
그래서 공작 일가를 한순간에 파멸케 만든 마왕의 저주조차 혼자 견뎌 낸 게 아닐까, 모두가 생각했다.
그만큼 로스틴은 전 대륙을 통틀어도 손에 꼽을 만큼 강했다.
물론, 그러한 이유로 그와 동행하는 것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힘의 유무를 떠나서 로스틴은 너무 무뚝뚝하고 차가웠다.
‘누가 북부 대공 아니랄까 봐, 그렇게까지 차가울 필요가 있냐고요.’
북부 사람들이 매정하고 차가울 거라는 편견은 버리라고 주장하고 싶은데.
공작인 로스틴이 너무나도 전형적인 북부 대공의 이미지라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워낙 표정이 없는 데다가 말수도 적어서 둘만 있기에는 몹시 어색했다.
자신보다 열 살이나 어린데도 불구하고 너무 어른스러운 점도 기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더불어 신분의 차이도 심했다.
아니, 아니. 그냥 다 불편했다. 그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토벌대를 찾아 합류할 때까지는 계속 로스틴과 동행해야 했기에 생각만 해도 속이 쓰렸다.
기사는 그냥 혼자 있고 싶었다.
한편 그런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로스틴이 채비를 마치고는 집무실을 나섰다.
기사가 눈물을 삼키며 그 뒤를 따랐다. 차라리 아까 맞은 불꽃에 갑자기 부작용이 생겨서 쓰러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
마법사 카르만은 오랜만에 들어온 큼지막한 의뢰에 들떠 있었다.
‘고가의 의뢰라 냉큼 낚아챘더니, 고작해야 이제 갓 성인이 된 18살짜리 여자를 죽이는 일이라니.’
보통 암살 의뢰는 5골드 선에서 오가기 마련인데, 그의 40배인 200골드가 보수였다.
대체 어떤 여자이기에 그런 고액의 현상금을 걸었을까.
너무 큰 금액에 불안과 의심이 피어났지만, 그런 것들도 돈을 이길 순 없었다.
물론 보험을 조금 들어 둔 참이었다. 성공만 한다면 십 년은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 생기니 확실하게 말이다.
“그러니까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고? 하! 그런 간단한 일이라니.”
“북북서 끝이라니, 눈 때문에 그쪽으로 갈 수나 있는 거야? 정말 그런 곳에 사람이 살 수가 있어?”
용병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아냥대며 물었다. 그들은 총 넷이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일 정도는 죄책감 없이 언제든 손쉽게 할 수 있는 자들이기도 했다.
아까부터 반복되는 질문에 마법사 카르만이 싸늘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래서 안 하겠다는 건가? 불만이 있거나 내키지 않는다면 당장 돌아가도 좋아.”
누가 죽이든 성공만 한다면 각각 10골드씩의 보수를 주겠다고 한 뒤였다.
빨간 고수머리의 용병이 관자놀이를 긁으며 대답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너무 쉬운 일에 우르르 몰려가는 것 같으니까. 혹시나 해서 그렇지.”
“그럼 닥치고 일이나 해. 성공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보수를 지급할 테니.”
“흠, 흠. 알겠어, 알겠다고.”
“거참, 농담한 걸 가지고 정색하기는.”
용병들이 애써 농담이었다며 어색하게 하하 웃어 댔다.
가뜩이나 윈터스노우 공작을 주축으로 한 기사단 때문에 북부엔 일거리도 적은데, 별것도 아닌 자존심에 10골드나 벌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그리하여 다섯 남자는 심연의 저택으로 향했다.
갓 성인이 된 여자의 목숨을 얼마나 잔혹하게 끊어 놓을지 상상하면서 혹독한 추위를 뚫고 나아갔다.
그렇게 북북서 끝을 향해 두 시간쯤 걸었을 때, 카르만 일행은 뜻밖의 남자 둘과 조우하게 되었다.
전신을 무장한 기사 한 명과, 깔끔한 검은색 외투에 장검만을 챙긴 청년이었다.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안색의 기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사적으로 검신에 손을 올렸다.
“……마물? 머리카락이 있는 걸 보니 사람인가?”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열심히 카르만 일행을 관찰했다.
각양각색의 외모에 검은색 일색의 의복까지.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이건 분명 그거였다.
“당신들은-!”
“용병. 아니, 암살자들인가? 하나는 마법사군.”
로스틴이 기사의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벌써 길고 묵직한 검이 들려 있는 상태였다.
대사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해하기는커녕, 드디어 로스틴과의 오붓한 침묵의 시간에서 벗어난 기사가 경쾌하게 검을 빼 들었다.
그의 매서운 눈이 적의 능력치를 가늠했다.
적 하나하나만 따진다면 자신보다 한 수 아래. 그러나 다섯이 뭉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대한 흩어지게 만들어서 하나씩 상대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인 로스틴이 검으로 용병 셋을 무력화시키며 물었다.
“여긴 내 영역인데, 무슨 일이지?”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고, 만나자마자 갑자기 공격하며 물을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답을 들을 가치도 없었다.
북북서의 끝은 북부 지방 중에서도 가장 추운 곳이었다.
더욱이 마왕이 보내오는 마물까지 이따금 쏟아지는 곳인 터라 어지간한 사람은 살 수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북북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공작가의 기사와 사용인, 그리고 그들의 가족 정도였다.
그런 곳에 무장하고 떼거리로 나타난 남자들이라니.
누구를 노리고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필시 좋은 의도로 온 것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 대답은 필요 없었다. 어떤 말을 듣든 결과는 같을 테니까.
“제기랄, 다들 뭐 하는 거야?! 빨리 해치워!”
아니나 다를까, 마법사로 보이는 남자가 암살자들에게 윽박질렀다.
그쯤 되자 로스틴의 검에 망설임이 사라졌다. 바람처럼 움직인 그가 적을 단숨에 쓰러뜨렸다.
건장한 남자 넷의 자유를 순식간에 빼앗은 로스틴은 마지막으로 남은 마법사 카르만을 향해 검을 돌렸다.
하지만 약삭빠른 카르만은 쓰러진 용병들에게 화염 마법을 난사하고는, 목에 걸고 있던 소형 이동석을 깨물어 재빨리 도망쳤다.
로스틴은 그를 쫓는 대신, 쓰러진 용병들의 상태를 살피는 기사에게 물었다.
“살았나?”
“……아니요.”
아무리 심문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방금 전까지 함께했던 동료들을 죽이고 도망치다니.
기사가 혀를 찼다.
“얼굴은?”
“보았습니다. 소형 이동석으로는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테니 서둘러 사람을 풀겠습니다.”
로스틴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사가 몸을 돌려 공작 성이 있는 방향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자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다니.
반드시 도망친 마법사를 찾아내 의뢰자까지 모두 없애 버릴 것이다.
로스틴은 네 구의 시신에 싸늘한 시선을 던지고는 다시금 흩어진 마물을 찾으러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