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활기차게 출발한 것까지는 좋은데, 나의 행보는 시작과 거의 동시에 막히고 말았다.
던전에 입장하는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내가 도착하자 보안요원들은 나를 극진하게 던전 입구까지 안내해줬다.
예전에는 이 사람들 피해서 몰래 들어가느라 바빴는데 감개무량하다.
그리고 보스 몬스터를 찾아 나서는 것도 비교적 수월했다.
그들이 제공한 지도에 보스 몬스터의 방까지 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편하네요.”
- 그러게.
보안요원들이 안내해주겠다는 것을 거절하고 우리는 지도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초토화된 던전 주변을 정리하고 간혹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잡는 것도 바빠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뭔가 구린 목적이 있나 싶었는데, 시커먼 눈 밑 다크 서클을 보니 아무래도 순수한 호의였던 것 같다.
“스킬 쿨 타임, 아직 4시간 정도 남았죠 ?”
- 응. 아마 네가 싸울 때는 다시 실체화할 수 있을 거야.
“같이 싸우게요?”
- 당연하지.
당연하긴 뭐가 당연해.
“말도 안 돼요. 서지한 씨는 근접 전투가 주특기인데, 어떻게 접근하려고요? 괜히 가까이 갔다가 호롭하고 먹히면 끝장이라고요.”
- 호롭…… 이라니.
“그냥 제가 멀리서 포격으로 찢어버릴게요. 의외로 한 방에 해치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 그래, 나는 연약하니까 네 옆에서 응원할게.
서지한은 선선히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불과 몇 시간 후 포식자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여유다.
하긴, 그가 초조해할 이유가 없긴 하다.
서지한은 내가 해낼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거의 7할 정도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최후의 전당에서 손짓 한 방에 죽어나가는 왕들을 겪었으니까.
지금의 나라면, 지금 나의 모든 힘을 다한 공격이라면 포식자도 충분히…….
- 저기 있군. 우릴 쳐다보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었나?
서지한의 말대로 고고한 자태로 앉아있는 화염 닭이 보였다.
내가 예전에 죽였던 불사조와 비슷한 부류인 것 같은데, 걔보다 좀 더 통통하게 생겼다.
불꽃 깃털인 줄 알았던 털은 그냥 색만 붉은 그냥 털이었다.
다만, 머리 위에는 닭 벼슬 대신 새파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는데, 그게 저 몬스터의 왕관인 듯 싶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이쪽을 확인한 녀석이 순간 흠칫하며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화염 닭이 괜히 경계할까 봐 일부러 거리를 좀 둔 상태로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一”
그러나 나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화염 닭은 기겁하고 푸드덕거리더니 하늘 높이 날아서 달아나버렸다.
“……도망쳤네요. 이건 예상 못 했는데.”
- 죽이려고 찾아왔다고 생각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제가 피난 가버리면 자기들은 다 죽는데. 일단 내 말을 들어보는 게 낫지 않아요? 쟤네들은 지금 이 상태가 최악이잖아요.”
- 그건 그렇지. 그냥 겁이 많은 성격인가?
“하아, 여기서 쟤만 쫓아다니면서 시간 다 쓸 여력 없어요. 그냥 다음 던전 가죠.”
나는 미련 없이 그 던전을 버리기로 했다.
그나저나, 예전엔 보스 몬스터는커녕 일반 몬스터만 봐도 무서워서 떨었는데 지금은 보스 몬스터가 날 보고 도망치는구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탈출석을 써서 밖으로 나오니 보안요원들이 의아한 시선을 던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 내가 여기 보스 몬스터를 죽이고 나올 거라 생각했나 보다.
으음, 죽이면 뿔을 먹어야 하는데 남은 시간 안에 다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지금 상황으로서는 큰 의미가 없는 짓이다.
그나저나 최근에는 던전을 완전히 공략하고 나오거나 아니면 내 던전만 다녀서 탈출석을 쓰는 것도 오랜만이다.
들어오면서 챙길 생각도 못했는데, 예전에 사두고 잊어버린 여분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다음 던전, 또 다음 던전을 두드리길 반복했다.
“확실히, 예전에 봤던 애들이랑은 성격이 좀 다르긴 하네요.”
- 그러게.
“지성이라는 게 느껴져요. 얘가 뭔가 생각이라는 걸 하는구나 싶고……."
- 맞아. 마주치면 공격하는 야생동물 같은 이미지였는데, 녀석들도 나름대로 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져.
“방금 만난 녀석은 특히 더 그런 느낌이었죠?”
- 응.
체크를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대략 열 마리 이상의 왕들을 만났다.
처음에는 포식자와 맞설 테니 힘을 빌려 달라는 말로 설득을 했는데, 그들은 코웃음 치며 믿지 않았다.
개중에는 아예 고개를 돌려 버리는 녀석도 있었다.
포식자와 싸우더라도 어차피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예 싸운다는 말 자체를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냥 뿔을 계승해 제 잇속을 채우려는 수작질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나를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던지긴 했지만, 결코 나와 싸우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저 도망칠 뿐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간혹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돌아보는 개체도 있었다.
도망치는 등을 향해 충왕포를 쏘면 충분히 죽일 수 있는데 왜 공격하지 않는지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아마 나를 만난 순간 이미 반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드문드문 ‘우리들의 마지막 시간을 방해하지 마라!’하고 짜증스럽게 일갈하는 놈들도 있었다.
그러나 방금 만난 몬스터만은 뭔가 좀 달랐다.
온몸을 청금석 같은 예쁜 비늘로 덮고 있는 푸른 용이었다.
그는 죽이고 싶으면 죽이라는 듯 차분하게 앉아 나를 맞이했다.
용의 꼬리에서 간간이 전기 불꽃이 튀긴 했지만 나를 공격할 의도는 없는 것 같았다.
내가 내미는 소통 유과까지 얌전하게 받아먹은 용은 엘파니스 이후 처음으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사피엔티르. 지금은 사피니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 나에게 무슨 볼일인가? 전당의 지배자여.’
이 예의와 교양이 철철 넘치는 소개에 내가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사피니스는 정말로 우아했다.
이 용이 푸드덕거리며 꼴사납게 도망치는 모습은 상상도 가지 않을 정도였다.
‘나의 뿔을 원한다고? 그렇군. 떠나기 전 힘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인가. 하긴, 그대의 작은 몸으로는 남은 시간 동안 아무리 먹어도 끝나지 않겠지.’
‘떠나지 않고 싸울 생각입니다!’
처음에는 사피니스도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포식자와 대적하겠다는 것은 그저 핑계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워낙 점잖은 성격이라 대놓고 나를 조롱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내가 거듭 반복하자 미심쩍은 기색으로 나를 응시하더니 눈매를 가늘게 접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대가 진심으로 대적하고자 한다면 나는 더욱 왕관을 넘겨줄 이유가 없군. 어떻게 하겠는가? 나를 죽이고 가져가길 원하는가?’
마치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말투였다.
‘크헤헤, 버러지 같은 인간 놈들 다 죽어!’같은 부류라면 몰라도 이런 얌전한 몬스터를 죽일 이유는 없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의 이야기는 끝난 것이로군. 나의 생각은 확고하다. 이만 나가주겠는가?’
사피니스는 권유와 동시에 게이트를 열었다.
정중한 말투여서 더 거부하기 힘들었다.
다음 왕을 보러 가야 하기도 했기에,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던전을 나왔다.
모처럼 뭔가 말이 통하는 것 같은 몬스터였는데.
- 그런데 여기 적혀 있는 던전 외에 다른 곳은 더 가보지 않아도 괜찮겠어?
다음으로 어디를 갈까 위치를 고르는데 서지한이 물었다.
“이것만 해도 시간 안에 다 돌아볼 수 있을지 미지수인데요. 음, 그리고 사실 그렇게까지 절박하지는 않아요. 저는 지금 상태에서도 제가 이길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 나도 그래.
“만약 질 것 같다고 생각했으면 엄마나 승주를 만나서 시간을 보냈겠죠? 제가 이겨요. 이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지금 몬스터들 만나보는 건, 그래도 그나마 좀 더 안정적으로 가려는 거죠.”
- 응.
“그럼, 다시 다음 던전으로 가보죠.”
그 이후로도 많은 던전을 돌아보았다.
노력을 기울인 보람이 있었는지, 기쁘게도 몇몇 던전에서 나에게 뿔을 넘기겠다는 왕들이 나타났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어떻게 죽든 마찬가지라는 기분인 것 같았다.
아예 뿔을 넘겨줄 테니 피난을 가자고 나를 유혹하는 왕도 있었다.
뿔을 넘기고 신하가 되면 함께 피난을 가 살아남을 수 있으니 꽤 계산을 잘하는 왕인 셈이다.
그래도 대부분의 왕은 높은 확률로도 망쳤다.
대충 10 중 8 정도는 도망친 것 같다. 나머지 2는 이야기를 좀 듣는 척하다가 도망쳤고.
사피니스 같은 부류는 오직 사피니스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도망 행위도 서지한이 실체화할 수 있게 되면서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들로서는 아무리 도망쳐도 앞을 막아서는 서지한을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때부터는 반쯤 협박이었다.
뿔 내놔 뿔! 왕관 내놔 왕관! 같은 느낌?
순순히 왕관을 넘기면 목숨만은 살려주마一 라고 서지한이 협박하긴 했지만 뿔을 넘기지 않더라도 죽이지는 않았다.
워낙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강경수단을 좀 써본 것뿐이다.
그래도 개중에 겁이 엄청 많은 왕들이 달달 떨면서 왕관을 넘겨준 덕분에 충왕포를 좀 강화할 수 있었지.
이제 충왕포는 L35.
9마리의 왕을 협박하고 설득하는 데 성공했으니 꽤 높은 소득을 올린 셈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최후의 방벽은 10분을 남기고 있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결정이다.
지금부터는 돌이킬 수 없다.
물론, 다른 결정을 할 생각 같은 것은 추호도 없지만.
최후의 방벽이 곧 사라집니다.
피난을 원하실 경우 지금 즉시 피난을 선택하여 부수적인 조항을 설정하시기 바랍니다.
조항을 설정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 영역이 설정됩니다.
긴급 피난 피난 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