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7화 (197/231)

197화

나는 반서후를 돌아보았다.

이들에게 어디까지 알려줬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는 내 시선을 받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거 말고 말로 하라고요.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피난 과정에 대한 것은 대부분 전달된 것 같다.

그러니까, 왕은 어떤 땅을 가져갈지 결정할 수는 있지만 누구를 데려갈지 일일이 선택하지는 않는다.

물론, 신하는 예외다. 그들은 당연히 왕과 함께 이동한다.

비록 엄마나 승주와 같은 비각성자들은 신하가 되어 이동을 하더라도 그걸 견딜 수 있느냐는 문제가 있지만.

신하를 제외한 다른 각성자는 왕이선 택한 영지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때 함께 이동하게 된다.

확실히, 그 수많은 인원을 일일이 선정하는 작업을 10시간 안에 마치는 건 불가능하다.

반서후가 이들에게 그렇게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되지만, 직감과 눈치로 대충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전당의 지배자가 피난 때 가져갈 영지를 선택한다는 내용까지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자신들의 땅을 선택 해달라고 아우성 치고 있었으니까.

“일단 저는 피난하는 것보다 맞서 싸우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나의 선언에 좌중에 짧은 정적이 감돌았다.

그러나 곧 혼란이 파문처럼 번져가기 시작했다.

맞서 싸운다고? 가능한 건가? 승산이 있나? 그런 방법이?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등 온갖 질문이 터져 나왔다.

“괜히 위험을 감수하고 맞서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피난이라는 방법이 제시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왜 굳이 싸운다는 것이지요?”

그 질문에 나는 모든 사실을 담백하게 설명해주었다.

피난을 하면 각성자만 살아남는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봐온 던전의 몬스터들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것까지.

피난을 할 수 있는 땅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에서 지구 전체를 피난시킬 수 없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각성자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좀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충격 덕분인지 대부분은 나의 결정을 납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난을 하면 각성자들은 확실하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만약 싸우는 걸 선택해서 패배하면요? 저 괴물이 달을 갉아먹는 것처럼 지구를 먹는 꼴을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핵무기도 안 통하는 저걸 어떡할 셈입니까? 멸종입니다. 다 죽는다고요!”

“피난을 하면 확실하게 살 수 있었을 사람들을 당신의 결정으로 죽이는 겁니다.”

살고 싶다는 마음을 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각성자를 제외한 모든 이가 죽는다는 말을 듣고도 별다른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은 조금 환멸감이 느껴졌다.

이 사람들에게는 비각성자 중에 소중한 사람이 없는 건가?

피난을 가고 나서 던전 몬스터 신세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싫지도 않나?

내가 침묵하는 동안 피난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솔직히, 예상은 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지구에서도 꽤 상위권에 드는 발언권을 가진 국가의 헌터 단체 대표들이다.

어디 가서 소홀한 대접받을 사람들이 아니다.

그러니 ‘선택’이라는 단어 앞에서 당당한 것이다.

당연히 자신들이 선택받을 거라고 여기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걸 의식도 하지 못하고 있겠지.

회의장의 발언 수위는 그동안 점점 노골적이고 저열해지고 있었다.

민간인들은 애초에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필요 없다든가, 심지어 생존권도 없는 게 당연하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대부분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몇몇은 동의하는 듯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픈 일이지만 각성자와 비각성자가 같을 수는 없지요.”

그들 중 가장 나와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점잖은 척 중얼거리는 것을 들으며 나는 이 촌극을 끝내기로 했다.

슬슬 이 자리에 온 목적을 챙겨야지.

그러나 그전에, 나에게 날카로운 질문이 돌아왔다.

제일 먼저 이 분위기를 주도했던 사람이다.

“당신에게 피난을 하면 확실하게 살아남을 수많은 생명을 위험에 몰아넣을 권리가 있습니까?”

내 인상이 워낙 순한 탓인지 교묘하게 죄책감을 자극하면 통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하지만 나는 도리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당하지 못 할 이유가 없었다.

“네. 당연히 있죠.”

설마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는 듯 내게 질문을 던진 사람은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슬픈 일이지만, 왕과 왕이 아닌 일반 각성자가 같을 수는 없지 않겠어요?”

방금 들었던 말을 인용해 그대로 돌려주자 이 발언의 원래 주인이 얼굴이 붉혔다.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모르겠지만, 알 게 뭐야.

나는 지금 엄청 참고 있단 말이다.

너는? 너희들은? 피난 못 가는 사람들을 다 죽일 권리가 있냐? 응?

하지만 여기 온 목적은 그게 아니니까.

하아.

나는 침착하게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러분의 말도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피난 대상에는 한계가 있어서요. 차원 이동에 필요한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서 땅도, 사람도 무한정 이동할 수는 없거든요.”

사람들이 내 말에 집중하는 것이 느껴진다.

다들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나 기다리던 말이 지금 시작된다는 걸.

“더 많은 사람을 피난시키려면 자원을 확보해야 하니, 자국에 있는 던전 정보를 알려주시겠어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 외에, 최근 전야제에서 발견된 것이나 극비에 부쳐 지고 있는 것들까지.”

순간 다시 좌중이 술렁거렸다.

내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혼란스러운 것이다.

몇몇은 자신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소리를 해댔지만 다른 사람이 즉시 나에게 던전 정보를 넘기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어딘가 연락했다.

결국 경쟁적으로 나에게 던전 정보를 넘기는 그림이 펼쳐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던전 정보의 양과 속도에 따라 피난 대상의 우선순위를 높여 주겠다고 했으니까.

잠깐 사이 나는 거의 모든 나라의 던전 위치가 들어 있는 정보를 손에 넣게 되었다.

약 30분을 투자한 셈 치고는 성공적인 결실이었다.

- 진짜 피난하게?

두툼한 정보 뭉치를 들고 호숫가로 돌아오자 서지한이 슬쩍 질문했다.

“설마요. 뻥이죠.”

- 하하.

“사실 잠깐 흔들리긴 했거든요.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을 내가 죽이는 거라는 말……. 내가 마음대로 이렇게 정해도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 정해도 되지. 왜 안 돼?

“맞아요. 왜 안 돼요? 이 사람들이 뭐라고 말을 다 들어줘야 해요? 고민해도 제가 훨씬 길게 고민했어요. 피난한다고 해도, 그게 끝이 아니잖아요.”

피난 후 좋은 땅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一 같은 결말이면 몰라도 엘파니스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 그렇지.

“그리고 저, 악몽도 꿨어요.”

- 악몽?

“포식자 피해서 피난 갔는데, 거기 생물들이 우리 헌터들 죽이고 마석 뽑아가는 꿈이요.”

- …….

“엄청 끔찍하더라고요. 이런 꿈, 꽤 여러 번 꿨어요. 만약 이게 현실이 되면 더 끔찍하겠죠?”

저 꿈을 꾼 날, 인벤토리의 마석을 보자 소름이 돋았다.

내 인벤토리에 있는 수많은 마석들.

이건 사실 모두 영혼석이다.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려고요.”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은 지금 피난이나 포식자에 대한 변변한 정보도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뜨지 않았을 테니까.

자신들이 모르는 자리에서 본인의 죽음이 논의되고 있다는 것도 모르겠지.

마지막으로 가족과 갔던 섬마을 식당의 손님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내년에 친구와 함께 먹으러 오자고 했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명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처럼 괜찮을 거라 다독이며 일상을 유지하고 있겠지.

미래를 약속하고 있겠지.

승주의 겁먹은 목소리도 떠오른다.

저녁을 먹자는 신 차장님의 약속도 떠올랐다.

나의 모든 결정은 그 목소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들은 내가 싸워주길 바랄 것이다.

내가 그들이라면 분명 누군가 나를 위해 결정해주길 바랄 테니까.

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기로 했다.

- 모아야. 네 결정에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가족들이 함께 피난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싸울 거야?

서지한은 잔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지한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살아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아뇨. 가족들이랑 피난해야죠’라고 대답하면 그는 어떻게든 나와 내 가족들이 함께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아뇨.”

- 모르는 사람들인데도?

“아직 모를 뿐, 앞으로 알게 될 사람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정리한 듯 싱긋 웃었다.

- 그래.

가만히 마주 웃어주다가 문득 회의장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 기억나요? 잘못하면 전멸인데, 사람들 목숨으로 도박을 할 생각이냐고 했던 사람 있잖아요.”

- 아. 있었지.

“그 사람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도박이죠. 지면 몽땅 잃는 도박.”

나는 씩 웃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내일을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판돈을 걸어볼 가치가 있잖아요?”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지한이 장난스럽게 질문했다.

- 회의장에서 그렇게 말해주지 그랬어?

“에이, 괜히 말싸움할 필요 없잖아요. 싸우고 설득하러 간 것도 아닌데. 그리고 거기서 빨리 나오고 싶었어요.”

- 응?

“민간인은 생존권이 없다는 둥, 헛소리를 하잖아요. 진짜 다 미쳤나 봐. 귀 썩는 줄 알았다고요. 뒤로 갈수록 아주 가관이던걸요. 앗, 잠깐. 내 귀 괜찮나? 이미 좀 썩은 거 아니겠죠?”

- 어디 봐봐. 내가 봐줄게.

내 장단에 맞춰 호들갑스럽게 내 귀를 들여다보던 서지한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아. 아직 귀여운 상태야. 멀쩡해.

“귀여……. 아무튼 고마워요. 어쨌든, 그 사람들이 내가 거짓말했다는 걸 알고 나중에 따질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너무 곤란한 나머지 회의장에서 녹음한 걸 살짝 퍼뜨려버릴지도 모르겠네요.”

- 녹음했어?

“녹취는 현대인의 필수 교양이죠.”

서지한과 수다 떨며 대충 긴장을 푼 후 나는 일부러 기운을 북돋으며 당당하게 몸을 폈다.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울적한 기분으로는 될 일도 안 되는 법이지!

“어쨌든 가보자고요!”

회의장에서 받아온 몬스터들의 위치 정보를 기운차게 치켜들었다.

띠링, 인왕 손모아는 보스 몬스터의 주소록을 손에 넣었다!

사람들끼리 싸우고 협의하는 복잡하고 재미없는 일은 유은담과 반서후가 해주고 있으니 나는 부지런히 동료를 찾으러 떠나볼까.

남은 최후의 방벽은 앞으로 8시간.

출一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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