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 괜찮아?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비척비척 걸어 들어와 침대에 푹 주저앉자 서지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가족과 식사하는 동안 내내 말없이 옆에 있어 주던 서지한.
그리고 지금 같은 때에 어김 없이 말을 걸어주는 그의 존재가 무척 고맙다.
처음에는 계속 붙어 있는 부분이 꽤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그가 없으면 어떻게 사나 싶을 정도다.
거의 애착 유령에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좀 지쳤어요.”
- 그럴 만도 하지.
모든 게 힘겹다.
나에게 주어진 선택의 책임도, 불안한 앞날도, 그리고 아직 어린 동생이 속마음을 감추고 태연한 척하는 모습까지 전부.
- 피난이라…….
귓가에 서지한의 목소리가 한숨처럼 떨어졌다.
그는 책상 위에 비스듬하게 앉아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 너는 그러기 싫지?
“……네.”
- 음.
“일부라도 살리든가, 아니면 모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승률 낮은 도박에 베팅하든가. 양자택일이네요.”
- 그런 셈이지.
“성공만 한다면 당연히 후자인데, 승률이 얼마나 낮은지 모른다는 점이……."
- 판단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건 정말 운이 좋은 일이지?
“정말요.”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나마 제가 지금 엄청 강하다는 게 희망적이긴 해요. 엘파니스 씨의 반응을 보면 이만큼이나 강한 공격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 응.
“그러니까, 나라면 통하지 않을까. 내 공격이라면 저 포식자를 어떻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차라리 공격력이 약했으면 이런 고민을 안 했을 텐데.”
- 그렇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먹은 뿔 계승해서 등급 올리면 공격력은 더 강해질 테고요. 하지만.”
- 하지만?
“나프기스. 엄청 강했잖아요. 그런데도 나프기스는 피난했어요. 싸웠으면 이길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나프기스을 떠올리자 그때 봤던 미래도 함께 기억이 났다.
나는 왜 소파에서 혼자 울고 있었던 걸까.
결국 나는 피난을 한 걸까?
모든 이들을 두고 온 슬픔에 울었던 걸까.
“으으으. 진짜, 하.”
머리를 북북 긁으며 나뒹굴자 서지한이 소리 없이 웃으며 턱을 괴고 나를 지켜보았다.
이 사람은 어떻게 이렇게 늘 여유가 있을까.
그러면 고민 없이 빠르고 명료하게 결론을 내렸겠지.
“답답하죠?”
- 뭐가?
“서지한 씨는 제가 이런 고민하는 거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아서요. 지지부진하게 이러는 거 보고 있기 답답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곧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곤 기대어 앉아있던 책상에서 일어나 내 옆에 팔을 베고 마주 누웠다.
- 글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
“왜요?"
- 고민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하지만 저는 서지한 씨가 부러워요. 반서진 씨도. 나도 그런 결단력이 있으면 좋겠는데.”
- 나는 부러워할 필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요?”
- 응. 고민을 안 하면 뭘 하게 되는지 알아?
“뭘요?”
- 후회.
과연.
키르기스 던전에 앞뒤 없이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기까지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설득력이 장난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 후회한 적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대답이 너무 뻔해서 그냥 침묵했다.
아, 그런데 잠깐.
“예전에는 고민 같은 건 약한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 그때의 너에게는 그런 말이 필요할 것 같았거든.
“본심이 아니었던 거예요?”
-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사실 내 생각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서지한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나를 지그시 바라보던 그가 진지한 얼굴로 바짝 다가왔다.
갑자기 가까워지는 얼굴에 움찔해서 몸을 빼려는데, 그보다 서지한이 더 빨랐다.
순간 눈을 감았다가 떴더니 코끝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서지한의 얼굴이 있었다.
유령인 상태라 감촉은 없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 너.
이 순간, 충왕류처럼 끼에엑 하고 비명을 지르지 않은 나는 정말 대단하다. 엄청나다. 손모아 굉장해!
비록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눈물이 날 것 같지만 견뎠다. 나는 견뎌냈다고!
“그, 아, 어……."
언어기능이 고장 나 삐꺽거리는 나를 서지한이 살짝 미소 지은 채 응시했다.
그러곤 감촉 없는 손으로 살짝 내 뺨을 쓰다듬듯 덧그리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오늘은 이만 쉬어. 많이 피곤해 보여.
그 말을 남긴 채 그는 문을 통과해 방을 나가버렸다.
나는 한참 동안 그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다가 침대에 데굴데굴 구르며 애꿎은 이불만 쥐어뜯었다.
아아아, 왜 더 심란하게 만드는 거야!
그래도 덕분에 머릿속에서 맴돌던 고민들이 훅 날아가버려서 그날은 아주 푹 잠들 수 있었다.
2차 방벽이 유지되는 약 30시간 동안 서지한의 말을 동력 삼아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종종 반서진이 왜 그렇게 끙끙 앓느냐며 애잔한 시선을 보냈지만, 어쩔 수 없다고.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없다고요.
고민의 방향은 피난이냐, 남아서 싸우느냐 보다 어떻게 하면 확실하게 승률을 올릴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있었다.
사실 이미 천칭은 한쪽으로 많이 기울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제각각 소중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은담만 홀로 뒤처리를 하고 있었다.
종종 마주치는 그에게 말을 건네면 유은담은 특유의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별거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저는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나름대로 즐겁게 보내고 있거든요."
그런 유은담의 손에는 어김없이 죽을 것 같은 표정의 엄 비서가 쥐어져 있곤 했는데, 대충 은담이가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복수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전당이 시작되기 직전, 나는 다른 이들의 힘겨운 노력 끝에 그들이 다 먹어치운 뿔을 무사히 계승받는 데 성공했다.
나, 유은담, 반서진, 반서후, 페르기스, 엘파니스, 로드란으로부터 계승받은 뿔을 모조리 충왕포에 투자했다.
덕분에 충왕포는 현재 L3에서 L17이라는 무시무시한 등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거 L10이 끝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등급이 어디까지 있는 거야?
음, 솔직히 이런 식이면 페르기스의 수많은 부하에게 뿔을 먹이고 그걸 다 계승받는 건 어떨까 했는데, 이건 생각만 하고 그냥 넘겼다.
뿔을 모두 섭취한 페르기스의 부하들이 내가 아니라 페르기스에게 뿔을 계승시킬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페르기스에게서 그런 배신의 기색이 느껴지지 않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면 마음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페르기스의 목적은 제 동족의 생존.
그러니, 자신들의 동족들만 챙긴 상태로 피난해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마침내 찾아온 결전의 날.
나는 호숫가에서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평소에는 던전 안에 머물던 엘파니스와 로드란도 처음으로 던전 밖으로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다들 준비됐죠?”
기운차게 던진 질문에 여기저기서 대답이 돌아왔다.
최후의 전당에 데려갈 수 있는 신하는 나와 서지한을 제외하고 총 5인.
서지한은 나에게 귀속되어 있어서 그런지 가신 수 제한에 포함되지 않았다.
참여 멤버는 반서진, 반서후, 유은담, 페르기스 그리고 나프기스가 다.
데려갈 가신을 미리 등록할 수 있어서 이미 모든 절차를 마친 상태라 이제 남은 것은 최후의 전당 참가 메시지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사실 나프기스는 아직 던전 안에 있는데, 전당이 시작되면 자동으로 함께 이동되니 별 문제는 안 된다.
다만, 같이 싸워줄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영, 감이 안 잡히는 존재란 말이지.
최후의 전당 전야제가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