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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화 (191/231)

191화

“음, 제가 가진 스킬 중에 벌레류로 변할 수 있는 게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벼룩으로 변해서 던전에 몰래 숨어 다녔어요.”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감이 안 오는 모양이라,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충왕 변이를 사용해 벼룩으로 변신해서 몸소 보여주었다.

오, 다행히 장비 아이템 덕분에 벼룩이 되어도 아주 작은 옷을 입게 되어서 이전만큼 크게 징그럽지 않네.

하지만 이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는지 테이블 위의 나를 내려다보는 이들은 경악과 혐오가 범벅이 된 눈을 하고 있었다.

“짜잔, 이 정도로 작아질 수 있어요. 꽤 익숙해져서 벼룩 상태로 말도 할 수 있답니다. 대단하죠?”

쏟아지는 시선이 강렬한 나머지 좀 겸연쩍다.

일부러 대수롭지 않은 척 활기차게 말했으나 돌아오는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그나저나 소리통이 작아져서 그런지 벼룩 상태로 말할 때는 인간일 때보다 목소리가 훨씬 높아지네.

꼭 헬륨가스를 마셨을 때 같다.

게다가 성량도 작아서 힘껏 외치듯 말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것 같아.

“으, 아……."

나를 바라보며 애매한 소리를 내는 반서진의 눈가가 작게 경련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휴지를 가지고 안절부절 초조해하며 내면의 무언가와 갈등하고 있었다.

유은담은 ‘그랬군요……’하고 중얼거리며 침착하게 미소 짓고 있긴 했지만 간간이 견딜 수 없다는 듯 몸 여기저기를 북북 긁었다.

반서진은 마치 고장 난 라디오처럼 읏, 아웃 하는 소리를 내며 간간이 ‘살충제……’같은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음, 좋아. 이해했다.

아무래도 바로 눈앞의 내가 벼룩이 된 것에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어 힘든 모양이다.

그래도 서지한은 아무렇지도 않아했었는데 약간 서운한걸.

게다가 그는 나와 함께 몸이 작아져서 거의 자신과 비슷한 크기가 된 벼룩 버전 나를 보고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그, 그 상태로 간다고? 그래도 그렇게 몸이 작으면 속도가……."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은 반서진이 아무래도 내가 미덥지 않은 듯 떨떠름하게 지적했다.

“아니에요. 이래 봬도 기동력 엄청 좋다고요. 봐요, 이렇게 가볍게 점프하면……."

직접 보여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아서 나는 그 자리에서 가볍게 위로 푝하고 뛰어올랐다.

그러자 그 순간.

“우와아아악!”

“에에엑!”

반서진과 승주가 참지 못 하고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섰다.

어찌나 다급했는지 의자가 우당탕하며 쓰러지기까지 했다.

엄마는 부들부들 떨긴 했지만 의연하게 자리를 지켜줬다.

이것이 자식 사랑. 고마워, 엄마.

그런데 예전에 첫 대면 때는 괜찮았잖아…….

새삼 다시 보니 징그러워? 저기, 저 징그러워요?

반서후와 유은담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참기 힘든지 몸 여기저기를 움찔거리고 있었다.

슬슬 페르기스가 뒷발로 목덜미를 마구 긁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쯤에서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다들 너무 징그러워하네.

어쨌든, 긴 설명보다 한번 보여주는 게 확실히 효과가 있었는지 다들 한결 납득한 표정이다.

목적 달성은 끝났으니 벼룩 모습은 이제 끝.

게다가 이 이상 벼룩 상태로 있으면 견디지 못 한 반서진이 진짜 어디서 살충제를 가져올 것 같았다.

“다들 그렇게 강하면서 벼룩이 무서워요?”

“아, 아니. 무서운 게 아니라. 으, 아무튼 됐어.”

넘어진 의자를 다시 세워 앉으며 반서진이 소름 돋은 팔을 빠르게 쓰다듬었다.

승주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명색이 가족인데 너무하네, 승주야.

“그러고 보니 예전 잠실에서 충왕류 몬스터 떼 보내주면 네가 유인한다고 했었지? 그때도 이렇게……."

무엇인가 생각난 듯 반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때 저 못 보셨어요?”

"그렇게 멀리 있는데 어떻게 봐. 그냥 네 스킬 번쩍거리는 거만 보고 그쪽 방향으로 보냈지.”

"아하.”

“그런데 그렇게 작은 벼룩 모습으로 걔들이 유인이 되는 거야?”

"아, 크게 변할 수도 있거든요.”

반서진은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정말 무서운 아이구나……."

무섭다니, 어떤 의미로?

묻고 싶었지만 다들 어쩐지 반서진의 소감에 동의하는 듯한 모습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괜히 따져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 모습으로 던전 관리청에 잠입해서 던전들 털고 다닌 거예요. 문틈으로도 들어갈 수 있고 감지시설에도 안 잡히고 여러모로 유용하거든요.”

“과연……."

유은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담이는 내내 내가 어떻게 던전에 몰래 숨어들었는지 궁금해 했었으니 이걸로 꽤 만족했겠지.

좀 미묘한 표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벼룩 고백으로 무겁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가벼워진 듯 하니 나쁘지 않네.

그나저나, 정말 통할까, 이거?

“엘파니스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

멍하게 앉아 있던 엘파니스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이렇게 변신해서 왕좌를 향해 돌진하는 작전, 통할까요? 엘파니스 씨는 최후의 전당도 여러 번 겪으셨으니 현장의 상황을 더 잘 아시잖아요.”

“아, 그거 말이군요. 음……. 지금까지 이런 작전을 쓴 왕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라 장담하긴 힘들지만, 꽤 효과는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엘파니스도 괜찮다고 하니 좀 안심되네.

내가 완전히 마음을 굳히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서지한이 끼어들었다.

- 잠깐, 그래도 너무 위험해. 그 모습으로 돌진하다가 광역 스킬에 휘말리거나 눈먼 공격에 당할 수도 있잖아. 역시 내가 가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서지한의 말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반대였다.

그가 불안해하는 부분은 이해하지만…….

“서지한 씨가 왕좌에 앉는다고 해도, 저나 서지한 씨가 왕이 될 수 있을까요?”

- 응?

“서지한 씨는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잖아요. 뿔도 못 먹고, 포션도 못 쓰고. 만약 제일 먼저 왕좌에 도착해서 앉았는데 자격이 없다거나 하면요?”

- 으음, 그럴 수도 있겠군. 엘파니스에게 확인해보는 게 어때?

서지한의 말을 그대로 엘파니스에게 전했다.

엘파니스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도 아직 그런 사례는 보지 못했습니다. 보통 그런 자들은 자신을 소유하고 있는 왕보다 아주 약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도움이 되지 못 해서 죄송합니다.”

서지한은 사실 어떻게 보면 아이템이다. 본체인 영혼석이 아이템이니까.

아이템이 왕좌에 앉는다고 왕이 될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것 같은데.

인격이 있긴 하지만.

“아니에요. 음, 그러면 제가 가는 게 맞겠네요. 괜히 확신도 없이 서지한 씨가 달려갔다가 안 되면 끝장이니까요. 충왕포로 엄호하다가 괜히 뒤늦게 가서 왕좌를 빼앗기면 낭패잖아요.”

내 말에 서지한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안전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 너 혼자 돌진하는 건 안 돼.

“알았어요. 저도 광역 공격이나 유탄에 맞아서 죽는 건 싫으니까요. 이 작전은 좀 더 보완해보죠. 혹시 의견 있으신 분? 일단 저는 투명화한 상태로 민첩성 증가 포션 먹고 돌진할 생각이에요. 나머지 분들은 저를 엄호하고요.”

잠시 뒤 여기저기서 아이디어가 튀어나왔다.

그중 쓸모 있는 것도 꽤 나와서 나의 벼룩 돌진 작전은 조금씩 보완되기 시작했다.

다만, 엄마와 승주는 토론 내내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각성자가 아니고 최후의 전당에도 갈 수 없으니 아이디어를 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알아듣지 못 할 이야기들이 난무하는 자리에 멀뚱히 앉아있게 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중간에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떻겠냐 권유했지만 둘은 조용히 사양했다.

“그럼, 일단 작전 회의는 여기까지 하고 좀 쉴까요.”

엄마와 승주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제안하자 다들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은 안 했지만 역시 피곤했겠지.

“아으. 음, 저는 나가서 바깥일 좀 정리하러 갈게요. 서후 형도 나랑 갈래?”

유은담이 깍지 낀 손을 길게 늘이며 앓는 소리를 냈다.

힐긋 던지는 그 시선에 반서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본가에 들어가서 보고하고, 뭔가 도움될 조치가 있는지 찾아보지. 서진이 너는……."

반서후는 아무래도 반서진을 함께 데려가고 싶은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이니 가족들끼리 모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반서진은 그 기대 어린 시선을 단칼에 자르며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따로 볼 사람 있으니 너 혼자 가.”

“볼 사람? 가족들은 보지도 않고? 그 사람들이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는 거냐?”

“어. 나 집 나오고 도와준 사람들. 핏줄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어진 가족이랄까. 너는 모르겠지만.”

냉소적으로 쏘아붙인 반서진은 ‘나 먼저 간다’하고 짧게 인사하더니 그대로 던전을 나가버렸다.

방금까지 아이디어를 내며 화기애애하게 이어지던 분위기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남은 반서후는 콧등에 주름을 잡고 감정을 삭이더니 엄마와 엘파니스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유은담에게 요청해 함께 던전을 나갔다.

이어서 엘파니스와 페르기스까지 눈치 껏 자리를 뜨고 나니 마침내 테이블에는 우리 가족과 서지한만 남게 되었다.

“그, 은담이라는 청년은 가족 보러 안 가?”

반서진과 반서후가 남기고 간 썰렁한 분위기가 잦아들 무렵, 엄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은담은 고아원 출신이라 보러 갈 가족이 없다.

하지만 이걸 내가 함부로 말하긴 좀 그래서 나는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음, 사정이 좀 있어서.”

"그래……."

엄마의 대답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앞으로 있을 최후의 전당과 피난에 대한 고민으로 내 머릿속은 매우 복잡했다.

아마 엄마와 승주도 나만큼이나 심란할 것이다. 우리는 한참 동안 찻잔에 남은 차만 홀짝거렸다.

“외식하자.”

무거운 침묵을 깨고 승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외식?”

“응. 오랜만에 다시 만났잖아. 어디 가서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어.”

“갑자기 무슨……."

세계 멸망 초읽기 상황에 무슨 뜬금없는 말이냐고 할 생각이었는데, 승주의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

결코, 철없는 소리 같은 게 아니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비장함마저 감돌았다.

“외식하자.”

외식이라.

밖은 TV와 신문을 가리지 않고 랭킹 1위 손모아에 대한 소식으로 시끄러워 웠다.

해외에 있는 식당에 가는 게 좋을까?

아니, 해외라고 해도 사정은 비슷하겠지.

“왜? 누나는 싫어?”

“아니, 그게. 날 알아볼 것 같은데……."

떨떠름하게 대답하다가 문득 이 모든 것이 의미 없는 고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 까짓 거 알아보면 뭐 어때.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니잖아.

날 알아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더라도 대답해주면 그만이지.

“아, 누나가 곤란하면 그냥……“.

"아냐. 가자. 외식. 어디로 갈까? 알다시피 요 며칠 세상이 난리여서 제대로 하는 가게가 있을지 모르겠네. 가고 싶은 곳은 있어?”

"있어.”

“어디?”

승주는 희미하게 미소 짓더니 엄마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가족여행 갔던 섬마을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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