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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화 (190/231)

190화

이전에도 듣긴 했지만 그건 아주 간단하게 요약된 것이었다.

최후의 전당에서 이기면 왕이 되어서 피난을 간다.

그것뿐이다.

각성자만 피난할 수 있다든가, 그 과정에서 견디지 못 한 사람들은 죽는다든가 하는 자세한 부분은 듣지 못했었다.

“음. 그렇군요. 지금 밖에는 아마 2차 방벽이 펼쳐져 있을 텐데, 그 방벽의 소요시간이 끝나면 마지막 최후의 방벽이 형성되고 동시에 전당이 시작됩니다.”

“최후의 방벽……. 그럼 그게 깨지면 끝이에요?”

“그렇습니다.”

끝.

그 단어의 육중한 무게에 가슴이 답답하게 가라앉았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느낌인지 테이블 위의 공기가 일시에 어두워졌다.

“최후의 전당이 시작되면, 뭐 어떤 식으로 시작되는 거야? 할아버지.”

반서진의 가벼운 질문에 로드란의 턱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아마 ‘이 무례한……’ 같은 단어를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로드란.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최후의 전당이 시작되면 왕은 자신과 함께 전당에 참여할 다섯의 신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택이 완료되면 전당으로 이동됩니다.”

“이동? 뭐 어디 찾아갈 필요 없이 알아서 옮겨준다고?”

“예.”

편하네一 라고 중얼거리는 반서진의 목소리는 태평한 척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미처 숨기지 못 한 초조함이 내비쳤다.

“흠, 그럼 거기로 가자마자 보이는 보스 몬스터 다 죽이면 우리가 이기는 거지?”

죽이자! 다 죽여 버리자!라고 혈기왕성하게 떠드는 반서진의 말을 엘파니스가 조용히 부정했다.

“아니요. 그저 그곳에 마련된 왕좌에 앉기만 하면 됩니다. 물론, 서로 그 자리에 앉으려 견제하는 과정에서 사상자가 나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왕좌에 앉기보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왕을 죽이는 것에 더 심취하는 자들도 더러 나타나긴 합니다.”

“으음, 앉기만 하면 된다고? 그 의자는 어디에 있는데? 의자랑 가까운 놈들이 유리한 거 아니야?”

"전당의 중앙에는 오각뿔 형태의 거대한 제단이 생성됩니다. 왕좌는 그 꼭대기에 있습니다. 왕들은 모두 제단 아래에 불리니, 왕좌와의 거리에 차가 크지 않습니다.”

엘파니스는 조심스레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그러곤 제법 괜찮은 솜씨로 중앙에 오각뿔을 그리더니 주변에 무수한 원들을 그려 나갔다.

“이런 형태로, 왕들은 본격적인 왕좌 쟁탈이 시작되기 전에 각기 결계에 격리된 상태로 전투를 준비하게 됩니다.”

“흠, 시작하자마자 주변에 있는 놈들부터 싹 죽이는 게 나는가?”

"……그 사이에 다른 왕이 왕좌에 앉으면 끝이잖아요.”

반서진의 말에 허점을 지적하며 나는 엘파니스에게 질문했다.

“왕좌에 앉기만 하면 되는 거죠? 꼭 싸울 필요 없이.”

“그렇습니다.”

“왕좌에 앉고 나서는요? 바로 피난할지, 전투할지 선택해야 하나요?”

"바로 선택할 수도 있지만, 대개 다섯 시간에서 열 시간 정도의 유예기간이 주어집니다. 최후의 방벽의 소모도에 따라 다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난을 하더라도 지역을 고르거나 데려갈 사람을 선정하는 시간이 필요하고, 싸우더라도 나름의 준비가 필요할 테니 그것을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군.

내내 생각했지만, 시스템은 정보제공에 불친절한 반면 그래도 이런 부분에서는 꽤 배려를 많이 해주는 것 같다.

“최대 열 시간이라……. 그러면 싸우는 건 최대한 피하는 게 좋겠어요. 다른 몬스터들이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고, 혹여 싸움에 깊이 휘말리거나 정신 팔린 사이에 다른 놈이 앉아 버리면 큰일이니까.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좌에 앉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좌에 앉는 거지요. 아마, 살아남은 왕들이 꽤 많을 겁니다. 저도 매번 놀라곤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계산을 할 줄 아는 자들입니다. 나름대로의 지성은 갖추고 있지요.”

열 시간.

무거운 마음으로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는데, 유은담이 끼어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싸우기 싫다고 해도 주변 보스 몬스터들이 가만히 안 둘 것 같은데요. 싸움 걸어오는 걸 계속 피하기만 할 수도 없잖아요?”

"적당히 상대하긴 해야겠지. 하지만 포션 중독에 걸리거나 상태가 나빠질 만큼 무리하는 건 안 돼. 그 이후에 포식자와 싸운다고 생각하면, 포션 중독이 해제되는데 24시간이 필요한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건 최대 10시간뿐이니까.”

내 말에 엘파니스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싸우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애매하게 시선을 피했다.

아직도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길 수만 있다면, 포식자와 싸우고 싶지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피난이라는 선택을 하면 엄마와 승주,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뒷말을 입으로 내뱉기 버거워서 나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어지는 내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죽는 거잖아요.”

사실 승주와 엄마에게 이 대화를 들려주지 않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할 예정인지도 모른 채 까맣게 타는 속으로 참고 있었을 두 사람을 생각하니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나는 가족이고, 두 사람은 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자격이 있다.

“승산은 거의 없습니다.”

엘파니스가 드물게 모진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싸워서 지면 바로 전멸이에요? 다 죽는 거예요? 즉시? 그 이후 다른 선택지는 더 없어요?”

초조함을 숨기지 못 하고 연속으로 내뱉는 내 질문에 엘파니스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것은, 저도 잘 모릅니다. 지금까지 맞서 싸운 적은 한 번도 없고, 계속해서 피난만 해왔으니까요.”

"한 번도 싸운 적 없어요? 혹시 다른 왕들에게 들은 정보 같은 건 없나요?”

“……예.”

그는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지만 나는 오히려 희망이 생겼다.

“그러면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실제로 싸워보면 생각보다 할 만할지도 모르고요. 싸워본 사람이 없다는 건, 진 사람도 없다는 거 아니에요?”

“……싸운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건 아닐까요.”

엘파니스는 한결같이 부정적이었고, 나는 한결같이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느끼고 있으시잖습니까.”

단호한 엘파니스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이 맞다.

포식자는 대기권 밖, 우리와 어마어마하게 먼 곳에 있다.

그러나 그 거리가 무색할 만큼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마치 개미가 되어 산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다.

마력을 느낄 수 있게 된 덕분에 그 감각은 더욱 적나라했다.

“……아무튼, 포션 중독에 걸리는 건 안 돼요. 만약 피난을 가더라도 그 직후에 그 세계 생물들과 전투하게 되는 것도 대비해야 하니까.”

나는 애써 엄마와 승주를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말을 맺었다.

그러자 유은담이 방긋 웃으며 끼어들었다.

“아, 누나. 뿔로 스킬 강화할 수 있다고 했었죠? 누나 채집 스킬이면 루팅한 보스 몬스터 뿔 꽤 많지 않아요?"

“많아. 하지만 남은 시간이 너무 적어서 그걸 다 먹는 건 힘들 거야.”

"으음, 다 같이 하나씩 할당받아서 다 먹고 누나에게 계승시키면 시간을 좀 벌 수 있지 않을까요? 최후의 전당 끝나는 시점까지 한 40시간은 남았잖아요.”

나쁘지 않은 의견이다.

엘파니스도 크게 반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일단 인벤토리에서 적당히 뿔을 꺼내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더라도 다 먹을 수 없고…….

“뿔 다 먹더라도 최후의 전당 참가하거나 누나 신하 관계 해제되거나 그러는 거 없죠? 관계 해제되어서 던전에 못 들어오게 된다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한 번 복속이 되었으니까요.”

엘파니스의 말에 유은담은 안심하고 뿔을 한 입 갉았다.

나는 내친김에 가지고 있던 S급 능력치 향상 포션도 종류별로 나눠주었다.

“혹시 최후의 전당에서 상황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나눠줄게요. 일시 증가는 어지간하면 쓰지 마세요. 부작용이 크니까요. 진짜 큰 위력이 필요한 때 아니면 A급 먹는 게 차라리 나아요.”

“오……. 그 김 사장이 먹고 폐인 된 포션이네.”

좋아.

이런 반응이면 마구 마시거나 하진 않겠다.

“근데 일시 증가요? 포션은 다 일시 증가잖아요?”

“영구 증가 옵션도 있어.”

나에게는 너무 당연한 사실이라 담백하게 말했는데 여기저기서 경악 어린 시선이 돌아왔다.

아, 혹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냐?

“영구 증가라고 해도 막 몇 백씩 을라가는 건 아니고, 올라봐야 5 정도니까 너무 기대하지 마. 별 거 아니야.”

“아니, 5라고 해도 절대 별 거 아닌 게 아닌데.”

반서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런 그들을 서지한은 반투명한 얼굴로 웃으며 즐겁게 구경하고 있었다.

- 그나저나 유은담 말대로 우리는 싸울 생각이 없어도 상대가 덤비면 귀찮아지겠는데. 데려갈 수 있는 건 다섯 뿐이고. 여차하면 포션 먹고 유은담이 주변 왕들 다 얼려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보스 급을 정말 빙결시키려면 은담이가 죽어날걸요.”

- 괜찮아, 괜찮아.

“괜찮긴요. 으음, 그냥 투명화 쓰고 돌진해볼까요?”

- 너무 위험해. 투명화한다고 해도 광역 공격에 휘말리면 네 방어력으로는 치명상이야. 왕이 아니라도 왕좌에 앉을 수 있다고 했으니 차라리, 민첩성이 높은 내가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공격당해서 치명상 입어도 실체화 풀면 그만이고.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아.”

서지한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문득 번개 같은 아이디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니,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지?

“안 싸울 방법 생각났어요! 지금까지 계속 해왔잖아요.”

- 응?

“어딘가에 숨어 들어가는 거, 지금까지 내내 해왔던 거라고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서지한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환하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벌레가 되면 되잖아요!”

그래, 나에게는 몰래 숨어 들어가기에 최적화된 스킬인 충왕 변이가 있다.

게다가 지난날 수없이 사용해서 가끔 사람 몸으로 점프하는 것보다 벼룩으로 점프하는 게 더 편할 때가 있을 정도다.

벼룩이 되어서 투명화 스크롤을 쓰고 민첩성 증가 포션으로 능력치를 올리면……!

이건 승산이 있을 것 같다!

기막힌 방법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나는 짜게 식은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뭐가 된다고?”

이 심각한 와중에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반서진이었다.

음, 이건 설명이 필요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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