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이틀 뒤 지구가 멸망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받아보게 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이 질문을 처음 받았던 것은 어떤 지구 멸망을 주제로 한 영화를 본 후, 친구들과 과자를 먹으며 수다 떨던 가벼운 자리에서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든가, 평소 못해봤던 체험을 하러 간다든가, 물건을 산다거나,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낸다는 것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굴러 나왔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그때 ‘인터넷에서 내 이름을 검색해보고 기삿거리 읽기’라고 대답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구조하는 나를 수많은 사람들이 촬영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기사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그에 대해 떠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국이 안전해진 후 던전에서 내보낸 이들이 나에 대해 말할 테니 지금쯤 억측과 정보가 난무하며 온갖 사연들이 매체를 가득 채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내용인지 나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그저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뿐.
내가 보호하고 있던 사람들이 던전 밖에서 그들의 소중한 사람들과 재회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밖에 있던 사람들 또한 살아남아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기를 소망하고, 또 소망한다.
내가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었듯이, 그들 또한 이 재회의 기쁨을 누리기를.
김 사장의 영혼석이 내 인벤토리에 입주한 뒤로도 나는 한국의 자잘한 몬스터들을 마무리하느라 바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던전의 피난민들을 몬스터가 모두 소탕되고 안전지대가 된 한국에 내보낸 다음에야 비로소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누나!”
눈물을 콸콸 쏟으며 승주가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살이 많이 빠졌는지 팔이나 어깨가 앙상하게 느껴졌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 같아서 나는 어깨가 콧물로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승주를 도닥여주었다.
“응, 승주야.”
“누나, 살아 있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난 정말 누나가 죽은 줄 알고……."
“음……. 그건 사정이 좀, 엄마한테는 말했는데.”
마치 어린애처럼 목 놓아 우는 승주는 아무래도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한참을 통곡하던 승주는 갑자기 내 몸을 여기저기 탐색하듯 살펴보았다.
그리고 다친 곳이 없다는 걸 확인한 다음에는 다행이라며 또 울었다.
“여기 있을 때 엄마한테서 듣지 않았어?”
사실 밖에서 한번 보기도 했고, 엄마도 던전 안에 있으니까 이것저것 들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마치 살아 있는 나를 처음 만난 것 같은 반응에 좀 당황했다.
“어, 어……. 듣긴 했는데. 그게, 실감이 안 나서……."
“엄마가 뭐라고 했는데?”
"이 던전이 누나 거고, 할아버지랑 서지한 헌터랑 길드장이랑 누나가같 이 일하고 있다는 거? 근데 던전이 누나 거라는 게 당최 무슨 소린지……."
하긴 승주가 마지막으로 나와 연락한 것은 내가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첫 던전 공략을 떠났을 때다.
막 신인 헌터로 활동을 시작한 사람이 갑자기 거물이 되어 나타났으니 이해가 안 될 법도 했다.
“사실 지금도 꿈이 아닌가 싶은데. 핫, 잠깐. 진짜 꿈인가? 서울이 박살 나는 꿈? 내가 요즘 헌터 관련기사만 봐서 이런 꿈을……."
“꿈 아냐.”
승주의 말을 단칼에 자르고 내친김에 뺨도 꼬집어 주었다.
그런 우리들을 영혼 상태인 서지한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모아 씨!”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신 차장님과 김 대리님이다.
두 사람은 반쯤 뛰듯 다가와 내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 하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신 차장님, 김 대리님.”
내가 인사를 하자 신 차장님이 울음을 참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모아 씨, 모아 씨. 미안해. 내가 괜히 백광 길드에 가입시켜서……. 미안해. 계속 사과하고 싶었어. 정말 미안해.”
폭포수처럼 사과를 쏟아내던 신 차장님은 급기야 오열하며 멀찌감치 서 있던 엄마에게도 죄송하다며 빌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꿇으려는 기세라 엄마가 깜짝 놀라 급히 말렸다.
나와 승주까지 신 차장님에게 달라붙어 달래느라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신 차장님 탓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제가 사과해야죠. 계속 죽은 척하고 있어서 죄송해요. 마음고생이 심했죠?”
“모아 씨……."
“이런 시기가 아니라 좀 더 좋은 때에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내 말에 근처에 서 있던 김 대리님이 반응했다.
“이런 시기라니? 모아 씨가 고생해서 몬스터 다 잡은 거 아니었어요? 밖이 안전해졌으니까 사람들도 내보낸 거라고 그 할아버지가 말해줬는데……."
아, 두 사람은 초기에 대피해서 하늘에 나타난 포식자에 대한 건 모르는구나.
그리고 그때, 던전 게이트가 열리며 유은담, 반서후, 반서진이 나타났다.
“다녀왔습니다. 바깥일은 대충 처리 끝났……. 아, 제가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요?”
쾌활하게 인사하던 유은담이 머쓱하게 뒷목을 쓸었다.
신 차장님을 달래느라 다 같이 뭉쳐 부둥켜안고 있는 우리 모습이 마치 지구 멸망 직전에 소중한 사람들과 끌어안고 눈물짓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그 비슷한 상황이긴 하지만, 음.
“은담이 수고했어.”
나의 대꾸에 신 차장님, 김 대리님, 승주가 동시에 흠칫했다.
은담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대하는 내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음, 인사는 여기까지만 하고 이만 들어가요. 은담이한테 들어야 할 보고도 있고 제가 여러분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도 기니까요. 계속 서서 이야기하는 건 다리 아프니까.”
나의 제안으로 우리는 엘파니스의 성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 둘러앉고 나서도 승주는 어색한 표정으로 계속 반서후와 유은담을 흘끔거렸다.
그 시선에 빙긋 미소 지어준 유은담이 가벼운 어조로 대화의 물꼬를 텄다.
“일단, 밖은 많이 진정됐어요. 해외도 포함해서요. 쏟아져 나왔던 몬스터들도 다시 던전 안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더라고요.”
이야기하며 유은담은 엘파니스가 따라준 차를 한 모금 홀짝였다.
엘파니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뜨거운 장미꽃차를 부어주고 있었다.
테이블 옆, 길게 엎드려 있는 페르기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페르기스는 접시에 담긴 차를 할짝이다가 넌지시 한 마디 했다.
“아마 분위기가 좀 이상한 걸 감지한 모양이지. 계속 나와서 싸워도 이득보다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한 거야.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바보는 아닐 테니까.”
페르기스의 유창한 말에 승주를 비롯한 비각성자들이 흠칫했다.
사슴이, 그것도 몬스터가 말을 한다는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놀라긴 이르다.
지금부터 그들 입장에선 까무러칠 일들을 받아들여야 할 테니.
하지만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은 은담이의 보고를 마저 듣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럼 해외에서 한국으로 몬스터를 보내는 것도 완전히 일단락된 거야?”
“네. 그 엄 비서라는 사람이 지금도 열심히 연락 돌리고 있어요. 상호 협약에 따라서 보낸 거라, 이쪽에서 거부하면 바로 중단할 수 있는 거더라고요.”
신 차장님과 김 대리님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은 것 같았다.
“협약이라니, 꼭 정당한 짓을 했다는 투네. 시가지에 몬스터를 보내면 사상자가 생기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뭐, 이쪽에서 요청한 일이니 자기네는 딱히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다는 입장이더라고요. 정말, 그 새끼는 일이 다 끝나면 어떻게 수습할 생각이었는지.”
“수습할 생각 없었겠지. 우리한테 덮어 씌우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지금까지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가능할 거라 생각한 걸 거야.”
나는 인벤토리에 있는 김 사장의 영혼석을 떠올렸다.
여전히,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없다.
그에게도 분명 어떤 사정이 있었겠지. 누구나 사연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해해주기에는 그는 도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그것이 의도적이었다는데, 무슨 사연이 있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왜 이해해줘야 해?
“확실히, 지금 한국 언론에서는 누나한테 최대한 뒤집어씌우려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던데요.”
"김 사장이 없는데도?”
"네. 엮인 사람이 많다고 했잖아요. 괜히 파고들다가 자기들까지 덜미 잡힐까 봐 그러는 거죠. 진짜 짜증 나는 내용 많아요. 어차피 증거물도 많은데, 확 밝혀서 여론 뒤집을까요?”
"아냐. 그냥 둬.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인걸.”
“그러실 줄 알고 가만히 있었어요. 아, 그래도 마냥 다들 누나를 욕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응?”
“미국 여론이 누나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에요. 아마 구조된 사람들이 증언을 한 덕분인 것 같은데, 그 외에도 여러 나라에서 칭송이 자자하던걸요? 몇몇은 한국에서 누나 여론이 나쁜 걸 같이 보도하면서 은근히 귀화하길 기대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귀화?”
“네. 뭐, 그 소식도 한국에 알려져서 진짜 누나가 귀화하면 어쩌냐고 싸우는 사람도 있고. 아무튼 엉망진창이에요.”
보고를 듣고 있자니 조금 황당했다.
뭐, 언론이 그럴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추측했지만 진짜 이 상황에서도 다들 태평하기 짝이 없군.
보아하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도 못 한 것 같다.
“포식자에 대한 기사는 없었어?”
"아, 있긴 했는데 그냥 몬스터가 또 침공하나 보다一 정도던데요?”
"그래……."
씁쓸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신 차장님과 김 대리님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나는 몬스터 테러 사태의 전말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그렇게 원한이 깊었나? 아니, 그렇다고 해도 왜 애꿎은 사람들을……."
혼란스러워하는 신 차장님의 반응에 공감하면서도 나는 어깨만 으쓱했다.
김 대리님은 훨씬 심플한 반응이었다.
“알게 뭐예요. 그럴 만한 놈이었나 보죠. 죽었다니 잘됐네!”
호쾌하게 수긍한 김 대리님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나저나, 모아 씨……. 아까부터 계속 듣자 하니 꼭 뭔가 더 남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번 난리도 다 수습됐으니 이제 괜찮은 거 아냐? 혹시 무슨 일 있어?”
드디어 이때가 왔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제 더 이상의 비밀은 없다. 여기까지 와서 뭘 더 숨길까.
나는 모든 것을 말할 생각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우선 한 가지 말하자면 제 마켓 닉네임은 루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