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31)

187화

한 병 마시고 포션 중독에 걸린 상태에서 두 병째를 마셨으니 포션 중독 심화.

손상된 몸을 힐링 포션으로 회복시키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 사장은 사실상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예상대로 손모아 일행이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니 김 사장은 피 웅덩이 속에 엎어져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눈, 귀, 입 등 구멍이란 구멍에서 모두 피를 쏟아내고 있어 처참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그 와중에도 일행이 돌아온 것을 보고 뒤늦게 도망치려 이동 스크롤을 꺼냈으나 비서진 중 하나가 달려와 그 스크롤을 강탈해 자신이 도망치는 데 사용해버렸다.

“개…… 자식들. 배신자 놈들아……."

두 장 내의 스크롤을 찢으려 손을 바들바들 떠는 김 사장에게 손모아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그의 손에서 스크롤을 쓱 빼 들었다.

힘이 다 빠진 김 사장은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 했다.

“쓰레기…… 놈들, 개돼지들, 하찮은 놈들이…… 감히……."

꿈틀거리며 자신이 쏟아낸 피 웅덩이 속에서 끝없이 욕설을 내뱉는 추한 물건.

인간이라 봐주기도 힘든 그 몰골이 현재 김 사장의 객관적인 처지였다.

“저 사람들이 왜 당신을 안 도와주는지 알아요?”

손모아의 질문에 김 사장은 대답 대신 피 섞인 기침만 쿨럭거렸다.

“다른 사람이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른 이들도 그 사람을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니까.”

다 죽어가는 마당에도 김 사장은 그 말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아니꼬움을 느꼈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손모아를 노려보았다.

“너, 너였구나. 서지한이 아니었어. 네가……."

“맞아요.”

“잘난 척 떠들기나 하고,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지?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뭐라도 되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지? 웃기지 마. 어차피 너희들도 일개 하찮은 헌터야.”

기침을 하면서도 악을 쓰며 욕설을 퍼부은 김 사장은 문득 눈을 가늘게 뜨고 손모아를 노려보았다.

“하늘 위에 하늘이 있는 법이지. 이번에는 도망쳤지만, 다음에도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루터라고 들어봤나? 너희 같은 놈들은 감히 접하지도 못 할 고급 정보이니 알 리가 없지. 루터만 회유하면 너희 같이 믿을 건 제 능력뿐인 놈들 따위……."

그 순간 김 사장은 자신의 머리를 적시는 차가운 액체를 느꼈다.

손모아가 무언가를 자신의 머리에 끼얹고 있었다.

구정물?

아니면 침이나 오물이라고 생각했으나 손모아가 대수롭지 않게 손에 든 병을 버린 순간, 바닥을 구르는 그것을 본 김 사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S급 능력치 향상 포션.

손모아는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마치 쓰레기라도 되는 것처럼 사장의 머리 위에 쏟아붓고 있었다.

김 사장이 어렵게 어렵게 손에 넣어 몇 개는 영구 증가에 쓰고 다섯 개 정도만 비상용 일시 증가로 쓰려고 남겨뒀던 그 귀한 포션을.

너무 소중해서 감히 지금까지 한 번도 일시 증가 같은 선택지를 사용해보지 못했던 그 귀한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뚜껑을 따 쏟아 버리고 있었다.

“겨우 이런 거 믿고 본인은 안전할 거로 생각했어요? 서지한 씨나 다른 강한 헌터들이 찾아와도 이걸로 능력치 올려서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포션은 계속 루터를 이용해서 보급하면 된다고?”

차분하게 말하는 손모아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비장의 수단이라 생각했던 포션이 마구잡이로 버려지는 것을 본 김 사장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알 수 없었지만 손모아의 인벤토리에는 이런 포션 따위는 썩어 넘칠 정도로 있었다. 포션 중독 때문에 다 먹지도 못 할 만큼.

“그런데 어쩌죠? 루터는 당신 같은 인간이랑 한 팀 하기 싫거든요.”

"네, 네가 루터라고……?”

비장의 수단이라 생각했던 물건이 무용지물이 되고, 내심 계획하던 최후의 보루조차 가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장의 얼굴이 완전히 흙빛으로 질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또 다른 무기가 있었다. 헌터로서의 힘만이 김 사장의 무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 자신의 사회적 권력이 아직 살아 있으니까.

“똑같이 돌려줄게요. 하늘 위에는 하늘이 있거든요.”

그리고 손모아는 녹음했던 대화를 그대로 틀어서 들려주었다.

사장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손모아의 등 뒤에서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서지한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서지한은 보란 듯 사신의 낫을 슬쩍 기울였다.

“죽일까?”

그 차가운 목소리에 그동안 김 사장을 지배하고 있던 고양감이 일시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과다출혈로 인한 오한과 애써 외면했던 두려움뿐이었다.

그는 벌벌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번들거리는 눈알을 사방으로 굴렸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필사적으로 찾는 그 시야에 벽에 몸을 바짝 붙인 채 꽁꽁 얼어 있는 그의 비서진이 들어왔다.

“너,너! 빠, 빨리 연락해. 이 새끼들이 나를 겁박하고 있잖아. 그, 그래! 지금 이걸 찍어서 어디 올리기라도 해. 여기 서지한이 선량한 기업인을 이렇게……."

소리 높여 외치던 사장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비서진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자신이 얼마나 잘해줬는데, 은혜도 모르는 것들이.

그러고 보니 문득 스크롤을 빼앗아 도망쳤던 첫 비서 놈이 생각났다.

저놈들도 그놈과 같은, 배신할 생각이 가득한 놈들인 것이다.

“이 새끼들이……."

사장의 얼굴에 노기가 짙게 드리워졌다.

지금, 이 몸 상태로는 제대로 된 스킬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쓴다고 해도 눈앞의 여자나 서지한에게는 통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저 배신자 놈들이라도 같이 죽여버려야지. 저 괘씸한…….

잠깐, 죽는다고?

내가 죽는다고?

그, 그래. 이놈들, 비서진은 공격하지 않았으니 비서 중 하나를 인질로 삼으면 무슨 수가 나지 않을까?

눈앞의 이 착해 보이는 여자는 민간인을 마구 죽이거나 하진 않을 것 같았다.

방금까지도 착한 척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지 않았던가.

그때 김 사장의 눈에 반가운 모습이 보였다.

“엄 비서!”

그가 눈앞의 여자와 김 사장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서지한은 엄 비서의 손에 들려 있는 짧은 쇠붙이를 발견하고 낫을 고쳐 잡았다.

손모아를 공격할 낌새를 보이면, 그냥 두 놈을 동시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엄 비서의 행선지는 손모아가 아니었다.

“어, 엄 비서. 이…… 이……."

엄 비서가 쥔 쇠붙이는 김 사장의 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이 뜻밖의 사태에 김 사장은 물론, 손모아조차도 경악했다.

“지, 지금까지 사람을 그렇게 패고 욕하고 짓밟고…….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새끼, 네가 한 악행들 내가 전부 녹화하고 기록해놨어.”

엄 비서는 그렇게 말하며 흘끔흘끔 손모아와 서지한의 반응을 살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김 사장의 지시에 따라 서울에 몬스터를 풀어놨던 자신도 덩달아 죽을 판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자신 또한 김 사장에게 원한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많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어필했다.

사실, 진짜로 원한이 있기도 했다.

또한 김 사장은 기억하지 못 하는 모양이지만 엄 비서는 눈앞의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괌의 구원자 손모아.

백광 길드에 공략 지시를 내린 이후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던 모양이다.

만약 손모아가 그때부터 칼을 갈고 있었다면, 김 사장이 살아남을 확률은 제로였다.

거기에 동시에 그녀가 루터이기까지 하다면 아무리 봐도 이건 금 동아줄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라인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엄 비서는 썩은 동아줄로 변한 김 사장을 즉시 버리고 자신에게 나타난 기회를 향해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김 사장을 무심하게 지켜볼 줄 알았던 손모아는 얼른 몸을 낮춰 주변을 압박해 지혈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손모아가 힐링 포션을 꺼냈지만 이미 포션 심화 상태에 빠진 김 사장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이러다 이 사람 죽겠어요!”

다급하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반서진은 반가워하는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그런 놈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꼴좋네. 그렇게 무시하던 아랫사람한테 죽다니. 딱 어울리는 비참한 최후 아냐?”

서지한 또한 그 생각에 동감이었지만, 중요한 건 손모아의 의지였다.

그녀가 김 사장을 살리고 싶어 한다면 서지한은 그 뜻을 따를 생각이었다.

그가 손모아를 도와 지혈에 나섰으나, 결국 이미 다량의 출혈로 숨이 경각에 달했던 김 사장의 호흡은 서서히 멎어갔다.

결국 완전히 숨이 끊어진 그를 잠시 내려다보던 손모아는 돌연 채집 스킬을 사용해 김 사장을 루팅 했다.

인벤토리에서 김 사장의 영혼석을 꺼내 제대로 루팅 되었는지 확인까지 하는 모습에 서지한은 결국 떨떠름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너 설마 이런 놈도 거둬서 제사를…….”

“이 사람은 이렇게 죽으면 안 돼요.”

사람의 목숨은 모두 소중하다는 식의 말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으나 손모아는 단호한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편하게 죽으면 안 돼요.”

이 인간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 명인데, 이렇게 편하게 죽고 끝난다고?

손모아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김 사장은 본인이 저지른 죄악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적어도 똥물에 처박힌 상태로 광화문 한복판에 전시해놓고 그가 저지른 악행을 영상으로 틀어놓은 상태로 지나가던 모든 사람들이 욕을 퍼붓는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대대손손 영원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듣도록.

그 정도는 되어야 이 사람 때문에 죽은 이들의 넋이 약간이라도 달래질 듯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포식자를 물리치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손모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아직 무릎 꿇고 있는 엄 비서를 내려다보았다.

“녹취랑 영상 있다고 했죠?”

"예, 옛! 그렇습니다!”

엄 비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앞날이 손모아에게 달려 있음을 감지했다.

다른 비서들도 뒤늦게 후다닥 달려와 눈치를 보며 손모아의 앞에 무릎 꿇었다.

“지금 포탈 여는 거랑, 다른 나라에서 한국으로 몬스터 보내는 거 중지시킬 수 있어요?”

“예! 물론입니다. 김 사장이 죽은 건 저희밖에 모르니까, 취소 지시받았다고 하면 됩니다. 어차피 저희 요청으로 보낸 거라 요청 중단하면 됩니다.”

“바로 중단시켜주세요. 은담아, 이 사람들 관리해.”

“네에.”

쾌활하게 나선 유은담이 재빨리 엄 비서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했다.

일견 친밀해 보이는 태도였지만 엄 비서의 귀에 나지막한 유은담의 협박이 파고들었다.

“아저씨, 배신이 특기인 것 같은데 딴생각하면…… 알지? 내가 뒤통수를 좀 많이 맞아와서 말이야.”

엄 비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은담이 바르기스 던전에 감금되었던 것도 김 사장의 지시였던 만큼 엄 비서는 그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다시 몬스터들 잡으러 가죠. 한국이 완전히 안전해질 때까지 계속 수고해주세요.”

손모아의 말을 마지막으로, 일행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져 몬스터를 잡고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다.

타국으로부터 유입되는 몬스터가 사라지자 던전 또한 남아 있지 않던 한국의 재난은 빠른 속도로 진압되어 갔다.

비록 진정한 위험은 아직도 하늘에서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리고 마침내 어느 정도 사태가 안정된 국면에 접어든 한국의 신문 1면을 장식한 토픽은 몬스터 사태가 아니었다.

랭킹 1위, 손모아는 누구인가.

새로운 랭킹 1위의 등장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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