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별장을 경비하는 헌터를 제압하는 것은 순식간에 끝났다.
심지어 싸우지도 않고 동료가 쓰러지는 걸 보자마자 겁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다.
덕분에 서지한은 약간의 위협만으로 김 사장이 지하 벙커에 숨어 있다는 것, 그리고 출입문 패스워드까지 알아낼 수 있었다.
마침내 벙커 안으로 들어와 김 사장과 대면하는 순간, 손모아는 자신이 품었던 작은 기대감이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이, 이 새끼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손모아가 기대한 것은 상황 수습을 하고 싶지만, 여력이 안 되어 힘겨워하는 김 사장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벌건 얼굴로 버럭버럭 외치는 심보 나빠 보이는 아저씨가 아니라.
‘아니,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돼.’
어쩌면, 한국에 몬스터를 풀어놓은 건 의도치 않게 실수를 해서 일이 꼬인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게 할 생각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백 번 양보해서 포탈로 몬스터를 소환한 게 의도적이었더라도, 사실 뭔가 다른 계획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머리가 나쁘고 계획대로 일이 진행 되지 않아 상황이 꼬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게 아니면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손모아는 열심히 정상인의 사고방식으로 그가 이런 짓을 저지른 이유를 유추하려 했다.
왜? 대체 왜?
뭔가 이유가 있겠지.
분명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아니, 이유가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착한 척 몬스터 잡고 다니면 사람들이 떠받들어 줄 줄 알았나? 멍청한 놈들. 어차피 세상은 네놈들 편이 아니야. 이리로 오면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았나 본데, 나 김 사장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 아니야.”
혀를 날름거리며 비열하게 노려보는 김 사장의 태도에 손모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져 갔다.
“도망칠 거 같지는 않아서 좋네.”
반서진이 싱글싱글 웃었다.
가느다란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에 잔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김 사장의 뒤편에 그를 경호하는 헌터들이 몇몇 있긴 했지만 대부분 문제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몇몇은 벌써 3미터짜리 서지한을 보고 몹시 동요해 도망칠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 진짜 서지한이 왔잖아. 그런데 왜 저렇게 커?”
“몰라, 젠장 설마 진짜 싸우려는 건 아니겠지?”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는 그들의 바람과 달리 김 사장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몬스터 소환 자체는 사실 한순간의 충동으로 저지른 실수였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그는 실수를 인정하기보다 자신을 합리화하며 맹목적으로 그 잘못을 강화해 나갔다.
지금도 이 방공호에서 몬스터 소환 포탈을 여는 외부의 헌터를 닦달하고 해외의 헌터 단체에 한국으로 몬스터를 보내라고 통신을 보내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소식은 온통 괴상한 것뿐이었다.
서울이 알 수 없는 결계로 봉쇄되어 포탈을 열 수 없어지질 않나, 저들을 비난하고 나서야 할 미디어에는 시민 제보라며 서지한 일행들의 시민 구조 영상이 마구 올라오질 않나.
설상가상 미리 협약을 맺었던 국가에서는 왜 다시 몬스터를 돌려보내느냐며 항의까지 해왔다.
그런 와중에 들이닥친 서지한은 그가 분노를 돌리기 딱 좋은 대상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름 높은 랭킹 1위 전투계 헌터를 앞에 두고 이런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겠지만, 분노는 언제나 지능을 떨어뜨린다.
“와, 제정신 아니네. 이 아저씨.”
유은담은 마치 개미 새끼가 까마귀를 향해 위협하는 것을 구경하듯 재밌다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벌건 눈알을 번들거리는 김 사장은 사실, 정말로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상태였다.
계획이 모두 실패한 데서 오는 공황 그리고 서지한과 다른 헌터들을 향한 열등감.
심지어 일부러 깔보며 무시하던 서지한이 막상 눈앞에 나타나자 가슴 깊은 곳부터 치미는 인정하기 싫은 두려움까지.
모든 것이 김 사장을 몰아붙였다.
“안 그래도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다. 이 새끼야. 감히 겁도 없이 날 찾아와?”
그럴 계획은 전혀 없었지만, 김 사장은 부러 호기롭게 말하며 서지한을 씹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정작 서지한은 아무 반응 없이 손모아의 등 뒤에 담담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헌터는 그가 김 사장 뒤에서 있는 헌터들을 한번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 전의를 상실해버렸다.
그들 중 당당한 것은 오직 제정신이 아닌 김 사장뿐이었다.
“사, 사장님. 이쯤 하시고 대피하시는 것이……."
아직 이성이 살아 있던 엄 비서가 조심스럽게 김 사장에게 속삭였으나 돌아온 것은 매서운 손찌검이었다.
쿠당탕하고 쓰러진 엄 비서를 한차례 내려다본 김 사장은 주춤거리는 자신의 경호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뭐 해, 이 새끼들아. 저놈들이 제 발로 왔는데. 안 잡고 뭐해?”
그러나 김 사장의 하잘 것 없는 위협보다 눈앞의 3미터짜리 서지한이 더 무서운 것이 당연했다.
경호 헌터들은 서로를 흘긋 거리며 눈치만 보았다.
결국 누군가 충동적으로 이동 스크롤을 꺼내 찢는 것을 시작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이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저, 저희는 몬스터들만 상대하기로 해서. 이런 건 계약에 없지 않습니까. 그, 그럼 이만……."
“하하, 저희가 서지한을 어떻게 상대합니까.”
“저희 경호 내용은 몬스터들 공격으로부터의 호위라……."
결국 남은 것은 김 사장과 민간인인 그의 비서진 뿐이었다.
비서진은 아연한 표정으로 어찌할 줄 몰라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좋아, 어차피 저런 놈들 쓸모도 없었어. 내가 직접 처리해주마.”
김 사장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순간, 손모아는 그의 몸에서 옅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공기를 가르며 작은 마력계 스킬이 날아왔다.
그러나 그 공격은 대상에게 닿기도 전에 허무하게 흩어졌다.
애초에 일행들이 입고 있는 장비 아이템의 등급을 생각하면 그 정도 방어능력은 당연한 것이었다.
“으음, 이 아저씨 각성자였네.”
유은담이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김 사장이 각성자라는 정보는 헌터 일보 사장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정보였다. 반면 비서진들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크윽, 빌어먹을……."
김 사장은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은 선택받은 인간이었다. 우월한 집안에서 태어나 특별하게 자란 사람이었다.
별다른 능력도 없이 돈만 많은 놈들과는 달리 각성까지 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차남으로서 언제나 콤플렉스 덩어리로 살아왔던 그에게 주어진 각성 능력은 그의 오만을 부채질하기 딱 좋은 재료였다.
하지만 그 능력이 너무나 약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너저분한 근접계 전투 스킬이 아니라 마력계 스킬이라 다행이었으나, 그 위력은 처참할 만큼 약했다.
그의 신체적 능력치는 일반인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가 명패나 물건을 수시로 집어던졌을 때 비서진의 이마는 찢어지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약하다. 그것도 스킬인가? 그냥 부채질해서 바람 불게 하는 게 훨씬 위력적이겠는데. 하긴, 이렇게 약하면 각성자인 거 감추고 싶을 만도 하겠다.”
유은담이 노골적으로 비웃자 사장의 이마에 핏발이 섰다.
자신의 스킬이 그리 강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던전 공략 같은 것은 밑에 놈들이 나 하는 천한 일이라 직접 헌터들 사이에서 굴러본 적이 없던 탓에 사장은 자신이 정확히 얼마나 약한지 알지 못 했다.
그래도 제대로 마음먹고 쓰면 한방 먹이는 수준은 된다고 생각했는데.
상대가 아무런 방어 스킬도 쓰지 않았는데 스르륵 흩어져버리는 자신의 스킬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충격적이긴 했다.
“이 새끼들……."
그러나 낮은 능력치를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다행히 눈앞의 애송이들은 많이 지쳐 보였다.
자신이 준비한 비장의 수를 쓴다면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지금 바로 몸을 빼서 도망가는 것이 이성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나타난 유은담, 반서후 등을 본 김 사장의 뇌리에는 달콤한 상상이 떠올랐다.
내로라하는 저 강한 헌터들이 자신의 스킬에 너덜너덜해져서 모두 죽어 나가는 그런 환상이 눈앞에 스쳤다.
꼬리 말고 두려워하며 도망치는 그런 비참한 꼴을 보이며 자존심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에 비해 그 환상은 얼마나 감미로운가.
사장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군……."
“뭐. 그렇지. 약한 데다 머리도 나빠 보이는 아저씨인데.”
유은담은 김 사장의 말을 하나하나 따박따박 받아치며 계속해서 그의 신경을 긁었다.
그는 능력치를 강화하면 제일 먼저 유은담을 쳐 죽이겠다고 생각하며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그가 꺼내 든 것은 두 병의 포션이었다.
손모아가 익히 알고 있는 형태였다. S급 마력 증가 포션.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이어서 나직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일부러 그랬어요?”
“뭐?”
“몬스터 한국으로 소환한 거, 일부러 그런 거예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사장이 박장대소하며 노골적으로 손모아를 비웃었다.
“당연히 일부러 그런 거지. 멍청하긴.”
“왜요?”
“귀찮게 꼬치꼬치 묻지 마. 뭐, 원래 의도는 이런 건 아니었다만, 한국에 몬스터를 불러온 테러리스트를 대한 그룹 김 사장이 제압했다는 뉴스가 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가만히 듣자 하니 하는 말이 점점 가관이라 결국 반서진이 끼어들었다.
“몬스터 불러온 테러리스트는 그쪽이잖아.”
“대중은 진실에 관심 없어.”
픽 하고 비웃은 그가 이죽거리며 덧붙였다.
“아직 그런 것도 모르다니 진짜 멍청한 놈들이군. 아, 너희들이 쓸데없이 몬스터를 빨리 잡아서 피해가 적어졌어. 기사 내기 전에 몬스터들 좀 더 풀어야겠구먼. 귀찮게.”
손모아는 고요한 표정으로 그가 지껄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알아요?”
“뭐? 알 게 뭐야.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내가 아는 건 피해가 충분하지 않다는 거지. 피해가 클수록사태 수습 후에 내가 들을 찬양이 커질 거 아냐.”
그렇게 말한 김 사장은 포션 두 병을 단숨에 땄다. 그리고 씩 웃었다.
“너희들은 이미 다 죽어서 내가 들을 찬양을 볼 수 없겠지만.”
말을 마친 그가 포션 병을 기울여마시려는 것을 본 서지한은 그것을 제지하려 했다.
그러나 손모아는 손을 들어 그 행동을 제지했다.
그리고 가만히, 김 사장이 두 개의 포션을 완전히 다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김 사장의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향상되어 무거운 마력이 치밀어오는 순간, 손모아는 모든 사람들을 끌어다 잡은 채 스크롤을 찢었다.
이동 스크롤이었다.
“……어? 도망…… 친 거예요?”
손모아가 사람들을 데리고 이동한 곳은 그들이 늘 휴식하던 호숫가 오두막 안이었다.
어리둥절한 유은담의 질문에 손모아는 대답 대신 냉장고에서 마실 것을 꺼내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왜 도망친 거야? 그딴 허접 새끼가 능력치 향상 포션 먹었다고 해서 우리가 지겠어?”
보다 못 한 반서진이 버럭 외치는 순간 손모아는 휴대폰을 꺼내 짧게 터치한 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휴대폰에서 조금 전까지 손모아와 사장이 나눴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음, 녹취 잘 됐네요.”
"왜 도망쳤냐고 물었잖아. 딴청 피우지 말고.”
그렇게 따지면서도 반서진은 자연스럽게 건네받은 음료를 따서 마시고 있었다.
손모아는 입술로만 빙긋 웃으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상대하기 싫어요, 저런 사람. 상대할 필요도 없고요. 쓸데없이 에너지 낭비하느니 그 힘 아껴서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하는 게 낫잖아요.”
"야, 그렇다고 도망……."
“5분 뒤에 돌아가죠. 그 정도 걸렸던 것 같네요.”
“그 정도 걸렸다니?”
세 사람이 어리둥절해하는 와중, 서지한은 손모아의 의도를 완전히 깨달았다.
손모아가 독도에서 S급 증가 포션을 마신 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서지한은 그 모습을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손모아는 당시 스킬 시전 이후 이동 스크롤을 쓰는 것도 간신히 성공했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때 손모아는 한 병만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 새끼, 두 병 마셨지? 분명.”
서지한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