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유은담의 눈에 섬광 같은 빛이 스쳤다.
“오호, 헌터 일보 사장이요?”
주민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채 그간 겪었던 억울함을 토로하기만 했다.
“네.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마을 사람들 방공호 빼앗아 가는 주제에 뭐 그렇게 당당하다고 이름을 떵떵거리며 말하는지.”
당당할 만하다.
헌터 일보의 사장이면 던전 관리청 청장마저도 한 수 물러주는 존재다.
어디 가서 그 이름을 말하고 푸대접받은 적은 없었을 테니 그 버릇 못 버리고 여기서도 이름을 팔아댄 거겠지.
“방공호만 빼앗아 간 게 아니에요. 원래 저기 대피한 헌터들도 싸우면서 사람들 지켜주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저 사장이라는 양반이 오니까 싹 안면을 바꿔서. 정말 우리 같은 사람은 뭘 믿고 살아야 하는지……."
헌터들이 그를 보좌하며 움직였다면 방공호 안에 있는 인물은 진짜로 헌터 일보 사장일 가능성이 컸다.
유은담은 내심 휘파람을 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헌터 일보 사장에게는 빚이 좀 있지.’
이전, 길드원에게 배신당하고 바르기스 던전에 감금당해 있던 무렵 유은담은 대외적으로 유유자적 모델들과 놀며 방탕한 일상을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허위기사가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풀려난 후 배후를 조사한 결과 허위기사의 시작은 헌터 일보였다. 다른 언론사는 그저 헌터 일보에서 원문을 받아다 재생산을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보스 몬스터도 돌아다니는데 왜 먼 곳으로 안 가고 이런 방공호에 숨었을까요?”
"아, 그거요? 무슨 스크롤이 없다나. 다른 데 가라 했더니 계속 도망 다니다가 아이템이 다 떨어져서 여기로 왔대요.”
“……그걸 그쪽한테 말해줬어요?”
"거기 헌터 중에 좀 착한 사람 하나가 그래서 자기들도 어쩔 수가 없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아니, 결국 우리 다 내쫓았으니 착한 것도 아니지. 에잇!”
그러니까, 이동 스크롤도 없는 헌터 일보 사장이 이 안에 있단 말이지.
정보를 종합한 유은담은 치미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안 그래도 이 일의 배후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가장 빠른 것은 포탈을 열고 있는 놈들을 잡아 족치는 것이었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언론사의 수장.
정보를 짜내기에 이보다 더 적합 한상대가 있을까.
“……아무튼, 그래서 얼마나……. 응? 왜 그렇게 웃으세요?”
참지 못 한 웃음이 새어 나와 히죽거리는 유은담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주민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유은담은 언제 음흉하게 웃었냐는 듯 상큼한 미소를 띠었다.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요. 그나저나, 이러고 있지 말고 어서 대피하시죠. 여기로 들어가세요.”
유은담의 권유에 주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그가 연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대피소로 통하는 포탈이라는데, 절박한 그들로서는 이것저것 따지고 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편하네.”
사람들이 모두 게이트 안으로 사라진 후 유은담은 방공호 입구로 다가갔다.
소란스럽던 밖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 의아했는지 안에서 작게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지? 포기했나?”
“다 죽은 거 아냐? 밖에 몬스터 있는 것 같은데.”
전쟁 때 쓰던 오래된 방공호를 재난 대피용으로 개조했는지 방공호의 문은 그리 견고하지 않았다.
철문이긴 했지만 은행이나 보안시설에서 쓰는 그런 종류의 단단한 철문은 아니었다.
그러니 민간인들이 지렛대로 열어볼 시도나마 했던 것이다.
유은담은 문틈으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문을 막고 있는 헌터들이 살짝 보였다.
이대로 문을 공격해 부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가뜩이나 지쳐 있는데 마력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밖에 누가 있는데?”
“몬스터겠지.”
태평한 헌터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은담은 조용히 스킬을 사용했다.
언제나 쓰던 냉기 대신, 바르기스의 뿔로부터 얻은 S급 독 스킬이다.
독무는 소리 없이 문틈을 통해 안으로 스며들었다.
“……어?”
안쪽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돌변했다. 얼빠진 목소리 뒤로 소란이 이어졌다.
사람을 순식간에 녹였던 바르기스의 독무.
그것이 헌터들을 덮친 것이다.
“녹, 녹는다. 내 발……!”
"해독, 해독 포션!"
"으악……."
해독 포션 따위가 통할 리가 없었다.
제대로 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헌터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말을 하며 들이마신 공기 속에 바르기스의 독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관지가 녹아버린 그들은 스르륵 거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완전히 절명했다.
“효율 하나는 최고라니까. 마력도 거의 안 들었네.”
만족스럽게 중얼거린 유은담이 스크롤을 찢었다. 문틈으로 확인했던 방공호 안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헌터들은 완전히 녹아버렸는지, 문 뒤쪽에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돼지가 어디에 있을까.”
핏물이 묻은 걸음을 찰박찰박 옮기며 유은담이 즐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방공호 안쪽은 그리 넓지 않았다.
좁은 굴 같은 복도를 조금 걷자 넓게 개조된 방이 나타났다.
그리고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는 헌터들과 헌터 일보의 사장이 있었다.
“유, 유은담!”
과연, 민간인들과 달리 단번에 유은담을 알아본 헌터 일보 사장이 입을 열었다.
헌터들 사이로 확 긴장감이 부풀었다. 입구를 지키던 이들이 죽었음을 눈치챈 헌터 하나가 재빨리 선제공격했다.
사람을 죽이고 들어왔는데 좋은 목적일 리가 없는 것이다.
“용감하네.”
몸을 날리려던 헌터가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바닥에 잔잔하게 깔린 냉기가 그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었다.
얼어붙은 신발 밑창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냉기가 정강이까지 올라왔다.
“허, 헉.”
유은담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냉기 하나만으로 그 자리의 모든 헌터들이 무력화되었다.
공격하려면 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유은담이 마음만 먹으면 머리까지 얼려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알고도 감히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개도 아닌데, 왜 충성심을 보이고 그래. 이런 아저씨한테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난 이해가 안 돼.”
조롱하듯 맨 앞에 선 헌터의 뺨을 톡톡 두드린 유은담이 살짝 웃었다.
“우, 우리는 청장님 지시로 경호하고 있는 것뿐이다.”
개라는 표현이 거슬렸는지 한 헌터가 변명하듯 대답했다.
“오, 목숨은 바치기 싫다 이런 뜻이지?”
“……그렇다.”
“아저씨가 팀장 같은 거야? 경호팀장?”
“맞다. 나와 내 팀원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경호하고 명령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뿐이야.”
유은담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여우같이 샐쭉한 표정으로 그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살려 달라, 뭐 이런 말이군.”
팀장이라는 말대로 이 자리에서 그나마 가장 강해 보이는 헌터였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는 유은담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비록 손모아와 서지한에게는 약골 취급당하는 유은담이지만 일반 헌터들은 감히 비벼볼 수도 없는 존재.
명실상부한 마력계 탑 티어 헌터였다.
“너희 뭐, 뭐 하는 거야. 이 새끼들, 너희 지금 뭐 하려는……."
심상찮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헌터 일보 사장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유은담이 겁나서 벽에 바짝 붙어 떨고 있던 주제에 목소리만은 우렁찼다.
“원하는 건 헌터 일보 사장이지? 넘겨줄 테니 우리 팀은……."
팀장의 말이 중간에서 뚝 잘렸다.
발끝에서 맴돌던 냉기가 순식간에 그의 머리 위까지 치솟아 얼려버린 것이다. 다른 헌터들도 같은 신세였다.
얼어붙은 그들을 향해 유은담이 차갑게 웃었다.
“이상하다. 왜 살려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네.”
처음부터 유은담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민간인들을 외면하다가 제 목숨이 달리자 재빨리 표변하는 헌터들.
그들도 어차피 평소 자신을 가십 삼아 떠들어 댔을 텐데 뭐가 예쁘다고 봐 준단 말인가.
유은담이 천천히 헌터 일보 사장에게 걸어갔다.
그 미세한 진동으로 얼어붙은 헌터들이 균열을 일으키며 파사삭 깨져 바닥으로 무너졌다.
그 광경에 도망치던 헌터 일보 사장의 가랑이가 순식간에 젖어들며 지린내가 확 풍겼다.
“힉, 히익, 헉.”
눈앞에 있는 유은담이 자신이 아는 유은담이 맞나?
철부지에, 제멋대로 살기 좋아하는 어린 애송이가 맞는 건가?
헌터 일보 사장은 업계 정보를 누구보다 많이 접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렇게 잔인한 모습의 유은담은 처음 보았다.
“오랜만이죠?”
“유, 유은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아무것도 안 했어. 다 대한 길드 김 사장이 한 거야. 저 미친놈이 몬스터도……."
유은담이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헌터 일보 사장은 벌벌 떨며 묻지도 않은 정보를 줄줄 토해냈다.
그가 유은담과 만난 것은 주로 카메라와 기자들이 잔뜩 있는 공식 석상에서였다.
한국 최강의 격투기 선수라 한들 결국 스폰서에게 굽혀야 하는 처지였다.
그러니 싸움 좀 잘하는 헌터라 한들 그들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사회적 방어막 없이 유은담을 독대하고 있으니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태연할 수 있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확실히, 알고 있는 거 많아 보이네. 보람 있겠다.”
“보, 보람?”
“고문하는 보람.”
해사하게 웃는 유은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입으로 내뱉은 말과 매치가 되지 않아 순간 얼어붙었던 헌터 일보 사장은 곧 반쯤 빌며 매달렸다.
“그런 거 없어도 다 말할게. 다 말해줄게. 뭐가 알고 싶어? 응? 내가다 알려줄 수 있어. 유은담 헌터, 아니, 은담아. 우리 이러지……."
“일단 누워 있지 말고 똑바로 서볼까요?”
빌던 헌터 일보 사장이 허겁지겁 일어났다.
바닥에 닿아 있던 팔꿈치와 엉덩이가 순식간에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일으켰는데도 그의 무릎 아래는 성애가 덮여 있었다.
"으으으……."
“엄살떨지 마시고. 포션만 있으면 금방 나을 수 있잖아. 자, 이제 우리 이야기해보죠.”
잠시 비명과 고통스러운 신음이 이어지는 시간이 이어졌다.
헌터 일보 사장은 고문할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던 사람답게 묻지도 않은 정보를 줄줄이 뱉어냈다.
입이 멈추면 냉기가 위쪽으로 서서히 올라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지 못 했다.
“다, 다 말했는데 왜?”
상체로 번져오는 냉기를 느끼며 헌터 일보 사장이 절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응? 아, 말해준 거 나도 개인적으로 조사하면서 대충 알고 있었어.”
"그, 그럼 왜 물은 거……."
“아〜 그거야, 녹취를 위해서지. 그래야 아저씨가 죽어도 증거로 삼을 수 있잖아.”
“자, 잠깐. 살려줘. 나 아직 아는 거 엄청 많아. 응? 다 말할 수……."
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냉기는 무정하게 위로 치솟았다.
마침내 머리가 완전히 얼어붙기 직전, 유은담이 미소 지었다.
“나도 아는 거 많거든.”
헌터 일보 사장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유은담이 천천히 방공호를 벗어났다.
다시 다음 보스 몬스터를 찾아 이동하려던 그가 멈칫하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누나! 아까 말씀하신 몬스터 테러사태 배후 확보했어요! 범인들 위치도요!٩(ˊᗜˋ*)و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할 일을 모두 마친 유은담은 스크롤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찢기 직전, 문득 하늘을 올려다본 유은담이 짧게 코웃음 쳤다.
“참 긍정적인 인간들이야. 저런 게 하늘에 있는데 숨으면 자기들은 괜찮을 줄 알다니.”
유은담의 눈은 맹렬한 위용을 자랑하며 꿈틀거리는 포식자에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흥미 없다는 듯 시선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