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3화 (183/231)

183화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략 결론이 났음을 인지한 서지한이 헐레벌떡 자리를 마무리하고 손모아를 침실로 몰아갔다.

알아서 올라가 자겠다는 손모아의 말도 통하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눈을 감는 모습을 기필코 보고야 말겠다는 서슬 퍼런 표정에 결국 손모아도 포기하고 순순히 따랐다.

“으음, 그럼 다른 헌터들한테도 스크롤 나눠주시고요. 저도 딱 한 시간만 자고 바로 합류할게요. 은담이 너도 쉬어야 하는데, 괜찮아? 반서후 씨는 괜……."

“괜찮아. 괜찮아. 유은담은 젊고 반서후는 한 것도 없으니까 멀쩡해. 자자, 올라가자. 잘 시간이에요.”

어울리지 않는 유치원 선생님 흉내까지 내며 서지한은 말 그대로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유은담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저 인간이 저렇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게 되는 날이 오다니.

정신적인 피로가 다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봐요.”

결국 손모아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침실로 향했다.

서지한은 마치 양 떼를 모는 개처럼 얼굴과 말, 몸짓까지 동원해 그녀를 침대에 눕히는 것에 성공했다.

부득불 이불까지 덮어 토닥이기까지 하니 손모아로서는 민망할 따름이었다.

“졸리지? 어서 자.”

“알았어요. 잘 테니까 이만 일 보러 가보세요.”

“아니, 너 자는 거 확인하고 나갈 거야.” 

이대로 등 돌리면 ‘역시 잠깐 가볼까’하고 게이트를 열어 엘파니스를 보러 갈지도 모른다.

서지한의 집요한 행동에 결국 손모아는 눈까지 감고 보란 듯이 고른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서야 서지한은 비로소 마음이 놓인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돌아 나왔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아직 빈둥거리고 있는 세 사람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절대, 내가 깨우러 올 때까지 모아 깨우지 마.”

“누나가 한 시간이라고 했는데.”

"깨우지 말라고 했다.”

결국 유은담은 히죽거리며 알겠다고 대꾸했다.

이런 서지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모아는 잠이 들기 직전, 불현듯 인벤토리에서 휴대폰을 꺼내 알람시계를 맞추고 잠이 들었다.

‘바쁘게 작전을 수행하다 보면 서지한 씨가 시간을 잊을지도 모르니까’라는 배려였다.

손모아는 문명의 이기를 사용할 줄 아는 현대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어코 한 시간만 자고 일어나겠다는 손모아의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작전 수행 중 머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에 호숫가로 돌아온 서지한은 휴대폰의 알람을 발견하고 혀를 차며 세팅된 시간을 꺼버렸다.

손모아가 잠든 사이 세 사람은 쉬지 않고 움직여 보스 몬스터 역배송작전을 수행해나갔다.

서지한은 지시받은 대로 단순하게 보스 몬스터를 발견하는 족족 대서양 한복판에 수장시켜버렸다.

위기에 빠진 타국을 조건 없이 도와주고 돌아온 대가가 보스 몬스터 테러라는 점이 괘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손모아가 대양에 버리고 오라고 했으니 그저 수행할 뿐이다.

서지한이 특유의 민첩성을 이용해 보스 몬스터를 빠르게 이동시키는 동안, 반서후는 순간 방어력을 극대화해 보스 몬스터에게 무조건 접근한다는 무식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방법은 다르지만 두 사람은 별 말없이 바다에 몬스터를 버리는 것에 따르고 있었다.

반면에 반서진은 약간 생각이 달랐다.

“역시 괘씸하단 말이지.”

염력을 이용해 내리치는 보스 몬스터의 앞다리를 비껴나가게 한 반서진이 입술을 핥았다.

장비 아이템으로 능력치를 상승시키긴 했지만, 워낙 지쳐서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염력으로 멈추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공격을 빗나가게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손모아는 애꿎은 타국 민간인이 죽을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반서진은 한 방 얻어맞고도 가만히 넘어갈 만한 성격은 못 되었다.

보스 몬스터의 공격을 빠르게 회피하며 바짝 접근한 반서진이 놈의 몸에 손을 대고 스크롤을 찢었다.

그녀가 다시 나타난 곳은 비명과 굉음이 몰아치는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한국과 다른 이국적인 건물들이 무참히 부서져 있었다.

간간이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아름다운 지붕과 조각상으로 한때 이 도시가 관광지로 꽤 이름이 높았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그래, 이거지. 이 표정이 보고 싶었거든.”

감당하기 버거운 일반 몬스터 떼를 상대로 간당간당 유지하던 전선에 돌연 나타난 거대한 보스 몬스터.

그것은 단순히 보스 몬스터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반서진은 높은 하늘 위에서 이국적인 외모의 헌터들이 아연하게 넋을 놓는 것을 구경했다.

무척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들의 눈동자에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너네가 버린 거, 다시 돌려주러 왔다.”

히죽 웃으며 말했지만, 생각보다 기분은 통쾌하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이 이 보스 몬스터를 한국에 버리고 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에 몬스터를 버린 수많은 헌터 중 하나가 이 국가 사람이라는 건 확실했다.

단 한번, 직접 이 눈으로 몬스터를 투기하고 가는 것을 봤다.

그때를 떠올리면 다시 분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아, 속이 다 시원하네.”

애써 쌤통이라고 생각하며 그대로 다시 떠나려던 찰나, 반서진의 눈이 멍하니 서 있는 작은 몸을 포착했다.

나이는 세 살에서 네 살쯤 되었을까.

지나친 공포에 넋이 나갔는지 웅크리지도 않고 보스 몬스터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벌벌 떠는 몸은 울지도 못 할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

그 근처에는 시신이 즐비했다.

아마 친지의 시신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그 앞으로, 반서진이 보스 몬스터를 데려온 것이다.

이 보스 몬스터는 충왕류.

충왕류 중에는 심심찮게 보이는 광범위 독 스킬도 가지고 있다.

반서진도 덕분에 염력으로 대기를 조정하고 접근하느라 꽤 고생했었다.

그 스킬 한 번이면, 이 일대의 모든 민간인은 죽는다.

저 어린아이도.

지나치게 길게 응시했는지 어린아이가 반서진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느낀 순간, 반서진은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아, 씨 진짜. 짜증 나게.”

결국, 반서진의 보스 몬스터 배송처는 다른 이들과 같은 대양 한복판으로 변경되었다.

“해수욕이나 해라, 하. 진짜 짜증 나.”

그러나 모든 몬스터가 바다로 향한 것은 아니었다.

거듭 생각한 반서진은 최대한 민간인의 피해가 없고 헌터들이 모여 있을 만한 각국의 시설에 보스 몬스터를 투하했다.

자신들처럼 바다에 보스 몬스터를 버린다는 선택지도 있는데, 굳이 수도에 몬스터를 남기고 간 행위에서 선명한 악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시각, 유은담 또한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유은담에게는 서지한 같은 기동력은 없었지만, 특유의 냉기로 몬스터의 움직임을 둔화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제보를 받는 대로 이동하며 수 마리의 보스 몬스터를 수장시켰을 무렵, 슬슬 한국으로 이동되는 보스 몬스터의 수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아마 두어 번 배달하는 놈을 역으로 따라가 그 장소에 수십 배의 몬스터들을 남기고 온 덕분인 듯했다.

“응?”

상공에서 제보받은 보스 몬스터의 위치를 찾던 유은담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숲 한쪽에 수십 명의 사람이 몰려 아우성치고 있었다.

“뭐지?”

일단 인근에 있던 보스 몬스터부터 바다로 이동시킨 후 유은담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무시하고 다음 일거리로 이동할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석연치 않은 예감이 들었던 탓이다.

모처럼 민간인들이 저렇게 모여 있으니 던전 게이트로 피난시켜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세요!”

“들여보내 주세요!”

“문 열어! 열라고! 이 새끼들아!”

목소리가 들릴 만큼 접근한 유은담은 단숨에 이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숲처럼 보이는 것은 위장 결계였다.

그 사실을 인지하고 가까이 다가서자 눈앞의 풍경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지하방공호의 입구였다.

잘도 찾았네, 이 사람들.

위장 결계로 가려진 데다 방공호의 철문은 마치 맨홀처럼 바닥에 붙어있었다.

그 위를 낙엽이 덮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치워냈는지 입구가 백일하에 드러나 있었다.

“열어줘! 열어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은 모두 민간인이었다.

근처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 사람인 듯했다.

아마 방공호 안에 있는 사람은 먼저 피난한 민간인일 가능성이 컸다.

“쯧.”

먼저 대피한 사람들이 나중에 온 사람을 배척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대부분은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도우려고 했지만, 마치 선악의 균형을 맞추듯 이기심을 부리는 종자들도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아마 방공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자신들만은 살아남을 거로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반대다.

살려 달라 외치며 모여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위장 결계를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실제로 유은담도 사람들을 보고 찾아오지 않았던가.

만약 유은담이 조금만 늦게 보스 몬스터를 옮겼다면 찾아온 것은 유은담이 아니라 보스 몬스터가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직 유은담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공호 입구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저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은 나뭇가지 같은 것을 틈새로 넣어 지렛대처럼 구부렸지만 그게 통할 리가 없었다.

유은담은 사람들의 후미로 접근했다.

그리고 초조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돌아보는 타이밍에 맞춰 싱긋 미소 짓자 상대의 얼굴에 ‘어라? 어디서 많이 봤는데?’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누, 누구세요?”

“아 구조 활동 중인 헌터예요. 방공호 안에도 민간인들 있나봐요?”

실제로 던전 게이트에 피난시키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은담의 소개에 주민의 경계심이 단숨에 허물어졌다.

워낙 절박해서 그런지 의심도 없이 믿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런 분도 계시네! 안에 있는 인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민간인도 아니고, 다 헌터예요. 헌터! 여기는 마을 사람들이 만든 임시대피소인데, 안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 다 내쫓고 자기들이 들어가 앉았다니까요. 나 참, 기가 막혀서!”

속사포처럼 하소연을 쏟아내는 주민을 보며 유은담은 슬슬 게이트를 열 준비를 했다.

말이 많아 보이니 게이트만 열면 나머지는 이 사람이 알아서 할 것 같았다.

워낙 바쁜 상황이라 게이트만 열고 유은담은 다시 보스 몬스터를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반색한 민간인이 이렇게 말하지만 않았다면.

“아니, 글쎄, 우릴 내쫓으면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이러더라니까요? 지금이 쌍팔년도야 뭐야? 내가 화가 나서 물었더니, 헌터 일보 사장님이시라나? 재수가 없어서!”

“……헌터 일보?”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