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착한 곳에는 난초 같은 꽃이 허공에 씨앗을 뿌리며 줄기를 휘둘러대고 있었다.
어림잡아 20미터는 넘어 보이는 식물이 그러고 있으니 흡사 전위예술을 보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와, 무슨 돌아버린 환경운동가가 만든 프랑켄슈타인 같다. 크아아〜 이놈들 환경파괴를 하다니〜 식물의 이름으로 다 죽여 버리겠다. 딱 맞지 않아?”
다들 지친 눈으로 보스 몬스터를 응시하는 와중에 그나마 쉬고 온 반서진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체력이 좀 생기니 혀를 움직일 기력도 좀 생긴 모양이었다.
“제초제 같은 거 있으면 좀 뿌리고 싶네요.”
“누나, 제가 독 써봤는데 안 통해요……."
농담을 받아줄 기력 따위 없는 손모아가 지긋지긋한 표정으로 대꾸하자 유은담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음. 물리 공격은?”
“얼려보긴 했는데, 그것도 별로……."
손모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유은담의 강함은 물리적인 공격력이 아니라 냉기라는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파괴력을 논한다면 자신이나 서지한에게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괜찮아. 그래서 우리가 왔잖아. 반서후 씨는?”
“저기, 앞쪽에서 막고 있어요.”
반서후는 이번에도 방어계 헌터가 할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의 위치를 확인한 손모아가 마력을 긁어모아 충왕포를 준비했다.
그리고 충분한 위력이 되겠다 싶을 때쯤 스킬을 시전했다.
앞으로 이어질 전투에 대비해 마력을 아껴 시전 한 탓인지 충왕포는 평소보다 10분의 1 정도 작아진 상태였다.
그러나 관통력만은 건재했다.
몬스터의 머리, 검붉게 빛나는 꽃을 향해 날아간 충왕포가 그대로 몬스터를 꿰뚫었다.
깔끔하게 구멍이 난 몬스터의 머리를 앞두고도 손모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안 되네.”
파괴된 단면에서 고사리 같은 줄기들이 꼬불꼬불 뻗어 나왔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얽히고 설키며 다친 부분을 완벽하게 재생해버렸다.
역시, 위력이 너무 떨어졌어.
하지만 마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걸 다 쏟아부으면 다음 일에 전혀 대비할 수 없어진다.
손모아가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하자 서지한이 손을 뻗었다.
“피나겠어.”
“아.”
붉어진 손모아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린 서지한이 엄지손가락을 확인했다.
“응, 다행히 피는 안 나네. 그럼 이번엔 내가 갔다 올게. 나는 아직 기력 넘치거든.”
자신만만하게 말한 서지한이 그대로 몸을 날렸다.
손모아는 그가 말과는 달리 거의 한계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정말 기력이 넘쳤다면 몸을 날리는 대신 원거리에서 암흑 강기를 날려 공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허세였음을 증명하듯 크게 휘둘러진 서지한의 낫은 몬스터의 몸을 반도 파고들지 못 했다.
평소였다면 잘린 부분을 잠식했을 검은 기운도 미미했다.
결국 손모아의 충왕포가 그러했듯, 서지한의 공격이 입힌 상처 또한 금세 재생되어 버렸다.
“우습게 생겨서 만만하게 봤는데 생각보다 까다롭네.”
반서진이 긴장감을 감추려는 듯 일부러 가벼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러게요. 그래도 방법은 있어요. 은담아, 서지한 씨가 공격하면 재생하는 부분 얼려줘. 넓게 얼려줄수록 좋아.”
“어, 누나, 근데 저거 얼려도 재생하는데……."
“괜찮아. 반서진 씨, 제가 공격하면 쟤네 파편들 다 분리시켜주세요.”
손모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지한의 사력을 다한 베기가 몬스터의 몸을 크게 반으로 갈랐다.
그러나 그 몸이 분리되기도 전에 위아래에서 줄기들이 뻗어져 나와 뭉치기 시작했다.
“은담아, 지금!”
“네!”
솔직히, 유은담은 지금 죽을 맛이었다.
이미 몇 시간 전에 마력이란 마력은 다 고갈되었고 포션 중독도 심화 상태라 몸 상태가 이만저만 나쁜 게 아니다.
지금 그가 버티고 있는 건 오직 자존심 하나 때문이었다.
죽어도, 저 반서후 꼰대 늙은이보다 먼저 쓰러지지 않을 거야.
그리고 지한이 형이 약골이라고 부를 빌미를 또 주지 않을 거야.
공교롭게도 반서후 또한 비슷했다.
자신이 먼저 지쳐서 포기하면 유은담이 ‘은퇴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든가, ‘형도 늙었구나’같은 말로 얼마나 깐죽거릴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서지한이 나이로 놀림당하는 꼴이 남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유은담의 자존심과 마력을 쥐어짜 구현한 스킬이 몬스터를 휘감았다.
서늘한 냉기와 함께 베인 부분이 빠르게 얼어붙었다.
그 서슬에 하마터면 말려들 뻔한 서지한이 놀라 몸을 빼는데, 그와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새하얀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충왕포였다.
얼어붙은 상처가 산산조각 나며 몬스터가 그대로 두 동강 났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반죽음이 된 몸으로 살아남으려고 조각들이 바르작거리며 모이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독까지 뿜어내며 아직 얼어붙지 않은 줄기를 미친 듯이 휘두르며 발악을 했던 것이다.
그 줄기가 일으키는 바람이 손모아의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할 정도였다.
“생존 욕구가 어마어마한데? 거의 보도블록 사이에서 태어난 수준?”
조롱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하며 반서진이 손을 뻗어 무언가를 슬슬 헤쳐 놓는 시늉을 했다.
그 손짓에 따라 모여들던 몬스터의 조각이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상체 하체가 분리된 몬스터에게 손모아와 유은담의 공격이 계속 이어졌다.
이대로 계속한다면 몬스터의 죽음이 확실시될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공격해도 몬스터의 꿈틀 거리는 조직은 굳건하게 재생을 반복했다.
보다 못 한 서지한까지 놈을 다져버릴 기세로 낫을 휘둘렀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누, 누나, 이거 얼마나 계속해야 해요? 저 좀 힘든데……."
“인마, 약한 소리 하지 말고 더 노력해봐.”
이를 악물고 있는 손모아 대신 반서진이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도 땀에 젖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손모아조차 내쏘던 충왕포를 멈추고 말았다.
서지한이 계속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멀리서도 헐떡이는 것이 보일 정도로 지친 상태였다.
그 사이 몬스터는 작은 조각을 얼기설기 이어 붙이더니 반서진의 염력을 뿌리치며 점점 큰 덩어리로 복원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압박감을 느낀 손모아가 인벤토리에서 A급 마력 회복 포션을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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