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8화 (178/231)

178화

“바, 반서진?”

한때 뉴스에 오르내렸던 전력이 있어서인지 헌터 중 적지 않은 수가 반서진을 알아보았다.

반서진은 그 반응에 대꾸도 하지 않고 좌중을 쓰윽 둘러본 후 엘파니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할아버지, 이 새끼들 뭐 하는 거야? 민간인들 도망치라고 게이트 열어줬더니 왜 이놈들이 들어와서 꼬장을 부리고 있어?”

“그게……."

말문을 여는 엘파니스의 얼굴에 옅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같은 왕의 아래에 속해 있다고 해도 그들은 어쨌든 반서진의 동족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

반서진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엘파니스가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며 조심스레 입술을 여는 순간, 일갈이 터져 나왔다.

“뭐? 갑자기 들어와서 다짜고짜 공격했다고? 그런 나쁜 놈들이 있나!”

"예?”

“뭐? 가진 것 다 내놓고 꺼지라고 했다고?”

“그……."

“다 죽여 버리고 이 던전을 빼앗겠다고 했어?”

“아니……."

“크헤헤, 던전은 빼앗고 민간인들은 노예로 써주마 라고 했단 말이지? 이 새끼들이?”

반서진의 터무니없는 억측을 막으려는 엘파니스의 노력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몇 번 시도하던 엘파니스는 그녀가 보내는 확실한 신호를 알아듣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무조건 이쪽 편을 들어주겠다는 뜻인 듯했다.

“야, 이 양아치 새끼들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뭐, 뭐? 무슨 소리야. 우리는 그런 적……."

반서진은 더 듣지 않고 제일 선두에 서 있던 헌터를 염력으로 들어 올려 땅바닥에 내리찍었다.

땅이 움푹 팰 정도로 강한 일격에 지켜보는 헌터들은 물론이고 엘파니스조차 움찔했다.

그 자리에 있던 민간인들은 겁에 질려 숨도 못 쉬고 있는 중이었다.

“불만 있는 놈들 지금 당장 나와. 빨리 조져버리게. 나 바쁘다.”

턱을 한껏 치켜들고 눈을 반쯤 감은 반서진이 도발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건방진 모습에 헌터 몇몇이 울컥해 무기를 꽉 쥐고 일어섰다.

적지 않은 숫자였다.

평상시였다면 S급 장비를 착용한 반서진에게 저런 놈들은 상대도 안 되는 레벨이었으나 지금은 몹시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반서진은 싸우지 않기로 했다.

“다 나왔냐? 자진신고 감사하고. 이제 꺼져.”

그 말을 끝으로 반서진은 그 자리의 모든 헌터를 허공에 띄워 게이트를 연 후 그 안에 던져 넣었다.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 줄 알고 그쪽에 신경을 쓰던 헌터들은 뜬금없는 일격에 번번한 저항도 못 하고 그대로 퇴장당했다.

“괜찮을까요?”

“뭐가?”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반서진에게 엘파니스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정작 반서진은 귀찮은 듯 시큰둥하게 되물을 뿐이었다.

“그래도 동족이신데, 왕께서 아시면……."

“뭐? 난 저런 놈들이랑 동족이었던 적 없어. 그리고 다음부터는 저런 새끼들 그냥 즉결처분으로 내쫓아버리든가 죽이든가 해. 할아버지가 키우는 낙타도 꽤 셀 거 아냐?”

"사슴입니다. 그리고 제가 키우는 게 아니라……."

“그래, 그 왕 사슴. 아무튼 그냥 즉결처분해.”

“하지만……."

“손모아가 그러라고 했어.”

반서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당당하게 손모아의 이름을 팔아먹었다.

엘파니스는 잠시 손모아가 그 순한 얼굴로 ‘들어오는 사람 다 죽이셔도 돼요’라고 말하는 걸 상상했다가 고개를 저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이었다.

반서진의 공갈을 전혀 믿지 않는 엘파니스였지만 솔직히 이렇게 절대적으로 이쪽 편을 들어주는 건 고마웠다.

내심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는 엘파니스에게 반서진이 성의 없이 손을 까딱였다.

“아무튼 정리는 대충 끝났고, 할아버지, 나 침대 좀 빌려야겠어. 한 시간만 자고 바로 또 싸우러 갈 거니까. 적당히 있다가 깨워줘. 저 민간인들은 일단 잘 챙겨놓고. 아직 대피시킬 곳 못 찾았으니까.”

던지듯 말한 반서진은 대답도 듣지 않고 바로 엘파니스의 거처로 걸어 들어갔다.

그 무심한 등을 잠시 바라본 엘파니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껏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럼, 당분간 쉬실 곳을 안내해드리지요. 누추한 곳이지만 적어도 안전만큼은 보장한답니다.”

내면 깊은 곳의 향수를 자극하는 포용력 어린 목소리에 불안에 떨던 민간인들이 조심스레 일어섰다.

그중에는 반서진의 입에서 나온 손모아의 이름에 흠칫했던 김 대리와 신 차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반서진이 던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팔아먹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손모아는 유은담이 호출한 장소로 바쁘게 이동했다.

덕분에 반서진이 게이트 밖으로 던져버린 헌터들을 마주치지 않았다.

헌터들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누나!”

이동을 마친 손모아를 유은담이 반가운 얼굴로 돌아보았다.

유은담의 꼬질꼬질해진 얼굴에 안도감이 번져갔다.

스킬을 시전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금방 달려오기라도 했을 듯한 모습이었다.

“보스 몬스터는?”

“저기요.”

고자질하듯 가리키는 유은담의 손가락 끝에 빛나는 로브를 두른 파르스름한 몬스터가 보였다.

푹 눌러쓴 후드 안에서 소름 끼치는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낯익은 모습에 서지한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악령왕 실라기스 비슷하게 생겼는데. 네 속성 공격 안 통해?”

"형……?”

“뭐?”

뒤늦게 서지한을 발견한 유은담이 움찔했다.

왜 그렇게 커졌냐 묻고 싶었지만, 손모아의 심각한 표정도 그렇고, 사력을 다해 보스 몬스터를 막고 있는 반서후를 생각하더라도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할 때가 아닌 듯했다.

“아, 아냐. 그, 내 공격 통하기는 하는데, 마력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대미지가 안 먹혀.”

“포션은?”

“포션 중독 심화 상태라 못 써.”

유은담이 멋쩍은 듯 헤헤 웃었다.

그러나 웃는 얼굴이 창백하기 짝이 없어서 서지한은 짧게 혀를 찼다.

손모아나, 유은담이나 다들 기력이 고갈된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그런데 저놈 왜 안 움직여?”

"서후 형이 속박 걸고 막고 있어. 나도 냉기로 붙잡고 있고.”

듣고 보니 거대한 보스 몬스터의 로브 끝자락에 희미하게 빛나는 금빛 구체가 보였다. 반서후의 방어막이다.

평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색을 보니 반서후도 한계에 달해 간신히 버티는 것이 고작인 것 같았다.

여기서는 현재 가장 기운이 넘치는 자신이 나서야겠지.

서지한은 손모아와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 그대로 보스 몬스터에게 돌진했다.

폭발할 듯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에 유은담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캬, 역시 지한이 형이라니까.”

"은담아.”

“네? 아, 저 비꼰 거 아니고 순수한 의미로 칭찬한 거예요.”

"수고했어.”

모아의 조용한 부름에 혼자 제 발 저려 눈치 보던 유은담이 감동어린 눈으로 모아를 응시했다.

그는 보스 몬스터의 관심이 서지한에게로 옮겨간 것을 확인하고 시전하고 있던 스킬을 해제했다.

때맞춰 반서후도 재빨리 몸을 뺐다.

“왔군.”

알은체하는 반서후에게 손모아는 고개만 까딱해서 인사했다.

“이쪽은 저랑 서지한 씨가 맡을 테니까 두 사람은 계속 보스 몬스터 찾아주세요.”

“아, 물론이죠. 서후 형, 흩어지자. 내가 서울 남쪽을……."

“아니, 두 사람 같이 다니는 게 좋겠어.”

평소 같은 컨디션이라면 모를까, 유은담은 바로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새파란 안색이고 반서후조차도 간간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상태였다.

따로따로 다니다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엑? 나 혼자서도 괜찮은……."

“같이 다녀.”

투덜거리던 유은담이 단호한 손모아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들에게 손모아가 성역 결계 출입 권한을 부여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결계 안팎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은담이 잘 부탁드려요.”

"그래. 이동하자, 유은담. 노량진 근처에 제보 들어와서 그쪽으로 갈 거야.”

여느 때와 같이 무뚝뚝하게 대답한 반서후가 스크롤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바로 이동하려던 반서후는 새하얀 손모아의 안색에 순간 멈칫했다.

워낙 표정이 생생해서 깨닫지 못 하고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여기서 가장 무리하고 있는 건 손모아였다.

하늘을 뒤덮은 성역 결계의 넓이를 고려하면 손모아는 이미 더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일 텐데.

“……몸조심해라.”

“맞아. 누나, 몸조심해. 여차 하면 던전으로 바로 이동해서……."

“간다.”

유은담이 하는 말을 그대로 끊으며 반서후가 그를 붙잡은 채 스크롤을 찢어 버렸다.

두 사람이 떠났으니 이제 남은 것은 저 보스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뿐이다.

서지한이 방금 실체화해서 전투력이 최고조에 올라 있는 상태이니 그가 혼자 충분히 몬스터를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꽤 고전하고 있었다.

악령왕과 비슷한 타입이라는 그 말대로 실체가 없는 몬스터에게 서지한의 공격은 거의 먹혀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힘을 아껴야 하는데…….'

온몸의 피가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는 듯한 마력 고갈을 느끼며 손모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극심한 마력 고갈에 몸은 휴식이 필요하다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만큼 버틴 것도 S급 장비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저렇게 고전하는 서지한을 앞에 두고 가만히 구경만 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다시 한번 인왕의 관이 빛을 머금었다.

현저하게 낮아진 기세로 뻗어나간 충왕포가 보스 몬스터의 머리에 작렬했다.

“모아야? 그냥 쉬고 있어! 내가……."

“구경만 할 거였으면 그냥 던전으로 가서 쉬었죠! 서지한 씨, 옆!”

머리를 관통하는 충왕포.

일반적인 보스 몬스터였다면 즉사하고도 남을 공격이었지만 위력이 부족했는지 놈은 건재했다.

증발했던 머리에 새카만 기운이 몰려들어 그림자 같은 머리를 다시 형성했다.

그래도 아예 타격이 없지는 않았는지 보스 몬스터가 위세가 다소 소극적으로 변했다.

‘약한 거 한두 방 계속 날리는 건 의미 없어.’

손모아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서지한의 낫에 거대한 기운이 맺혔다.

그리고 그대로 크게 가로 베기를 해 놈을 두 토막으로 잘라버렸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는 공격에 보스 몬스터가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베인 곳에서 검은 안개 같은 기운이 왈칵 흘러나와 되려 서지한을 역공했다.

‘제발,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저놈을 해치울 수만 있다면 당장 쓰러져도 좋다.

손모아는 더 이상 힘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쓸 수 있다면 모두 쓴다.

마른논을 파헤쳐 물을 짜내는 심정으로 손모아의 사력을 다한 한 방이 다시 한번 구현되었다.

보는 사람마저 압도될 것 같은 찬란한 빛.

우우웅콰아아!

섬광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없었다.

그렇게 손모아와 서지한은 열에 가까운 보스 몬스터를 처리해 나갔다.

대부분은 서지한이 해결했지만, 그와 상성이 나쁠 때면 약간이나마 회복된 마력을 짜내서 손모아도 함께 싸웠다.

서 있는 것도 힘들 정도로 지쳤지만 그래도 서울의 비명소리가 조금씩 잦아들고 몬스터보다 그들을 해치우는 헌터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드디어 기나긴 밤이 끝나고 서서히 동이 틀 무렵, 유은담에게서 다급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누나, 큰일 났어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