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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화 (176/231)

176화

“손모아! 모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모았어. 그쪽으로 던진다?”

계속해서 충왕포를 시전 하던 손모아에게 반서진의 연락이 날아들었다.

몹시 지친 모양인지 목소리에 버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강가를 활보하는 몬스터 몇 마리를 처리한 후 손모아가 대답했다.

“네. 바로 보내주세요.”

"그래! 띄울게!”

반서진의 대답 후 바로 시가지 쪽에서 거대한 몬스터의 구름이 떠올랐다.

몇몇이 반항하듯 스킬을 난사해 건물과 길을 파괴하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으나 불운한 몇몇은 잔해에 깔리고 말았다.

“몬스터 위치 확인했어요. 한강 쪽으로 최대한 붙이는 대로 죽일게요. 그리고 그 근처에 민간인들 건물 잔해에 깔렸는데, 여력 되면 구조해주세요.”

“여력? 여력이 되겠냐. 하, 그래도 최대한 해볼게.”

허공에 떠오른 몬스터들이 빠른 속도로 한강을 향해 접근했다.

그들이 최대한 가까이 붙은 순간, 충왕뇌우가 작렬했다.

한 번에 수많은 몬스터를 학살했지만, 손모아에게 휴식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멀리서 거센 날개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충왕류 떼다.

손모아의 모습이 천천히 그 무리의 선봉장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시각, 서지한은 실체화를 마친 후 스크롤을 찢어 던전 관리청 근처로 이동을 마쳤다.

시민들의 접근성을 배려해 도시 중심부에 있는 던전 관리청 주위는 그만큼 인구 유동량이 많았고 덕분에 피해도 몹시 컸다.

길가의 돌멩이보다 죽은 시민이 더 많이 보일 정도로 참혹한 현장이었으나 어디든 운이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관리청 근처의 맛집에서 맥주나 한잔 할까 하고 모였던 두 시민은 모든 사람이 몬스터에게 살해당하는 그 상황에서 화장실에 숨은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그 운도 이제 거의 끝난 것 같았다.

그들을 잘 숨겨주고 있던 화장실의 벽이 다른 건물의 잔해를 맞아 부서져버린 것이다.

“어쩌지? 지금이라도 뛰어?”

"야, 휴대폰 보니까 서울 전체가 난리야. 도망치면 어디로 도망친 단말이야?”

“밑에 땅이라도 파서 숨을까? 힉, 목소리 작게 해. 저기 몬스터들 있다고.”

“젠장, 젠장. 던전 관리청으로 지금 빨리 뛰면……."

“쉿!”

마치 기린처럼 기다란 머리에 코뿔소 같은 몸을 가진 몬스터가 생존자를 찾아 천천히 주변을 배회하고 있었다.

놈이 이쪽을 쳐다본 것 같은 기분에 두 시민은 순식간에 입을 다물고 숨죽인 채 떨기만 했다.

“야…… 근데……."

“조용히 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미친놈아.”

“아니, 근데. 야, 저거 봐. 저거 사람 아니야?”

한 명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을 확인한 나머지 한 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가늠하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처럼 생기긴 했는데, 너무 크지 않나? 좀 더 가까이 와봐야 알겠는데.”

“그래? 안 그래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기도……."

“어어, 몬스터 잡는다. 사람 맞네. 맞는 거 같은데, 그렇지?”

서지한은 자신이 도착한 지점부터 던전 관리청 사이에 있는 몬스터를 모두 학살하는 중이었다.

이미 다른 지역으로 다 이동했는지 이곳에 남은 몬스터는 몇 없었지만 혹시나 콘크리트 아래에 있을 생존자를 죽이려고 침 흘리며 돌아다니는 꼴을 보니 도저히 그냥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 서지한 아냐?”

“저 낫, 진짜 서지한 같은데?”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지자 두 사람은 서서히 새 인물에 대한 확신을 얻어 갔다.

사실 서지한은 이미 두 사람의 생존 사실을 감지한 상태여서 일부러 그 쪽으로 이동하며 몬스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낫 들고 있다고 다 서지한은 아니겠지만, 뭔가 분위기가. 그리고 머리스타일이……."

“어어, 맞네! 서지한 맞네!”

긴가민가 하던 두 사람이 서지한과 눈이 마주쳤다.

특유의 위압감과 검은 기운, 그리고 거대한 낫을 통해 굳어져가던 추측이 단숨에 확신이 되었다.

서지한을 실물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한때 매일같이 TV에서 나오던 인물이 아닌가.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그런데…… 키 너무 크지 않아?”

서지한인 것까지는 참 반가운 일이었으나 뭔가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서지한의 키가 너무 컸던 것이다.

원래 꽤 크고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저건 좀 심했다.

현재 손모아는 충왕 변이로 자신이 거대해질 수 있는 최대치만큼 몸을 불린 상태였고, 서지한의 영혼체 또한 그에 동조하여 약 2배에 가깝게 커진 상태였다.

그 상태 그대로 실체화한 탓에 서지한의 현재 키는 3미터에 가까웠다.

“확실히, 좀 큰 것 같기도. 알려진 것보다 좀 크네. 랭킹 1위라 그런가?”

“그, 그래도 너무 크지 않아?”

"랭킹 1위잖아. 뭔가 일반인과는 다른 점이 있겠지.”

“그래도 심하게 큰 것 같은데?”

그리고 마침내 서지한이 근방의 몬스터를 다 죽이고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눈앞의 무시무시한 거한에 두 시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살고 싶냐?”

“……예? 예……”

1미터 위에서 들려오는 위압적인 목소리에 두 시민은 고개도 못 들고 기가 죽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그들의 최선이었다.

들고 있던 낫으로 단숨에 쳐 죽일 것 같은 살기를 뿜어내던 서지한은 손을 뻗어 게이트를 열었다.

“들어가.”

“예? 저기예요?”

“싫으면 말고. 난 바쁘니까 간다. 저거 금방 닫혀.”

그대로 훌쩍 멀어지는 서지한의 등을 보며 두 시민은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일단 살았다는 생각에 다소 긴장이 풀린 그들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내 말 맞잖아. 너무 크다고.”

"랭킹 1위니까 그렇겠지.”

"랭킹 1위 되면 키도 크나?”

"그래도 난 저 정도로는 크고 싶지 않아.”

“그래? 나는 좀 크고 싶은데. 근데 이거 진짜 들어가도 되겠지?”

한 명이 걱정스러운 듯 게이트를 곁눈질했다.

망설임도 잠시, 정말 게이트가 닫힐 듯 일렁거리자 두 사람은 몹시 당황해 허겁지겁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서지한은 던전 관리청으로 걸어가며 예민한 오감을 이용해 스무 명에 가까운 사람을 구조해냈다.

바로 던전 관리청으로 가서 포탈을 빨리 부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잠깐 사이에도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사람 목숨이었다.

몸 바쳐 인명구조에 나설 만큼 영웅심이 넘치는 것은 아니었으나, 두고 가면 죽을 것이 확실한 이들을 외면하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특히 이렇게 많은 시신을 본 이후라면 더욱.

“개새끼들.”

던전 관리청의 모든 문은 셔터까지 굳건히 닫힌 상태로 폐쇄되어 있었다.

입구 근처에는 희망을 품고 던전 관리청으로 도망쳤을 시민들의 시신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필사적으로 던전 관리청의 문을 두드렸을 시민은 단단한 철문과 던전 관리청에서 새어 나온 몬스터를 마주해야 했을 것이다.

그 절망감이 그들이 생전에 품은 마지막 감정이었다.

서지한의 눈매가 몹시 사나워졌다.

콰앙!

사신의 낫에서 뻗어 나간 검은 기운이 그대로 철문을 박살 냈다.

갑자기 등장한 서지한의 모습에 문안의 헌터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뭐, 뭐야?”

“헉! 서지한?”

“미친, 미친!”

기존에 있던 포탈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 안에는 새로운 포탈과 이동 마법진을 유지하는 헌터들이 즐비했다.

그들은 포탈을 열고 몬스터를 받는 즉시 근거리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공격이나 방어 스킬이 없는 이동, 제작 등의 유틸 특화 헌터들이 돈을 밝히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나 이 지경까지 타락한 모습을 보자 서지한은 구역질이 치밀었다.

“어, 어쩌지?”

“막아야지.”

“저걸 무슨 수로? 막으려면 네가 막아.”

“그, 그래도 그대로 튀면 대한 길드에서 가만두지 않을 텐데……."

새카만 기운을 흩뿌리며 등장한 서지한은 밤의 어둠과 만나자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무서웠다.

그 살기에 직격 당하기까지 하니 이 안에 있는 헌터 중 누구도 그와 대적할 엄두를 못 냈다.

웅성거리는 헌터들 사이로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마친 몇몇이 재빨리 이동 스크롤을 꺼냈다.

“대한 길드는 나중 일이고, 일단 살아야지. 난 간다, 등신들아!”

자신만만하게 외친 헌터는 다음 순간 눈을 깜빡였다.

어? 스크롤을 찢었는데 왜 갈 수가 없지?

의아해하는 그의 시야에 손목 위에서 천천히 미끄러져 아래로 떨어지는 자신의 손이 보였다.

이어서 분수 같은 피가 터져 나왔다.

“으, 으아악!”

스크롤을 찢으려던 헌터들 전원이 순식간에 손을 잃었다.

서지한은 그 자리에 그냥 가만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도 언제 베였는지도 모르게 베인 것이다.

‘망했다.’

헌터들 전원이 한 마음이 되었다.

요즘 워낙 쉽게 서지한을 욕하고 다녔더니 그의 무서움을 잠시 잊었던 것이다.

살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헌터들의 희망이 깨끗하게 부러졌다.

“다 뒈질 준비됐지?”

대화는 그것이 끝이었다.

아주 잠깐, 서지한의 몸이 움직였다고 느낀 순간 그 자리에 있는 헌터들은 모조리 손을 잃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베이는 속도에 따라가지 못 한 피가 뒤늦게 터져 나와 바닥을 온통 붉게 적셨다.

“사, 사, 살려주세요.”

손목과 발목을 잃은 헌터가 필사적으로 뒤로 기어가며 서지한에게 빌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서릿발 같이 차가운 질문이었다.

“왜?”

“예? 예, 그 그, 다 말할게요. 다요. 필요하신 거 다 말씀드릴게요. 저 많이 알아요.”

“필요 없어.”

“자, 자 잠깐만요. 옥상에 더 있어요. 저희는 그냥 지시만 받고 한 거예요. 진짜는 옥상에서 새 포탈 열어서 도시로 내보내고 있어요. 저희가 부른 몬스터는 얼마 되지도 않아요.”

“필요 없다고.”

그가 말하기 전에도 이미 서지한은 이 건물에 숨어 있는 헌터들을 속속들이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을 보고도 숨어있는 쥐새끼부터, 방금 들은 옥상의 헌터들까지.

가능하다면 밖에서 그대로 던전 관리청을 폭격해 박살내고 싶었지만 자신의 스킬은 베기에 특화되어 있어 손모아처럼 무언가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능력은 부족했다.

광역 스킬이 있긴 했지만 마력계 헌터처럼 넓은 범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제한이 많았던 것이다.

서지한은 바쁘게 움직여 던전 관리청의 모든 포탈을 박살내고, 포탈을 유지하고 있던 헌터들은 손발을 잘라 던져놓았다.

몇몇은 손이 잘린 순간 옥상이나 건물 밖으로 도망쳤지만 그는 굳이 뒤쫓지 않았다.

전투능력을 상실한 헌터의 뒤로 몬스터들이 따라붙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팔에서 피를 뿜으면서도 도망치는 그 생존 욕구는 인상 깊은 것이었으나, 어차피 끝은 정해져 있었다.

“서지한 씨.”

지시받은 일을 모두 끝낼 무렵 때마침 서지한에게 손모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리 나눠가진 소통 유과를 사용한 것이다.

“응? 모아야, 왜?”

“그쪽 일 다 끝났어요?”

"응. 포탈 다 부쉈어.”

"수고하셨어요. 그럼 반서진 씨한테 바로 좀 이동해 줄 수 있어요?”

"둘이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저는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떠났는데, 반서진 씨 혼자 좀 버거운 것 같아서 백업이 필요해요.”

"알았어. 바로 갈게. 반서진 위치는 아까랑 똑같지? 올림픽대로 근처?”

"네.”

서지한은 가볍게 수긍하고 지체 없이 스크롤을 찢었다.

“어, 서지한.”

이동해 온 서지한을 아는 체하던 반서진이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훑어보았다.

“그, 성장기냐? 잠깐 사이 키 많이 컸다?”

서지한은 아직도 3미터가 넘는 키를 가진 상태였다.

영혼체일 때와 달리 실체화 시 한번 고정된 키는 실체화를 풀고 다시 실체화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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